충주 중앙탑(국보 제 6호)을 건탑하는데 사용된 석부재는 산척면 송강리 일명 산척산 일대에서 채취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같은 내용이 학계의 최종 공인을 받을 경우 충주 중앙탑을 원형대로 복원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지난 1917년 충주 중앙탑(공식 명칭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을 엉터리로 조립했다는 증거는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고 있다. 옥개석은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에 4조각으로 나눈 후 다시 꿰맞춤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경우 각층의 옥개석 세로선이 상하로 일치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충주 중앙탑의 옥개석은 2,3층 선이 가운데에서 우측으로 이탈돼 있다. 기단의 탱주와 면석 등에서도 잘못 조립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정상적인 석탑의 탱주는 위치가 일정한 각격을 두고 배열돼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충주 중앙탑은 간격이 일정치 않다. 사람의 얼굴처럼 세로로 서있는 면을 말하는 기단 면석 역시 탱주와 마찬가지로 위치 배열이 일정해야 하나 지금의 중앙탑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의 이같은 확인에도 불구하고 해체 직전의 실측도가 확인되지 않아 중앙탑을 원래대로 복원하는데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
한자 '表'(표)는 그것이 명사로 사용되면 '겉', '바깥' 등의 뜻을 지닌다. 반면 동사로 사용되면 '밝히다', '드러내다'로 쓰인다. 따라서 사당 '表忠祠'(표충사)에는 '충성심을 밝힌다'라는 뜻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고장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 의병장 조헌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표충사'가 자리하고 있다. 조헌의 영정을 모신 표충사는 충남 금산군 복수면에도 위치하고 있다. 두 사당은 명칭은 같으나 다른 점이 있다. 옥천 안남의 표충사에는 조헌 뿐만 아니라 아들 완기(完基·1570∼1592)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다. 조헌은 슬하에 4남2녀를 뒀다. 지금은 정실과 소실 관계가 거의 성립하지 않고 또 구분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러나 굳이 따진다면 완기만이 정실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나머지 3남2녀는 측실이다. 적자 완기는 22살에 사망했기 때문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 나머지 3남2녀는 대부분 장성했다. '조완도는 강음현감이고, 조완제는 전옥서 봉사이며, 다음은 조완배이다. 맏딸은 김노에게, 다음은 김성룡에게 시집갔다. 조완기는 자식이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완기는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 조헌을 따라 종군하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는 1592년 8월 1일, 금산전투는 이보다 18일 늦은 8월 18일에 있었다.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은 두 전투에 모두 참가했다. 그러나 그 숫자는 크게 달랐다. 청주성 전투에는 대략 1천7백명, 금산전투에는 7백명이 참가했다. 불과 18일만에 의병의 수가 1천명 가량 줄었다. 관군은 전공이 의병에게 돌아가는 것을 무척 꺼렸다. 때문에 국가의 운명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병의 활동을 방해하고 훼방을 놓았다. 심지어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일월록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처음에 조헌이 글을 보내어 순찰사를 책망하였기 때문에 순찰사가 감정을 가지고 각 고을로 하여금 조헌의 휘하에 응모하여 간 의병의 부모ㆍ처자를 모두 잡아 가두게 하고, 또 관군으로 하여금 응원해 주지 못하게 하여서…' 인용문은 계속 해서 '이때에는 조헌의 군사는 모두 흩어지고 7백 명의 의사(義士)가 남아 있어서 죽거나 살거나 끝까지 따르기를 원하였다'라고 적었다. 인용문에 등장한 순찰사는 당시 충청도순찰사인 윤국형을 말한다. 음력 8월 18일의 충남 금산전투에서 7백여명의 의병은 대부분 몰살당했다. 이들의 시신을 거둔 사람은 약간의 이설도 있으나 대체로 조헌
광복절인 15일 오후 청주 등 충북 일부 지역에 이른바 '물폭탄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이번 기록적인 강우현상은 16일까지도 예상되고 있어 적지 않은 비피해가 예상되고 있다. 이날 1시간 남짓 사이에 청주 106㎜, 오창 105㎜, 증평 72㎜(오후 6시 현재) 등을 기록하는 등 '물폭탄 현상'이 도내 중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장마기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물폭탄 현상이 나타난 것은 △북태평양고기압의 수축 △고온 다습한 남서기류 유입 △수렴대의 매우 느린 이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지난주 중국 대륙까지 확장했던 북태평양고기압은 이번주 들어 남동 방향으로 수축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남과 북의 큰 기온차로 인해 수렴대(강한 비구름대)가 활성화됐다. 여기에 남서기류가 한반도로 강하게 유입되면서 수렴대의 강한 세력이 계속 유지됐다. 이번 물폭탄 현상은 정체전선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렴대가 매우 느린 속도로 남동진하면서 도내 대부분의 지역에 강우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강한 비구름층이 통과한 청주, 청원지역에서는 물폭탄 현상이 나타났다. 한편 태풍은 북태평양고기압 세력의 외곽을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최근 발생한 태풍은
속보= 충주 중앙탑을 원형으로 복원하는 것은 물론 실측도 존재 사실이 밝혀진 이번 기회에 행방이 묘연한 1917년의 사리장엄들도 추적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고고미술자료 제 20집'(1968) 등 관련 논문에 따르면 조선통독부는 지난 1917년 11월 28일 중앙탑(공식명칭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 6호)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목제사리함, 은제사리호, 고경(古鏡) 2매, 지편(종이조각) 등을 6층 탑신부에서 발견했다. 발견 당시 목제사리함 속에 은제사리호가 존재했고, 그 안에는 극소량의 사리가 담겨져 있었다. 고경 2매 중 1매에는 파상문(波狀紋)이 이었으나 나머지 1매는 무문(無紋)이었다. 일제는 6층 탑신부의 사리 발견 11일 후인 11월 29일에는 기단석 밑에서 은제 사리기(舍利器)를 발견했다. 그 과정은 기단 밑의 평판석을 제거하자 이번에는 구멍이 있는 덮개돌(蓋石)이 발견됐고 이를 제거하자 은제 사리기가 나타났다. 장준식 충청대 박물관장의 논문 '중앙탑'(충북의 석조미술 일부)에 의하면 총독부는 그해 12월 5일 발견된 충주 중앙탑 사리장엄들을 본부로 송부하라는 지시를 현장에 공문으로 하달했다. 이에 답한 고증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
일제가 충주 중앙탑(공식명칭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 6호)을 엉터리로 해체·조립했으나 이를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는 실측도가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따라 민족 정기를 회복하고 왜곡된 문화유산을 바로 잡는 차원에서 충주 중앙탑을 실측 도면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충주 중앙탑의 기울기가 심하자 지난 1916년 탑의 해체·복원을 결정했다. 이에따라 1916년 11월부터 1918년 1월까지 관련 작업을 실시했다. 그러나 지역 문화재 전문가들 사이에 당시 복원이 졸속으로 진행돼 충주 중앙탑이 본래 모습을 잃었다는 주장이 간헐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충청대학 장준식 박물관장은 그의 논저 '충북의 석조미술'(충북학연구소 출간)에서 △4개 면의 탱주 숫자와 면석의 간격이 일정치 않고 △기단 갑석의 경우 부분적으로 다른 석질의 부재로 조립됐다고 밝혔다. 장 관장은 또 △탑신부의 경우도 조립이 잘못 되면서 세로선이 일직선으로 흐르지 않았고 △우주가 돌출되지 않고 면석으로 처리된 경우가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본보가 취재를 한 결과, 일제가 충주 중앙탑을 해체하기 직전에 작성한 실측도가 국가기록원에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국가
조헌이 우리고장 옥천에서 출생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으나 그렇지는 않다. 조헌은 1544년 경기도 김포현 감정리라는 곳에서 조응지(趙應祉) 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 어머니 잃고 계모를 맞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주경야독을 한 끝에 그의 나이 23살 때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왔다. 조헌은 보은현감도 역임했다. 여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조헌은 계모에게도 친모못지 않은 효도를 했다. 그는 혼자된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해, 자청해서 보은현감이 됐다. 바로 계모의 친정이 보은이었다. 계모는 의붓아들 조헌이 금산전투에서 사망하자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찌 이런 인물을 다시 보랴. 다만 다른 어미의 몸을 빌어 태어났을 뿐이지. 이 애야 말로 진실한 내 아들이다.' 조헌은 효자이면서 동시에 시조짓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청구영언과 해동가요에 실려 있는 시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제 / 사공은 어디가고 빈배만 매었는고 /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노매.' 내용 중 '지당'은 연못, '양류'는 버드나무, '내'는 안개를 의미한다. 조헌은 왜군이 임진년에 쳐들어 올 것으로 예상하고 1년전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제 / 사공은 어디가고 빈배만 매었는고 /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더라.'- 인용문에 등장하는 지당은 연못, 양류는 버드나무, 내는 안개를 의미한다. 시조 해설을 하면 연못에는 비가 내리고 버드나무에는 물안개가 끼었는데 뱃사공은 간데 없고 물가에 빈 배만 떠 있다. 그런 석양에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고 있다. 사공과 빈 배, 그리고 나와 갈매기가 짝을 이루면서 작가의 외로운 심정을 잘 드러나 있다. 다음 소개하는 또 한 편의 시조도 비슷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창랑(滄浪)에 낚시 넣고 조대(釣臺)에 앉았으니 / 낙조청강(落照淸江)에 빗소리 더욱 좋아 / 유지(柳枝)에 옥린(玉鱗)을 꿰어 들고 행화촌(杏花村)을 찾으리라.'- 창랑은 푸른 물결, 조대는 낚시터, 낙조청강은 석양의 푸른 강, 유지는 버드나무 가지, 옥린은 물고기 비늘, 행화촌은 살구꽃이 핀 마을을 말한다. 시조 해설을 하면 초장은 맑은 강물에 낚시를 넣고 낚시터에 앉았다는 상황 설정이다. 중장은 저물녘의 맑은 강을 시각적으로 그렸다. 종장은 버들가지에 고기를 꿰어 들고 살구꽃 핀 마을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오고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의 시작에 대해서는 음력 8월 1일과 2일로 약간은 엇갈린다. 그러나 1일 시작됐다는 내용이 보다 많다. 이날의 의병 공격은 3개 방향에서 동시에 시작됐다. 조헌과 영규대사의 연합 의병은 서문을 공격했다. 반면 청주 부모산에 진을 치고 있었던 박춘무 의병군은 남문을 공격했다. 그리고 연기 쪽으로 퇴각해 있었던 방어사 이옥의 관군은 미호천을 건너와 청주읍성 북문을 공격했다. 이날 전투가 치열했는지 여부는 사료마다 표현이 다소 엇갈린다. 선조실록은 "이날 밤 적이 화톳불을 피우고 기(旗)를 세워 군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진영을 비우고 달아났다"고 적었다. 반면 이긍익(李肯翊·1736∼1806)은 연려실기술에서 "이날 밤에 적이 저희들의 시체를 불태웠는데, 3일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다. 적은 북문(北門)으로 빠져 도망쳐 달아났다"라고 서술했다. 임란 발발 직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한 윤국형(尹國馨·1543~1611)은 문소만록에서 "이리하여 8월 1일에 크게 싸워서 비록 적의 머리를 베는 공은 세우지 못했지만 적도들이 화살과 총탄에 많이 맞아 그 형세가 매우 고립되었다. 이튿날 새벽에 적은 무리들을 다 이끌고 도망했다"라고 표현했다. 전과가
폭염의 기세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으면서 전국민이 집단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특히 주민들이 뙤약볕을 의식적으로 피하면서 한낮 유동인구가 줄어드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본보가 기상청의 지역별 상세관측자료(AWS)를 통해 도내 지역의 한낮 최고기온을 조사했다. 그 결과, 도내에서는 제천시 백운면 일대의 한낮 최고기온이 상대적으로 덜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주는 예상했던대로 인구, 고층건물, 콘크리트 면적이 상대적으로 많으면서 나타나는 도시 열섬현상으로 인해 최근 열흘 중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낮 최고기온이 도내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31~35도 사이의 기온 분포도를 보였다. 이와 관련 청주지역의 한낮 최고기온이 가장 높이 올라가는 시간은 오후 4시 20분 전후이고, 또 해질 무렵인 오후 7시가 돼야 한낮 최고치보다 대략 2도 정도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주지역의 이같은 기온 분포도를 참고로 다른 지역도 살펴본 결과, 도내에서는 제천시 백운면 일대의 한낮 최고기온(4시 20분 기준)이 상대적으로 덜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백운면 지역은 최근 열흘 중 7월 25일(29.2도), 26일(30.0도), 28일(29.4도), 30일(30.2도),
왜군이 1592년 5월 2일 보은, 회인을 거쳐 청주에 들이닥쳤다. 5월 2일이면 임진왜란이 발생한지 19일 밖에 안 되고, 또 우리고장 황간, 청산이 화염에 휩싸인지 나흘이 지난 시점이다. 게다가 관련 사료를 보면 왜군은 보은, 회인, 청주를 단 하루만에 주파했다. 이는 당시 청주성에서는 관군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왜군 북상로 주변의 관군은 모두가 달아났다. 왜군은 사실상 청주성에도 무혈입성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는 신익이라는 인물로, 청주읍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실록에 이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등장한다. "전쟁이 일어난 이후 패전한 장수들 중에는 신익(申翌)보다 더한 자가 없습니다. 당초 한 도의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청주에 머무르면서 왜적이 나타나기도 전에 허겁지겁 먼저 달아나서 허다한 군량과 병기를 모두 왜적의 손에 넘어가게 하였고 용인(龍仁)에 이르러서도 또다시 앞서 달아나 수만 명의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지게 만들었으니..."- 청주성은 이후 3개월 가량 왜군의 수중에 놓이게 된다. 이때 관군은 미호천 서쪽으로 퇴각해 왜군과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당시 충청도관찰사였던 윤국형이 쓴 '문소만록'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발발 1년 전부터 조선을 협박했다. 일본 승려사신 겐소(玄蘇·?~1612) 임란전 조선을 자주 찾았고, 강화회담에도 참여했던 인물이다. 일종의 직업 외교관으로 볼 수 있다. 겐쇼는 임란 1년 전 일본통신사 경험이 있는 김성일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일본을 거절하여 조공을 바치러 가지 못하였습니다. 평수길(平秀吉·도요토미)이 이 때문에 분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쌓여 전쟁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만약 조선에서 먼저 주문하여 조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면 조선은 반드시 무사할 것이고 일본 백성들도 전쟁의 노고를 덜게 될 것입니다."- 겐쇼는 이어 "옛날 고려가 원(元)나라 병사를 인도하여 일본을 쳤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에 원한을 갚고자 하니, 이는 사세상 당연한 일입니다"라고 노골적인 협박을 했다. 외교적인 언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왜인들이 자주 드나들고 많이 거주했던 부산에서는 임란 발발 1년전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실록이 적었다. '이후로는 해마다 조공오던 왜선이 다시 오지 않았고, 관(館)에 머물던 왜인이 항상 수십 명이었는데 점차 일본으로 되돌아가 임진년 봄에 와서는 온 왜관이 텅 비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가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전쟁 원인으로는 도요토미가 조선 도자기를 탐을 내서 등 여러 설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것은 영토 획득설이다. 도요토미는 전쟁을 해서 획득한 영토를 다이묘(大名·지방영주)와 무사들에게 나눠주고 이들은 그 같은 은전 때문에 주군인 도요토미에게 충성을 해왔다. 그러나 일본 전역을 통일하게 되자 이같은 메카니즘이 작동되지 않게 됐다. 그래서 영토를 외국, 즉 조선에서 획득하려고 했다는 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기 직전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번역된 일본 논문에 쓰여 있다. "일(조선침략 지칭)이 순조롭게 달성되면 새로운 정복에 의해 회득된 諸國, 봉록, 유리한 영지를 줄 것이며 너희는 많은 즐거움 속에서 여생을 보낼 것이다." 실제 도요토미는 명나라와 화친회담을 갖게 되자 7가지 요구를 하게 되고 그 안에 조선 4도 할양론도 들어 있다. 이때의 4도는 대체로 한강 이남을 의미한다. 실록에도 "급기야는 땅을 할양(割讓)하고 쌀을 바치는 일로 제도(諸道)의 백성들에게 공갈하고 있으니"라는 표현이 있어, 이를 확인하고 있다. 이밖에 일본천황 후궁으로 명나라 황녀를 보낼 것, 조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고지명 '쇠벼라'는 탄금교 서쪽의 쇠꼬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고, 그 뜻은 '소(沼)에 접한 벼랑을 따라 난 돌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세종 27년(1445)에 편찬된 용비어천가에는 한강의 물줄기가 통과하는 주요 지점의 지명이 등장해 있다. 내용 중에 '其一源自江原道五臺山 (중략)達川달내合爲淵遷쇠벼라…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 직역하면 '이 강의 한 근원은 강원도 오대산으로부터 (중략) 達川(달내)과 합쳐서 淵遷(쇠벼라)이 되고…' 정도가 된다. 태조실록과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쇠벼라'를 표기한 한자 표현인 '淵遷'(연천)이 다섯 차례 등장한다. '置水路轉運所完護別監 自龍山江至忠州淵遷凡七所 每所隷戶三十'(수로전운소 완호 별감을 두었다. 용산강으로부터 충주의 연천까지 무릇 일곱 소에 각각 30호씩 예속시키었다)- '慶原倉 在州西十里淵遷 收受慶尙道貢賦之所'(경원창, 주의 서쪽 10리 연천에 있는데, 경상도의 공부(貢賦)를 거두어 받는 곳이다)- 이와 관련, 어문학자들 사이에 △쇠벼라가 충주 어디에 위치하는 중세 고지명이고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먼저 그 위치성에 대해서는 △달천과 합하여 소(沼)가
충주 달천의 어원에 대해서는 전회에 수달이나 단물 관련설을 언급한 바 있다. 전자는 과거 달천에는 수달이 많이 살아서 '달강'이라 했고 이것이 '달천'으로 변했다는 설이다. 후자는 과거 달천은 물맛이 좋아 '단냇물'이라고 불렀고 이것이 '달천'으로 변했다는 설이다. 달천동 주변에는 '달다'가 변한 말일 수도 있는 '단' 자가 들어간 지명이 유난히 많다. '단월동', '단호사'(丹湖寺), '물개달래'(달천리 서쪽 물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달천과 관련한 내용이 등장한다. "달천 혹은 덕천(德川)이라고 한다. 고을 서쪽 8리에 있다. 근원이 보은현 속리산 꼭대기에서 나와서 물이 세 갈래로 나뉘었는데, 그 하나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다. 배를 띄우고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이행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였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인용문 중에 이행(李荇·1478∼1534)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그러나 이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이 서술했던 지명인 충주 달천 주변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1504년 갑자사화 때 홍문관 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 복위를 반대했다.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이 이를 가
조선시대에는 변경이나 군사요지에 설치돼 군량을 충당하던 토지를 둔전( 屯田)이라고 불렀다. 둔전은 시간이 흐르면서 경비 보충을 위해 관청에서도 설치했다. 전자는 국둔전, 후자를 관둔전이라고 불렀다. 둔전은 당초 취지와 달리 민전(民田)의 침탈, 농민 노동력의 강제 동원 등 민폐를 많이 끼쳤다. 이런 둔정이 긍·부정을 떠나 크게 황폐화됐던 적이 있다. 1592년의 임진왜란이다. 왜군이 물러가고 나라가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자 둔전을 재설치하는 문제가 급부상했다. 이때 이른바 '둔전 전문가'로 등장한 인물이 윤조원(尹調元·1572∼1637)이다. 그는 익산군수로 부임하여 전주지역 옥야(沃野)의 수로를 개통시킨 일로 가자(加資)된 적이 있다. 가자는 특별 진급의 일종으로, 정3품 이상의 품계에 오르는 것을 일컫는다. "전주(全州)의 옥야(沃野)가 40여 리인데 5일 안에 그 쌓인 찌꺼기를 파내어 수로를 개통시키는 역사를 마쳤으니, 그 공이 더욱 큽니다. 도감 낭청 심곤(沈·)과 차사원 익산 군수 윤조원(尹調元)을 강인(姜絪)의 예에 따라 논상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상께서 결정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윤조원은 1616년(광해군 8) 황해감사로 재직할 때 이이첨
충주고구려비 전시관이 최근에 개관돼 관람객을 맞고 있다. 충주고구려비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5~6세기 무렵에 고구려에 의해 세워진 역사적 실체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시골 마을의 '입석'(立石) 정도로 방치됐기 때문에 '역사' 위에 '설화'가 덧입혀져 있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이효장 설화'다. '이효장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중 순직했다. 시신을 서울로 운구를 하던 중 중앙탑 부근에 이르자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하구암리에 산소를 잡자 비로소 운구되었다. 조정에서는 이효장의 공로를 인정, 이곳 일대의 땅을 하사했고 그 표적으로 2개의 비석을 세워 경계로 정하니 그중 하나가 충주고구려비였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로,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설화와 유사한 면이 있다. 온달은 전투 중 '흐르는 화살'(流示)에 맞아 죽었고, 이효장은 근무 중 뜻하지 않은 변고를 당했다. 이효장(李孝長·?∼1463)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의(全義)다. 부친은 한성부윤을 지낸 이사관(李士寬)이고, 모친은 영의정 한상경(韓尙敬)의 딸이다. 실록에 그가 어떤 정책을 수행했는지는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호조참의로 있을 때 해청(海靑)을
충주고구려비가 지난주 실내 전시관이 개관된 이후 관람객이 크게 붐비는 등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첫 발견자가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여러 내용이 보도되는 등 혼선을 빚고 있다. 충주고구려비의 처음 발견 경위도 그 자체가 역사인 만큼 이번 기회에 정리를 한다. 역사 고고학적 사료는 제보-발견-검증 등의 과정을 거쳐 문화재급 유물로 최종 확인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충주고구려비도 이 과정을 거쳐 국보 제 205호로 탄생했다. 이 과정에 고 김예식 선생, 예성동호회 회원들, 정영호 교수 등이 핵심 인물로 등장한다. 충주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고비(古碑)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제보한 인물은 당시 공무원이자 예성동호회 회원이었던 김예식 선생으로 여겨진다. 고인은 생전의 저서 '중원 고구려비 발견 경위'에서 고비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2년 전인) 1977년 동국대 황수영 박사께서 충주를 방문하셨다. 황 박사님은 '충주에서 진흥왕순수비류가 발견되어야 하는데, 만약 고비가 발견되면 꼭 연락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이어 그는 고고학자 조유전 씨와의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고비를 제보하게 된 동기를 "잠깐만요. 저기 저 돌 보이시죠.
전회에 충청도관찰사 김육이 대동법의 전면적인 시행의 주장했으나 유림과 대신들의 주장에 막혀 곧바로 시행되지는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들이 어떤 이유와 명문으로 반대했는지 실록에 상세히 실려 있다. 현종 연간에 배기(裵紀)라는 유생이 상소를 올려 대동법 시행의 불가함을 아뢰었다. 그는 '호남에는 그것(대동법 지칭)을 시행할 수 없는 이유가 셋이 있고, 감당할 수 없는 다섯이 있습니다'라고 주장, 대동법 시행을 반대했다. 그는 그 이유 중의 하나를 다음과 같이 꼽았다. '지금은 호서(湖西)는 1결(結)에 10말, 호남은 1결에 13말, 이렇게 균등하지 못하게 거리가 가까운 곳은 도리어 가볍고 먼 곳이 도리어 무거우며, 각읍의 잉여미도 경비를 제한 외에 남아 있는 것이 수만으로 계산할 정도인데도 꼭 더 많은 잉여미를 두려고 하고 있으니, 이것이 시행할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한 마디로 도량형이 지역에 따라 다르고, 또 운반거리가 차이가 나는데 공물(貢物·쌀)을 전국적으로 균일하게 거두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이유의 또 다른 하나를 다음과 같이 거론했다. '지금은 지극히 흔해빠진 토산물까지도 모두 서울 시장의 높은 값
1639년(인조 17)에 제천지역 유림이 김식(金湜)·김권(金權)·김육(金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에 존재했던 봉강서원(鳳崗書院) 이다. 봉강서원은 1671년(현종 12)에 중건됐고, 1672년에 '봉강(鳳崗)'이라고 사액되어 선현 제사와 함께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후 복원되지 않고 있다. 배향 인물중에 김육(金堉·1580∼1658)이 보인다. 김육은 충청도의 대동법을 논할 때 생략할 수 없는 인물이다. 대동법은 하나의 세법에 불과하나 그것이 조선시대 나라 전반에 미친 영향은 이성계와 사대부 일군이 위화도 회군후 실시한 과전법에 버금갔다. 대동법은 나라에 바치는 잡다한 공물을 백미로 통일, 단순화시킨 공물법을 말한다.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우리고장에도 대동법을 확대 시행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충청 감사 김육(金堉)이 치계하기를, "선혜청(宣惠廳)의 대동법(大同法)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합니다. 경기와 강원도에 이미 시행하였으니 본도(本道)에 무슨 행하기 어려울 리가 있겠습니까. (…) 지금 굶주린 백
전회에 중종대의 충주목사 안위(安瑋·1491∼1563)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사실 그는 신체적인 장애를 갖고 있었다. 실록은 그가 한 쪽 눈이 멀었다고 적었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었다.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예조 좌랑 안위(安瑋)는 한쪽 눈이 멀었는데 본조(本曹)는 조정의 예모(禮貌)를 맡는 곳이고 또 객인(客人)을 접대할 때에 보기에 민망하니 가소서." 하니…'- 중종은 이에 대해 "다른 직임이라면 오히려 할 수 있거니와 객인이 보는 곳에는 예모에 합당하지 않다. 아뢴 대로 갈라"고 이직을 하명한다. 그러나 그는 신체 장애를 극복하고 구황행정을 잘 펼쳐 조선시대 특별 진급의 일종인 '가자'(加資)를 받았다. "충주목사 안위는 관직에 부지런하고 검소하였고 일 처리가 자세하고 익숙하여 진휼하는 일이면 다 강구하여 있는 힘을 다해 조치해서 때맞춰 구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내의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안위는 구휼행정만 잘 펼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손수 구황음식에 대한 책을 저술했다. 바로 '충주구황절요'다. 이 책은 1541년(중종 36) 안위가 충주목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기관(記官) 홍윤창(洪胤昌)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다. 내용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 205호)를 보존할 전시관이 공사 2년만에 준공돼 오는 19일 문을 연다. 충주시는 충주고구려비(구 중원고구려비)가 본래 위치하던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서 이날 개관식을 갖고 관람객을 본격적으로 맞을 예정이다. 공무원이자 예성동호회 회원이었던 고 김예식(신니면 출신) 선생은 '중원 고구려비 발견 경위' 글을 지난 1979년 '예성문화' 창간호에 기고한 바 있다. 기고문에 따르면 지난해 서거한 황수영(전 동국대총장) 박사는 충주 고구려비가 발견되기 2년전 이미 충주에 고구려 석비가 존재할 가능성을 예견했다.이와 관련, 충주고구려비가 지난 1979년 발견된 데는 노학자의 역사를 꿰뚫어보는 예견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2년 전인) 1977년 동국대 황수영 박사께서 충주를 방문하셨다. 황 박사님은 '충주에서 진흥왕순수비류가 발견되어야 하는데, 만약 고비(古碑)가 발견되면 꼭 연락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황 박사가 충주에 고구려 석비가 존재할 가능성을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충주가 지니고 있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다. 충주는 고구려비 발견 이전부터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제 401호), 건흥5년명 금동불상, 장미
이문건(李文楗·1494∼1567)이 쓴 '묵재일기'에는 양아록 주인공 숙길(淑吉) 외에 맏손녀 숙희(淑禧·1547~?)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등장한다. 이문건은 대를 이을 손자 숙길이가 태어났을 때는 축배를 드는는 등 부산을 떨었다. 맏손녀 숙희가 태어났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점차 숙희의 행동이 맘에 들었는지 여러 행동을 촘촘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숙길이 누나 숙희도 여느 아이와 마찬가지로 병치레를 많았다. 이문건은 1553년 일기의 한 부분을 이렇게 적었다. "아이는 약질로 태어났으며 성품이 밝고 명랑하나 조급하고 잘 울었다. 계축년(7살) 8월 풍열을 앓는 것이 경기와 같았는데 약을 썼더니 차도가 있었다. 그해 9월에 아랫니를 갈기 시작했다." 이문건은 성주에 두 채의 집을 갖고 있었다. 숙희는 할어버지의 귀여움을 받으며 주로 위채에서 생활했고, 이때 일기를 매일 쓰고 또 편지를 주고받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게 된다. 이 때문인지 숙희는 할아버지 이문건에게 "나도 글을 가르쳐달라"고 자주 졸랐다. 이문건은 묵재일기 한 부분을 이렇게 적었다. "어제부터 천자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숙희의 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숙희는 9살 때 육갑, 13
조선시대 사헌부는 오늘날로 치면 대략 검찰에 해당한다. 그 수장은 종2품의 대사헌이다. 그 밑으로는 종3품의 집의(執義), 정4품의 장령(掌令), 정5품의 지평(持平) 등이 이었다. 사헌부 벼슬아치는 관리를 감찰하고 임금에게 간언을 했기 때문에 그 직위에 관계없이 '대간'(臺諫)이라고 통칭되기도 했다. 성종 연간에 사헌부 집의를 지낸 인물로 안위(安瑋·1491∼1563)가 있다. 사료를 보면 그는 1539년 사헌부 집의가 되어서 소세양(蘇世讓)과 함께 당시 세도가인 대윤 윤임(尹任·1487-1545)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미움을 사서 1542년 우리고장 충주목사로 좌천됐다. 이를 두고 조정에는 쑥덕공론이 많았다. 당시 사관이 '이해되지 않는 인사'라고 생각됐는지 실록에 이례적으로 장문의 사론(史論)을 적었다. '사신은 논한다. 전에 소세양(蘇世讓)이 윤임(尹任)을 탄핵하려고 장령 안위(安瑋)에게 부탁하여 대론(臺論)을 유발하려다가 끝내 실행하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 후에 안위가 충주 목사로 나가고 안위의 아우 안현(安玹)이 전라 감사로 나가게 되자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의심했었다.'- 조선시대 도적이 창궐은 탐관오리의 횡포 외에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와
지역 성주이씨 문중이 얼마전 묵재 이문건(李文楗·1494∼1567) 부부의 묘를 경북 고령에서 문중산이 있는 괴산문 문광면 대명리 송면산 자락으로 이장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시대 원피스인 철릭(帖裏), 지석의 일종인 묘지명 등 부인 안동김씨 '돈이'(敦伊·1497-1566)의 유품이 다량으로 발견됐다. 명종 때 장조카 이휘가 을사사화에 연루돼 극형당할 상황에 놓였다. 이때 이문건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부모 신주를 본인 집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는 이때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누님이 새벽에 오셨다. 함께 울었다. 밥과 국과 술잔을 가지고 신주 앞에 차려 놓고서 통곡하였다.'- 능지처참을 당할 정도의 대역죄를 지었으면 삼촌인 이문건도 중형에 처해졌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문건이 고향유배라는 비교적 가벼운 형을 받았다. 김언묵의 딸인 돈이는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와 사촌간이었다. 이문건과 부인 안동김씨의 부부금슬은 전반적으로 좋았으나 한번 대판싸운 내용이 묵재일기에 기록돼 있다. 이문건이 외박을 하고 들어오자 안동김씨 돈이가 이렇게 바가지를 긁는다. "멀지도 않은 곳에 있으면서 어째서 밤에 기생을 끼고 남의 집에서 잤수. 어찌 이것이 늙은이가 할 짓이란 말이오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