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에도 전통운반 수단으로 수레가 긴요하게 사용됐다.수레는 국가 재정의 원천이 되는 세곡(稅穀)은 물론 서민용 소금 운반에도 사용됐다. 세종실록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우리고장 충주를 배경으로 등장한다. '단월역(丹月驛)에서 양재역(良才驛)까지 도로(道路)를 정비하게 하고 수레를 사용하여 수송을 원활하게 하라는 계가 있었다. '충주 단월역에서 양재역까지 도로가 평탄하여 수레가 다닐 수 있으니 선공감으로 하여금 수레를 4대씩 만들어 주게 하여 잡물을 수송하게 하고…' 그러나 수레는 고난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제작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레는 예로부터 바퀴 둘레에 철판을 입히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조선후기 기록인 정조실록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등장한다. '여러 고을들이 모두 한두 마리의 우차(牛車)를 사용하여, 곡식을 운반하고 시탄(柴炭)을 실어나르느라 수백 리의 사이를 오고가고 했는데, 제작이 거칠고 둔하여 멀리 가기는 불가능했음은…' 이처럼 조선시대의 교통여건이 열악함을 벗어나지 못한 데는 도로관리도 한 몫을 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웃을 일이지만, 당시 조정은 도로가 너무 잘 관리되면 자칫 외적 침투로로 악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청주시민들은 미호천과 무심천이 만나는 곳을 '작천'(鵲川) 또는 '까치내'라고 부르고 있다. 언뜻 '까치내'는 조류 까치를 연상케 하나 그렇지는 않다. 현재 두 개의 어원설이 제기돼 있다. 하나는 '까치내'를 '아치내'의 변형으로 보는 견해다. 이때의 아치'는 '작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설날 전날을 '까치설'이라고 한다. 이때의 '까치'도 '작다'라는 뜻의 '아치'가 변한 말이다. 또 하나는 '가지내'가 '까치내'로 변했다는 설이다. 이때의 '가지'는 '갈래' 즉 '지천'(支川)을 의미한다. 미호천이 큰 하천이라면 무심천은 갈래 하천, 즉 지천으로도 볼 수 있다. 두 어원 사이에 정설은 아직 없다. 까치내 일대에 형성된 들이 '팔결들'이다. 대략 오근장역 북쪽에 위치하는 들로 보면 된다. 어문학자들에 따르면 팔결들의 한자식 표기는 '八結坪'(팔결평)이었다. 팔결들은 의외로 농경지 면적을 측정하는 방법인 '결부법'(結負法)과 관련이 있다. 결부법은 경무법(頃畝法)과는 달리 토지의 비옥도를 토지 면적에 반영한 측량법으로 조선시대 세수(稅收)의 기준이 됐다. 이 경우 '八結坪'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여덟 결(結)의 들' 정도가 된다. 조선시대 1결의 넓이는
전회에 미호천의 어원이 '미꾸지'(한자 표기는 彌串)라는 지명에서 유래됐다고 밝힌 바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꾸지'에서 물고기 '미꾸라지'를 연상하고 있다. 미호천에는 얼마 전까지 천연기념물 제 454호인 미호종개가 서식했다. 미호종개도 미꾸라지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사촌격인 '미꾸리'도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종 분류상은 분명히 다르다. 한지 표현으로도 미꾸라지는 '추어'(鰍魚), 미꾸리는 진흙 미꾸라지를 뜻하는 '이추'(泥鰍)로 적고 있다. 그러나 '미꾸지'는 '미꾸라지'와 전혀 관련이 없는 지명이다. 미호천에 미꾸라지가 많이 살아 '미꾸지'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순우리말 '곶'(串)은 해안가나 내륙하천의 툭 튀어나온 지형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된다. 경북 포항의 호미곶, 북한 황해도의 장산곶 등이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과장하면 닭의 며느리발톱처럼 돌출된 모습을 하고 있다. '미꾸지'(彌串)도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 청원군 강내면 연정리에서 서쪽으로 승용차를 몰면 궁현리, 산단리, 사곡리를 거쳐 삼거리에 도달한다. 반면 부강에서 북쪽으로 차를 몰면 명학리, 내판리를 거쳐 역시 삼거리에 도달한다. 이곳이 전회에도 언급한
청주·청원이 통합됐다. 이와 관련, 벌써부터 미호천이 크게 주목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호천의 어원은 어떻게 될까. 생각보다 복잡하고 의외로 '문화 권력'과 관련이 있다. '미호천'이라는 지명은 '미호'(美湖), 즉 '아름다운 호수'라는 뜻과는 관련이 없다. 미호천이라는 지명은 세종시 동면 예양리 '미꾸지'라는 지명에서 시작됐다. 한국교원대 김순배 박사의 논문에 따르면 이 '미꾸지'는 1864년의 대동여지도에는 한자 '두루 미, '곶 곶' 자를 쓴 '미곶(彌串)으로 표기돼 있다. 이후 1872년의 연기현지도에는 '아름다을 미', '곶 곶', '나루진' 자를 쓴 '미곶진'(美串津)으로 변했다. 그러다가 구한말에 지금의 지명인 '아름다울 미', '호수 호' 자를 쓴 '미호'(美湖)로 변했다. 그러나 '미호'라는 지명은 지금은 세종시(구 충남 연기지역)보다 청원군 강내 지역에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나름의 사연이 있다. 조선후기 연기군 동면 예양리 일대의 유력한 재지사족은 이른바 '결성張씨' 문중이었다. 익히 알다시피 조선시대 양반가는 유교정신으로 무장된 계층이다. 따라서 결성장씨 가문이 '미꾸지'라는 투박한 지명보다, 일대를 '양인동'(養仁洞·仁을 키
1785년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났다. 북경에서 한국 가톨릭 최초의 영세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李承薰)이 서울 명동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기도회를 갖다가 순찰 중이던 포졸에게 적발됐다. 이때 교인으로는 남인계 집안인 정약전, 약종, 약용 삼형제와 10여명의 교인들이 김범우의 집을 드나들고 있었다. 결국 "서학(西學)에는 좋은 곳이 많고 그른 곳을 모른다"며 종교적 양심과 신념을 굽히지 않은 김범우는 우리고장 단양(일부에서는 밀양 단장 주장)으로 유배된 끝에 장살(杖殺) 후유증으로 1년만에 사망했다. 현재 한국 가톨릭은 김범우를 첫번째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을사추조적발사건은 한국 가톨릭에 대한 박해의 신호탄이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 사건을 계기로 충북 중·북부 지역과 원주, 영월 등 강원 남부지역의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가톨릭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남한강 물길을 따라 올라온 후 괴산, 연풍, 제천, 단양 , 강원도 남부지역 등 백두대간 서쪽 산골로 대거 숨어들었다. 이들은 산자락 토굴 등에 은거하며 화전을 일구거나 옹기를 굽는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신앙 네트워크를 갖췄고 그것은 교우촌으로 성장
해괴제는 전통시대 나라 안에서 지진 등 이상한 일이 일어났을 때 지내던 제사를 말한다. 옛사람들은 나란 안에서 괴이한 일이 일어나면 자연속의 기 흐름이 응어리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해괴제는 문헌상 고려 현종 14년에 처음 등장한다. '을해일에 金州에 지진이 있었다. 이때부터 지진이 발생한 자리에 해괴제를 지낼 것을 명하였다.'- 고려하면 떠오르는 것이 불교다. 그러나 고려의 조정은 불교 만큼이나 점술을 믿고 숭상했다.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복주(지금의 안동)를 거쳐 우리고장 청주에 5개월 가까이 머무른다. 이를테면 청주가 한때 고려의 임시수도 역할을 한 셈이다. 홍건적이 거의 물러나가 공민왕은 점술가를 불러들여 '어느날 개경으로 환궁하는 것이 좋겠는가'를 점쳐보게 한다. 고려 조정에서의 주술을 그만큼 일상적인 것이었다. 해괴제도 그 범주의 하나에 속했다. 조선시대의 해괴제는 문헌상 태조 7년에 처음 등장한다. 해괴제는 자연에 지내는 제사의 일종으로 반드시 축문을 지어 읽었다. 해괴제는 지방뿐만 아니라 궁궐 자체에서도 지냈다. 이때 가장 많은 원인 제공자는 엉뚱하게도 부엉이 울음소리였다. 당시 궁궐에서는 부엉이 울음소리를 매우 불길한 징조로 여
아직도 윤기가 느껴질 정도의 4백여년 전 조선 여인의 복식이 발견돼 학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이 사부가(思婦歌)의 애뜻한 사연을 담아 넣어준 이 여인의 묘지명(墓誌銘)도 발견돼 함께 주목을 받고 있다. 1일 충북대박물관(관장 양기석 교수)은 "성주이씨 문중이 얼마전 이문건 부인 안동김씨 묘를 경북 고령에서 충북 괴산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철릭(帖裏), 묘지명, 모자 등을 발견해 최근 본 박물관에 기탁했다"고 밝혔다. 또 도포끈을 매는데 쓰는 세조대(細條帶)와 백자 항아리 등도 10년 보관 조건으로 기탁했다고 충대 박물관은 밝혔다. 기탁된 철릭은 안동김씨(돈이)가 1566년(명종 21) 사망한 후 묘에 부장된 유품의 하나로, 4백40여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윤기가 느껴질 정도로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따라서 한국 복식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도내에서는 지난 1977년 발견된 순천김씨(1580년 추정) 의복이 비교적 오래 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 크기는 세로 길이 131㎝, 한쪽 저고리 길이 113㎝ 등으로, 윤기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비단이 재료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함께 출토된 23x17㎝ 크
조선전기 복지제도의 하나로 연호미법(煙戶米法)이 있다. 이는 풍년들 때 쌀을 더 거뒀다가 흉년이 들면 다시 나눠주던 제도를 말한다. 규정대로 시행됐으면 매우 이상적인 복지제도로 볼 수 있다. 고려 현종 14년(1023)에 처음 도입된 이 제도는 조선 태종 7년(1407)까지 계속 시행됐다. 그러나 연호미법은 그 직후 폐지된다. 탐관오리가 중간에서 농간을 자주 부렸다. 이들은 세미를 과다하게 설정해 놓고 그 차이를 중간에서 빼돌리는 수법으로 착복을 했다. 조선전기 청주목사를 지낸 인물로 김자수(金自粹·?~?)가 있다. 그의 본관은 경주, 호는 상촌(桑村)으로, 김세필이 그의 고손이 된다. 그는 시문이 동문선에 실릴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다. 그가 우리고장의 사례를 들어 연호미법의 폐지를 주장했다. '우선 충주·청주의 두 고을로 본다면, 청주는 원래의 전지가 1만 3천 9백 80결(結)인데, 더 늘어난 것이 5천 70결이고, 충주는 원래의 전지가 1만 6천 1백 70결인데, 더 늘어난 것이 4천 5백 70결이니, (…) 이것은 탈루가 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이런 때를 당하여 또 연호미(煙戶米)를 거두게 되면, 백성들의 원망이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충북의 인구가 오는 2040년에는 2010년보다 12.4% 증가한 171만1천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전국평균 증가율 3.4%보다 4배 가까이 높은 수치로, 향후 세종시와 그 주변지역이 인구 흡입구 역할을 할 것으로 분석됐다. 27일 통계청이 전국 15개 광역단체의 향후 30년 동안의 인구 추이를 분석한 '장래 인구추계 시도편' 자료를 발표했다. 발표 자료에 따르면 충북의 인구는 오는 2020년에는 162만7천명, 2030년에는 169만7천명, 2035년에는 171만3천명으로 정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이후 2040년에는 171만1천명으로 감소세로 돌아설 것으로 예측됐다. 그러나 2040년의 전망치는 2010년과 비교해 18만9천명(12.4%)이 증가한 수치이다. 2040년 충북의 인구 피라미드는 고령자가 청·장년층보다 많은 역삼각형 모양의 항아리형이 될 것으로 예측됐다. 그러나 이 항아리는 단순한 것이 아닌, △여성이 더 장수하고 △30대 연령층이 가장 적으면서 허리가 작록할 것으로 전망됐다.(그래프 참조) 이같은 모습은 현재의 출산률이 최저 현상을 보이면서, 그 인구 피라미드가 30년 후에 고스란히 반영되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이밖에 충북의
조선왕조실록 인터넷판에 '가뭄'이라는 단어를 열쇠말(키워드) 방법으로 입력하면 무려 1천18건이 검색된다. 추출된 데이터를 월별로 살펴보면 4-7월에 집중돼 있고, 지역별로는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순이었다. 최근의 가뭄현상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이번 가뭄은 남한과 북한 모두 한반도 서쪽 사면이 심하다. 기상청은 이에 대해 '금년 상반기는 동쪽의 오흐츠크해 고기압이 이례적으로 강한 세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기상학상 오흐츠크해 고기압이 강하면 이른바 푄현상이 나타나면서 그 서쪽 사면에서는 가뭄과 함께 고온현상이 찾아온다. 뿐만 아니라 장마전선도 브로킹을 당하면서 북상이 느려지게 된다. 이것은 가뭄의 장기화로 이어진다. 조선시대 땅거죽이 타들어가는 극심한 가뭄현상은 17-18세기에 많이 찾아왔다. 17세기는 임진왜란의 종전 직후가 된다. 때문에 당시 이 땅의 민중들은 전쟁에 천재까지 겹치면서 도탄에 빠진 삶을 살아야 했다. 어떤 학자는 이같은 '악기후'가 조선후기의 농민반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시대 우리고장 충청도에도 가뭄현상이 심심찮게 찾아왔다. 실록에는 '강물이 끊겼다'는 표현이 더러
조선시대에는 태(苔), 장(杖), 도(徒), 유(流), 사(死) 등 이른바 오형이 존재했다.태는 회초리로 치는 것, 장은 곤장으로 때리는 것, 도는 징역형, 유는 귀양보내는 것, 사는 말 그대로 사형을 의미한다. 이중 유배는 사형에 버금가는 형벌로 중형에 속했다. 그러나 유배형은 조선시대 사대부치고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빈번하기도 했다. 유배형의 첫 시작은 가족과 헤어지는 것이다. 헤어진다는 것, 그것도 기약없이 이별하는 것은 슬픔을 동반한다. 조선 인조-숙종 연간의 인물로 김만중(金萬重·1637∼1692)이 있다. 그는 평안도 선천, 함경도 극변, 경상도 남해 등에서 유배를 당하는 등 일생의 상당 시간을 유배지에서 보낸 인물이다. 때문에 김만중은 한글소설 '사씨남정기'의 저자로 잘 알려졌지만, 유배시를 많이 짓기도 했다. 그는 평안도 선천으로 첫 유배를 떠나며 가족과 헤어지는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슬픔을 머금은 채 어머님과 이별하고 / 손을 들어 친척들과 헤어졌네 / 가을날 서성길에 / 관하에 홀로 가는 사람이라네 / 또 망발인 줄 분명히 알지만 / 어떻게 깊은 은혜 갚을 수 있나 / 그래도 구구한 뜻이 있지만 / 이제부터 피지 못할까
조선시대에는 가뭄 등 천재지변이 찾아오면 임금의 부덕함으로 하늘이 노한 것으로 생각했다. 때문에 그 노여움을 풀기위해 기우제를 지냈다. 조선 조정에서는 종묘와 사직에 제를 지내는 것 외에 산에 올라가 장작불을 놓고 기우제를 지냈다. 흰 연기가 하늘에 닿으라는 의미에서 였다. '종묘·사직·원단과 명산 대천(名山大川)에 비를 빌었다. 임금이 오랫동안 가뭄으로 인하여 대전(大殿)에 나아가 정사를 듣지 아니하고, 날마다 더욱 두려워하여 수성(修省) 하였다.'- 태종대는 가뭄은 그 정도가 심했다. 그러자 저자에는 '태종이 이복 동생들을 죽이고 보위에 올랐기 때문'(1차 왕자의 난 지칭)이라는 쑥덕공론이 나돌았다. 태종이 기우제를 지내기로 결정했다. '임금이 내관을 시켜 불러서, 역마(驛馬)를 타고 함께 이르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들으니 네가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고 하니, 나를 위하여 한번 비를 빌라." 하였다. 이에 가학이 재계(齋戒)하고 사흘이면 반드시 비를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인용문 중에 '가학'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성이 문(文) 씨인 그는 경상도 진주 사람으로 목화로 유명한 문익점의 조카이다. 그의 기도가 신통력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태
주역은 계절에도 음양이 있는 것으로 봤다. 우리 선조들은 음력 1-6월은 양, 그 이후는 음의 기운이 강하다고 믿었다. 전반기 명절인 1월 1일 설날, 3월 3일 삼짇날, 5월 5일 단오 등은 모두 양수(陽數)의 결합을 하고 있다. 반면 음의 기운이 강해지는 7월 이후부터는 저녁이나 달(月)과 관련된 절기문화가 전면에 등장한다. 7월 칠석에 '저녁 夕' 자가 들어가 있고, 8월 15일은 한가위 대보름이다. 금년은 오는 24일이 단오이다. 우리 선조들은 단오날 창포로 빚은 창포주(菖蒲酒)를 즐겨 마셨다. 실록에도 임금이 직접 창포주 제조를 하명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참의 황자후(黃子厚)에게 명하여 창포주(菖浦酒)를 만들게 하였다.'- 이처럼 선조들이 창포주를 즐긴 것은 취흥보다는 질병 퇴치에 목적이 있었다. 허준은 창포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창포주방(菖蒲酒方) 뿌리를 교즙하여 찹쌀의 양과 상반(相半)되게 한 다음, 상법대로 양조하여 구복(久服)하면 연년익수(延年益壽)하고 신명(神明)을 통한다."- 단오가 양기의 절정을 이루는 때이기는 하나 하지(夏至) 뒤에 위치한다. 따라서 이날 이후로는 음의 기운이 조금씩 돋아나기 시작하는 등 기(氣)의 환절기에
조선 영조-순조 연간의 인물로 성대중(成大中·1732∼1812)이 있다. 그는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할 처지였으나, 신분상승 운동의 일종인 서얼통청에 힘입어 관료가 될 수 있었다. 그가 남긴 저서 중에 '청성잡기'(靑城雜記)라는 것이 있다. '윤구연의 점괘는 삼남에 죽을 것(死於三南)이라고 나와 있는데, 그가 삼남 지방의 관직에 부임하지는 않았지만 남병사(南兵使)로 부임하여 남태회의 상소에 의해서 남대문(南大門)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실록에도 충청도 병마절도사 출신인 윤구연이 당시 대사언이던 남태회(南泰會·1706∼1770)의 상소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나타난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남태회가 아뢰기를, "남병사 윤구연은 자신이 수신이면서도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 지엄함을 염두에 두지 않고 멋대로 범양하여 매일 술에 취한다는 말이 낭자합니다. 이와 같이 법을 능멸하는 무엄한 사람을…"'- 윤구연이 즉시 체포돼 한양으로 이송됐고, '멋대로 범양하여 매일 술에 취했다'는 증거를 찾기위한 수색작업이 벌어졌다. 그 결과, 윤구연의 근무처에서 '술냄새 나는 항아리'가 발견됐다.
수령이 오래되고 형질이 우수한 충북도내 천연기념물 노거수가 유전자 보존 시스템에 힘입어 생명력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됐다. 19일 문화재청은 괴산 삼송리·적석리, 보은 서원리를 포함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전국 노거수(老巨樹) 17그루의 DNA를 분석·보존하는 유전자은행(DNA BANK)을 조성한다고 밝혔다. 유전자은행은 천연기념물의 잎에서 DNA를 추출·분석해 개체 동정(同定)이 가능한 DNA 지문을 확보, 우월한 유전자를 영구히 보존하는 사업을 말한다. '동정'은 생물 분류학상의 소속이나 명칭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식물종을 분류하는데 주로 활용되고 있다. 괴산 청천군 삼송리 소나무(천연기념물 제 290호)는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고 높이 13.5m, 가슴높이 둘레는 4.91m이다. 일대 숲 중에서 가장 커서 '왕소나무'라고 불리고 줄기의 모습이 마치 용처럼 꿈틀거렸다고 하여 용송(龍松)으로도 불리운다. 괴산 연풍면 적석리 소나무(〃 제 383호)는 약 500살 정도로 추정되고 높이 21.2m, 가슴높이 둘레는 3.48m이다. 속리산의 정2품송과 비슷하나, 줄기가 끝으로 가면서 5도 정도 기울면서 자랐다. 줄기 윗부분이 적송(赤松) 특유의 붉은 빛을 띠고
'영남 사람인 정랑 김오응·감찰 장위항 (…) 등이 연명(聯名)하여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영남 사람들이 비록 다른 장점은 없으나 그래도 염치와 의리의 귀중한 것을 대략은 알고 있으므로 백의(白衣)로 조령(鳥嶺)을 넘어가는 것을 예로부터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인용문 중 '백의'는 과거 낙방, 즉 홍패(과거 합격증)를 얻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영남 유생들의 백두대간 고개에 대한 인식은 다른 지역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조선시대 충청도 주민들은 백두대간을 '뒷동산' 쯤으로 여겼다. 반면 경상도 주민은 출세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백두대간 고개를 넘어 홍패를 가져와야 자신의 출세는 물론 가문이 부흥하는 것으로 여겼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양민(평민) 이상이면 누구가 응시가 가능했다. 그러나 이는 이론상으로, 평민이 과거에 합격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이유는 경제력에 있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 등의 자료에 따르면 조선시대 문과(지금의 고시) 최종 합격자의 평균연령은 35세다. 이는 5살부터 글을 읽기 시작할 경우 30년 후에 과거에 합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평균 6만3천명이 응시해 소과 2단계(초시, 복시)
'임자 당신 날 싫다고 울치고 담치고 배추김치 소금치고 열무김치 초치고 / 칼로 물벤 듯이 그냥 싹 돌아서더니 이천 팔십리 다 목가고서 왜 또 날 찾아 왔나.' '당신이 날마다 울치고 담치고 열무김치 소금치고 오이김치 초치고 / 칼로 물친 듯이 뚝 떠나 가더니 평창 팔십리 다 못 가고서 오니 되돌아 왔나.' 두 민요 가사는 같은 듯하지만 다른 면이 있다. 전자는 '서울제' 정선아리랑이고 후자는 '지방제' 정선아리랑이다. 아리장은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변하는 특징이 있다. 중국만주 정암촌의 청주아리랑이 좋은 예가 된다. 서울제 정선아리랑도 정선아리장이 남한강을 타고 내려와 서울에서 변한 것이다. 변화를 이끈 주체는 역시 뗏목꾼이었다. 서울 뿐만 아니라 우리고장 충주 등 북부지역과 경기도 여주 주변에도 정선아리랑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처럼 뗏목꾼은 물품거래 뿐만 아니라 소리를 통한 문화의 전파자 역할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건·사고에 얽힌 얘기까지 등장한다. 성종 3년(1472) 우리고장 제천의 정병(正兵) 김중선 등 여섯명이 한강 하류에 이르러 3명은 익사하고 3명은 겨우 목숨을 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땅길이 아닌 뗏목을 이
조선시대에는 우금(牛禁), 주금(酒禁), 송금(松禁) 등 이른바 삼금(三禁)정책이 자주 반포됐다. 우금은 농우(農牛) 도살을 금지하는 것, 송금은 소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금년같이 큰 가뭄이 찾아올 경우 삼금정책의 하나인 금주령이 선포됐다. 실록을 키워드 방식으로 검색한 결과, 조선시대 경우 총 175건의 금주령이 포고됐다. 역대 왕별로는 성종(31건), 영조(29건), 세종(17건), 중종(14건) 순으로 많았다. 금주령은 △근신 절제로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로하며 △식량과 비용 절약의 목적을 지녔다. 금주령은 가뭄이 심한 봄ㆍ여름에 반포되어 추수가 끝나는 가을에 해제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때로는 10∼12월에도 시행됐다. 또 보통은 중앙 조정의 결정으로 직접 반포됐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지방관찰사들의 건의로도 반포됐다. 그러나 금주령이 반포된 기간에도 음주나 양조가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국가의 제향, 사신접대, 상왕(上王)에 대한 공상(貢上), 그리고 백성들의 혼인ㆍ제사 및 노병자의 약용으로 쓰이는 경우가 이에 해당됐다. 금주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고 단속도 사실상 어려웠다. 같은 내용의 국가법령이
조선시대에는 수년마다 기근이 찾아왔고 수십년에 한번씩은 이른바 대기근 현상이 나타났다. 지금도 그렇지만 농사는 기상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조선 조정은 그때마다 진휼정책을 실시했다. 그 기본은 인접한 도(道)의 진휼미를 기근이 발생한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가령 강원도에 기근이 발생했을 경우 충주 경원창의 비축미를 육로를 통해 이동시켰다. 실록은 우리고장 충청도에도 대기근이 심심찮게 찾아왔던 것으로 기록했다. '전라도의 쌀 5만 석을 충청도에 옮겼다. 이보다 먼저 본도 감사가 아뢰기를, "기민(飢民)의 전후 수효의 총계가 70만 1천 2백 89인인데 (…) 비록 전라도의 쌀 9만 석을 조운(漕運)하더라도 진휼하여 구제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으므로, 이 명령이 있은 것이다.' 인용문은 세종대에 발생한 기근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수치로 보여주고 있다. 먼저 기민의 숫자가 70만1천여명이라고 쓰고 있다. 당시 인구 규모를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또 이들은 구휼하려면 쌀 9만석이 필요하나 전라도에서 방출되는 것은 고작 5만석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세종대에는 기상재해에 따른 대기근이 자주 발생했다. '군자감의 묵은 쌀·콩
조선시대 주막문화는 문헌뿐만 아니라 그림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특히 조선후기인 18세기 들어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조선시대 술과 관련된 표현으로 '甁酒'(병주),'壺酒'(호주), '酒幕'(주막), '酒肆'(주사), '酒家'(주가) 등의 낱말이 있다. 병주는 문자 그대로 병에 담겨진 술을 일컫는다. 신윤복의 그림 '홍루대주(紅樓待酒)'에 등장한 용기가 병주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 패의 한량들이 기녀방에서 술상이 나오기를 기다기고 있는 가운데 아이 딸린 여성이 병주로 추정되는 용기를 지니고 쪽문을 들어서고 있다. 이때의 병주는 분명히 근처 어디인가의 소매처에서 술을 사오는 모습이다. '호주'는 '병주'와 용기 모양이 비슷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와 관련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조선 조정은 가뭄이 크게 들면 금주령을 포고했다. 이때 '병주', '호주'가 그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뭄이 자못 심하니, (…) 무엇이든 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랫사람들은 마음대로 태연히 술을 마시니, 이제부터는 甁酒까지도 금하게 하소서.'- '어리석은 백성이 우연히 한 병의 壺酒를 마시고서 이로 인해 죄를 입는 자가 많으니, 매우 가긍(可矜)
정부가 매장문화재 업무를 지방자치단체에 이양하는 작업을 추진하면서 지역 문화재계와 학계가 크게 반발하고 있다. 10일 도내 문화재계에 따르면 대통령 직속의 지방분권촉진위원회는 최근 문화재 보호와 관리에 대한 국가 사무를 지자체에 이양키로 결정하고 관련 개정안을 곧 국회에 상정할 예정이다. 이양 내용은 매장문화재의 발굴 허가권, 조사기관의 등록 관리권, 발굴된 유물의 국가 귀속 처리권 등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지금까지 문화재청은 국가, 지방자치단체, 민간 등에 의해 진행되는 각종 개발사업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고 매장문화재를 보존하는 노력을 해왔다. 반면 지방자치단체와 민간 기업은 그 속성상 문화재 보존보다 지역개발에 관심이 더 많아 매장 문화재가 발굴·수습될 경우 이를 탐탐치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지방으로의 이양 소식이 알려지자 도내 고고학계와 발굴기관 전문가가 대거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한국고고학회, 호서고고학회, 한국고대사학회, 한국청동기학회 등 10개 단체가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10개 단체는 성명서에서 '매장문화재 보존 관리는 다른 일반 문화재의 보존 관리와 더불어 민족문화 정체성 확립과 유지의
청주 신항서원이 창건 당시에 제향한 인물은 경연, 박훈, 송인수 등 3위였다. 임진왜란 10년 후에는 김정, 그리고 조금의 시차를 두고 한충, 송준길, 송상현, 이득윤, 이이, 이색 등의 위패를 차례로 추향하게 된다. 이와 관련, 김수항이 지은 신항서원 이건(移建) 상량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같은 당에 각기 따로 신위를 배설한 것은 도덕의 고하의 차이를 나타냄이라. 한 중간에 가장 높이는 신위(위패)를 남면하여 배설하고…'- 인용문은 '도덕의 고하에 따라' 신위를 새롭게 배치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 중앙에 자리잡은 위패는 율곡 이이(李珥·1536∼1584)였다. 서원에서는 전통적으로 중앙 자리가 위계가 가장 높고 중요시됐다. 신항서원은 이후 화양서원이 건립되기 전까지 청주목을 대표하게 된다. 봉안된 위패 중에 김정(金淨·1486∼1521), 한충(韓忠·1486-1521)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둘은 비슷한 점이 많다. 생몰 연대뿐만 아니라 사림파라는 점이 같다. 김정은 우리고장 보은, 한충은 청주가 고향이다. 1519년(중종14) 조광조 등 사림파가 남곤, 심정 등의 훈구파에 의해 화를 입은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동지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중죄
서원(書院)과 사우(祀宇)는 명현과 관련된 전통시대 건축물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그 기능은 좀 다르다. 서원은 유학 발달과 관련된 충신이나 사표로 삼을 만한 인물을 제향한다. 반면 사우는 가문의 인물을 주로 모시고 있다. 우리고장 충주 신니면의 박팽년 사우(충북도기념물 제 27호)가 대표적인 사례로, 순천박씨 문중이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청주를 대표하는 서원으로는 신항(莘巷)서원이 있다. 신항서원은 1570년(선조3) 조강 등이 청주지역 여러 사림들과 상의하여 지금의 용정동(속칭 이정골)에 세웠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마을 이름을 딴 '유정'(有定)서원이었다. 그리고 초기에는 경연, 박훈, 송인수 등 3위의 위패를 모셨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전란 기간중 왜군에게 점령당한 청주도 다른 지역 못지 않게 전화를 입었다. 유정서원도 예외가 아니어서 복구의 손길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란후 농경지가 급감하고 유랑자가 많아진 상황에서 복구가 쉽지 않았다. 당시 유정서원의 원장은 서계 이득윤(李得胤·1553~1630)이었다. 그의 문집인 서계집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동향의 院儒가 무려 1백명에 가까운데 지금 참여하는 사람은 불과 11명에 불과
북한 종군 기자들도 한국전쟁 최대 양민 학살의 하나로 꼽히는 영동 노근리 사건을 취재·보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북한군 지휘부는 전군에 '복수하기 위하여 증오심을 북돋우자' 제목의 전시 문서를 하달하는 등 노근리 사건을 선전활동에 최대한 활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 박사가 얼마전 '한국전쟁 당시 북한자료로 본 노근리 사건'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노근리 사건과 관련해 한국과 미국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논문은 다수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방 박사의 논문은 북한이 전쟁 중에 배포했던 문서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으로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월북 종군기자인 이태준은 8월 5일 경북 김천에서 발신한 '전선으로' 제목의 로동신문 기사에서 노근리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황간에서 기차터널 속에 피난한 촌사람 백여명에게 굴 양쪽으로부터 박격포를 들러 쏘았고 기관총을 난사하여 중상자 한 명과 죽은 엄마의 젖을 빠는 젖먹이 하나 이외에는 모조리 처참한 죽음을 당했고(…)' 또 북한 종군작가였던 전욱은 8월 19일자 '조선인민보' 등에 기고한 글에서 희생자를 2백여명으로 적기도 했다. '나는 인민군대 동무들과 그 굴 안에 들
전통시대 주막의 외형적인 모습은 풍속화 등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김홍도와 신윤복의 주막그림은 그 사실성이 돋보이고 있다. 주막 내부의 모습도 궁금하다. 이 부분은 옛문헌, 특히 조선후기~일제 강점기의 외국인 일기류와 보고서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프랑스 선교가 샤를르 달레(C.C. Dallet·1829~1878)는 조선후기 주막의 밥상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는 1872~1874년에 작성한 '조선교회사서론'에서 주막의 밥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보통 음식은 쌀과 고추와 남새이다. 살림이 넉넉한 사람은 거기에서 조금의 육물과 자반을 덧붙인다. 이런 식료품들은 소금물과 더불어 깨나 아주까리나 박하의 기름으로 요리한다. 쇠고기는 서울이 아니면 구하기 어렵고 염소고기는 보기 힘들고, 그 대신 개고기가 있는데 선교사들은 다들 그 맛이 나쁘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채소에 관해서는 순무와 중국배추와 질경이 잎과 고사리 밖에는 별로 없는데, 고사리는 퍽 많이 소비된다.' 당시 주막상에서 4찬 이상이나 고기류의 구경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사리가 많이 소비된 것은 건조화가 가능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영국출신 여류 여행가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