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군이 얼마전 지명탄생 600주년이 되는 2013년을 앞두고 '괴산군 탄생 600주년 기념사업' 아이디어 공모를 한다고 밝혔다. 군은 "괴산 지명 탕생은 괴산의 역사·정체성을 알릴 수 있는 기회로 군민에게 자긍심을 고취시키고자 이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고 밝혔다. 지명 괴산(槐山)이 처음 생겨난 시기는 군이 밝힌대로 6백년 전이 1413년(태종 13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현종 9년에 충주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고, 조선 시대인 태종 3년에 지괴주사(知槐州事)로 승격하고,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인 괴산으로 고쳐 군으로 삼았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 이전에는 잉근내군(仍斤內郡·고구려), 괴양군(槐壤郡·신라), 괴주(槐州·고려) 등으로 각각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왜구들이 해안뿐 아니라 수계를 타고 충청도 내륙까지 침입했다. 이때 괴주라는 지명이 자주 등장한다. '왜를 괴주(槐州)에서 쳐서 3급을 베었는데 왜적 200여 기(騎)가 괴주 장연현에 침입했으므로 왕안덕이, 도흥과 함께 이를 쳐서 3급을 베었다.'- 괴산 지명과 관련해서는 살펴볼 것이 더 있다. 먼저 왜 괴주(槐州)에서 괴산(槐山)으로 바뀌었는가 하는 점이다. 조선 태종은 즉위 1
감귤이 언제부터 제주도에서 재배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일본 고문헌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본서기(日本書記)에는 신라 초기에 상세국(桑世國)으로부터 귤을 수입한 기록이 보인다. 상세국은 지금의 제주도를 일컫는다. 따라서 제주도에서는 늦어도 삼국시대 초기부터 재래 감귤이 재배했음을 알 수 있다. 귤은 조선시대에도 매우 귀한 과일이었다. 때문에 남해 해안가에 감귤나무를 이식하려는 시도가 자주 있었다. '상림원 별감 김용(金用)을 제주로 보내어, 감귤 수백 주를 순천 등의 바닷가에 위치한 고을에 옮겨 심게 하였다.'- 조선 조정은 과거시험 직전에 '황감제'(黃柑製)라는 의식을 자주 거행했다. 이는 해마다 제주도에서 진상하던 황감을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에게 내리고 과거시험을 보던 의식을 말한다. 실록에 이와 관련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반궁(泮宮)에 황감을 하사하고 잇따라 시사하여 이유신 등 여섯 사람을 뽑았는데, 수석을 차지한 자에게는 급제(及第)를 내리고 나머지에게는 각각 분수(分數)를 주라고 명하였다.'- 짧은 문장이지만 난해한 단어가 많이 보인다. 반궁은 성균관, 급제는 벼슬, 분수는 시험 결과의 등수를 의미한다. 그리고 당시 과거의 수석 합격
대과(문과)와 구별되는 소과에는 생원과 진사시 등 두 종류의 시험이 존재했다. 생원시는 유교경전에 관한 지식을 묻는 것을, 진사시는 부(賦)와 시(詩) 형태로 문예창작 능력을 테스트했다. 전자가 오늘날 독해시험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논술시험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두 시험에서 급제한 사람을 우리 귀에 익은 '생원'과 '진사'라고 각각 불렀다. 문과가 3단계에 걸쳐 진행됐다면 소과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초시는 한양과 각도에서, 그리고 2차 시험이자 최종 시험인 복시는 한성에서 실시하였다. 소과 초시에는 이른바 지역 쿼터제가 적용됐다. 한양에는 생원·진사가 각각 200명 배정됐다. 그리고 각도에는 생원·진사가 각각 경기도 60명, 충청도 90명, 전라도 90명, 경상도 100명, 강원도 45명, 평안도 45명, 황해도 35명, 함경도 35명씩 모두 1천4백명이 배정됐다. 이중 복시를 통해 2백명을 최종적으로 선발했다. 따라서 소과의 최종 경쟁률도 대과와 비슷한 7대 1 정도가 되도록 조절됐다. 그러나 복시의 최종 선발에는 그러한 지역 간의 균형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지역 간의 격차가 컸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대과에
인류의 체모(몸털)는 왜 현격히 감소하는 쪽으로 진화됐을까. 또 지구상에는 왜 다양한 피부색을 지닌 인종이 존재하는 것일까. 오늘부터 충북대 박선주(고고미술사학과) 교수의 도움을 빌어 '인류 진화 이야기'를 5회에 걸쳐 연재한다. 글 싣는 순서는 '체모는 왜 감소했는가', '피부색이 다양해진 이유', '현생인류의 확산', '몽골로이드', '지금 우리들의 조상은' 등이다. 체모(體毛)는 의학적으로 피부의 부속기관으로, 생모(生毛)와 기모(期毛)로 분류되고 있다. 생모는 태아 때부터 몸에 나있는 털을, 기모는 성 성숙기에 생기는 길고 색이 짙은 몸털을 일컫고 있다. 인류의 체모는 분명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체적으로 다모(多毛)에서 소모(少毛)의 방향으로 진화했다. 고고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인류는 대략 8백만년 전에 침팬지에서 분화했고, 4백만년 전에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猿人·남쪽 원숭이라는 뜻) 단계로까지 진화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유인원처럼 뒤뚱뒤뚱 걸었고, 긴팔과 발 끝까지 털로 덥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기부터 머리와 신체 은밀한 곳을 제외하고 털이 적어지고 맨살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그 시기는 언제이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고고인류학자들은 △인체
응제시(應製詩)는 왕명에 의해 짓는 시를 말한다.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개성이 함락당했다. 공민왕은 하는 수 없이 대신을 이끌고 몽진(왕의 피난)에 나서 지금의 안동에 3개월 가량 머무르게 된다. 당시 안동은 복주로 불렸다. 이후 공민왕은 상주, 보은 원남, 회인 등을 거쳐 우리고장 청주에 당도, 약 5개월간 머물게 된다. 청주가 고려의 임시수도 역할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체류 기간이 길어지자 과거시험까지 보게 된다. 이때 그 유명한 망선루(당시 취경루)가 등장한다. 고려 현종도 거란 침입 때 전라도 나주로 피난갔다가 환궁하는 길에 청주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으나 이때는 그 기간이 나흘(1011년 2월 13~16일)에 불과하다. 공민왕은 청주에 체류하던 기간 중 무심천변에 세워진 공북루(拱北樓)라는 정자에 올라 이른바 배표(拜表) 의식을 거행하게 됐다. 공북루는 '북쪽(개경)을 섬긴다'는 뜻이고, 배표는 사신으로 보내는 신하를 전송하는 의식을 일컫는다. 공민왕은 즉위 초기에는 배원정책을 철저히 추구했다. 그러나 홍건적 침입으로 국토가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는 일시적이나마 배원정책을 철회하게 된다. 바로 이날 청주 공북루에서의
'비록 엄한 형벌로 바로잡고 위세와 노기로 사람을 제압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요행히 법률에 조촉되지 않으려는 생각만을 가지게 될 뿐 인의 마음은 갖지 않게 됩니다.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지만 마음으로는 복종하지 않습니다. 원한은 큰데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며 무서월 할 것은 백성뿐입니다. 물이 배를 나아갈 수 있도록 하지만 배를 엎을 수도 있습니다.' 민심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으로 지금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문장을 쓴 인물은 당나라 초기의 공신이자 학자인 위징(魏徵)이다. 그는 10가지 내용을 당태종에게 상소했다. 따라서 상소문의 제목도 '간태종십사소'(諫太宗十思疎)이다. 조선시대 같은 제목의 상소문을 올린 인물이 있다. 세종-성종 연간을 산 김흔(흔은 訴에서 삐침 제외·1448~1492)이라는 인물이다. 명종실록에 '신은 삼가 듣건대 성종조(成宗朝)에 직제학 김흔이 십사소(十思疏)를 올리니, 성종은 어찰(御札)로 답하고 다시 옷과 신을 하사하여 포장하였다 한다'라는 표현이 있다. 당시 김흔은 위징이 상소했던 내용을 성종에게 똑같이 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실록에 "당(唐)나라 태종(太宗)도 훌륭하고 뛰어난 임금이었으나, 나중에 가서 십점소(十漸疏)
일제에 항거해 일어났던 청주학생연합시위의 최초 발생일이 사실과 다르게 알려져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청주시 영동의 청주중학교 교정에는 청주학생연합시위를 기념한 '항일학생의거기념비'가 서있다. 지난 1971년 처음 세운 것을 1997년에 중건한 이 기념비는 탑 정면에 비의 제목을 쓰고 그 앞에 청동으로 만든 횃불모양의 조형물을 세웠다. 그리고 우측에 학생의거가 일어난 과정과 당시 시위를 주도한 학생 7명의 명단(이범승·이인찬·김찬호·구연행·박우양·함귀봉·홍성일) 등을 기록했다. 이와 관련, 학생의거 기념비는 청주학생연합시위의 최초 발생일을 '1929년 12월 20일'(그림 참조)로 새겨 놓았다. 그러나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가 동아일보 등 일제 강점기의 신문사료를 정밀 조사한 결과, 청주학생연합시위의 최초 발생일은 1930년 1월 21일 것으로 밝혀졌다. 동아일보의 1930년 1월 21자는 '淸州高普와 農業校도 動搖' 제목의 2단 크기 기사에서 '만세를 고창하는 동시에 수천매의 격문(檄文)을 산포하얏는데 검거된 생도는 륙십명에 달하얏다 한다'라고 적었다. 박 교수는 이에 대해 △277명의 청주고보 학생들이 교사와 경찰의 제지를 뚫고 청주농업학교 방면
조선시대 문과(대과)는 1번이 아닌,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 등 3단계로 나눠 진행됐다. 이는 국가고급 관리를 뽑는 만큼 엄정·신중을 기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1단계인 초시에는 이른바 지역 쿼터제가 적용됐다. 초시에서는 성균관 유생 50명(관시), 한양출신 60명(한양시), 지방출신 140명(향시) 등 총 250명을 선발했다. 향시 140명은 경기도 10, 강원도 15, 황해도 10, 충청도 25, 경상도 30, 전라도 25, 평안도 15, 함경도 10명 등으로, 충청도는 한양을 제외하고 경상도 다음으로 많았다.2단계인 복시는 관시 ·한성시 ·향시의 입격자 250명을 식년 봄에 서울에 모아 다시 시험을 보게 해 최종적으로 33명을 뽑았다. 250명 중 33명을 뽑았으니까 실질 경쟁률이 대략 7.6대 1 정도가 됨을 알 수 있다.3단계인 전시는 2차 합격자 33명을 대상으로 당락이 아닌, 갑·을·병 순위를 결정하는 시험이었다. 임금님 앞에서 시험을 봤던 전시는 부정행위가 없는 한 탈락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참고로 전시 답안은 어둡기 전에 작성·제출해야 했고, 임금에게 집적 보이는 것인 만큼 정자체인 해서로 반드시 써야 했다.문과 응시생
미군정은 지난 1946년 6월 종전 청주읍을 '청주부'와 '청원군'으로 분리됐다. 이때부터 청주와 청원은 행정적으로 이산가족이 됐다. 미군정이 왜 청주와 청원을 분리했는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반 없다. 인구가 갑자기 늘어났다거나 도시환경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정황상 △지방자치 확대 일환 △당시 충북도지사의 요청 △도청 소재지가 속한 지역에 대한 배려 등 3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설은 청주·청원의 분리 이유를 설명하는데 부족한 면이 있다. 미군정이 지방자치를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서울특별시헌장'을 반포한 시기가 1946년 8월 14일이었다. 행정 위계상 서울특별시헌장이 먼저 채택되고 청주·청원이 나중에 분리되는 것이 맞으나 나타난 현상은 그 반대였다. 충북도지사의 사전 요청설도 분리된 이유를 잘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충북도지사는 윤하영(1889~1956)으로, 그는 미군정의 입맛에 맞는 인물이었다. 그는 1924년부터 5년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이 깊을 뿐만 아니라 영어에도 능통했다. 그러나 군정 전반기(45.9.7~46.9.11)는 미군이 직접통치를 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따라서
사부(師傅)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기를 가르쳐준 스승을 사부라고 부른다. 또 임금의 어릴적 스승도 사부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왕자 교육은 시강원(侍講院)이라는 곳에서 했다. 이 시강원의 정1품 벼슬이 사부다. 이에 비해 왕세손에 대한 교육은 강서원(講書院)이라는 곳에서 했고, 그 벼슬은 한 단계 낮은 종1품이었다. 실록에 임금과 왕자시절 사부에 대한 이야기가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임금이 매우 즐거워하여 서로 대하기를 잠저 때같이 하였다. 민제가 임금을 선달이라 칭하니, 임금도 민제를 사부라 불렀다. 술자리가 파하자, 민제가 임금을 전송하며 대문 밖에 서 있으니, 임금이 민제에게 들어가라고 청했다.'- 태종은 이것이 인연이 돼 나중에 사부 민제의 딸(원경왕후)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인용문에도 등장하 듯이 둘은 잠저(임금이 되기 전에 거처하던 집) 시절에 서로를 '선달'과 '사부'라고 부를 정도로 인간적으로도 가까웠다. 따라서 민제의 두 아들인 민무구, 무질 형제는 그가 생존할 때는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한달만에 태종은 외척 발호의 싹을 제거하는 칼을 휘둘렀다. 그 결과, 매형뻘인 태종에 의해 민무구, 무질 두
조선시대 왕비 중 청주한씨 외에 우리고장을 관향(貫鄕)으로 한 가문이 또 있다. 청풍김씨로 현종비 명성왕후와 정조비 효의왕후 등을 배출했다. 명성왕후와 명성황후는 다른 인물이다. 명성왕후의 한자는 明聖, 명성황후는 明成이다. 흔히 민비로 불리는 인물이 고종의 정비인 명성황후이다. 청풍김씨는 신라 김알지(金閼智)의 후예인 김대유(金大猷)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 말에 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을 지낸 인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진 후 우리고장 제천의 청풍(淸風)에 세거했다. 청풍김씨가 문벌을 활짝 꽃피운 시기는 대동법 확장으로 유명한 명신 김육(金堉·1580∼1658) 때이다. 선조~효종 연간을 산 김육은 이때 이미 세거지 청풍을 떠나 한성에 터를 잡았다. 이처럼 시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 누대에 걸쳐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을 경화벌열이라고 한다. 명성왕후와 효의왕후도 경화벌열의 여식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실제 태어난 곳은 청풍이 아닌 서울이다. 현종비 명성왕후는 김육이 사망한지 얼마 안 돼 왕비가 됐다. 바로 김육은 명성왕후의 친조부가 된다. 친아버지는 한때 복상(服喪) 문제로 송시열과 불화를 겪었던 김우명(金佑明)이다. 그녀는 한양 장
조선의 역대 임금은 추존된 경우를 포함해 총 32명이 배출됐다. 왕비는 이보다 다소 많은 48명이 배출됐다. 이는 병사 등으로 인해 왕비를 다시 얻은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조선의 왕비는 국왕의 정실 부인으로서 중궁(中宮)의 자리에 있던 사람을 말한다. 사극을 보면 흔히 중전(中殿)으로 표현되나, 이는 '중궁전'의 준말이다. 이밖에 왕비는 국모(國母), 내전(內殿), 곤전(坤殿), 성녀(聖女) 등의 이칭도 지니고 있다. 왕비의 자리에 오르는 것에는 여러가지 경우가 있었다. 간택 절차를 거쳐 세자빈에 책봉되면 훗날 세자인 남편이 왕위에 오를 경우 자신도 왕비가 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세자빈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왕비로 책봉된 사례도 적지 않았고, 원래의 왕비가 쫓겨나거나 사망하여 후궁이 왕비에 책봉된 예도 있다. 신분상으로는 숙종의 왕비였던 희빈 장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양반가의 출신이다. 왕비의 존칭은 왕과 동등하게 '전하'(殿下)이며, 품계는 없다. 1894년 갑오경장 때 왕비와 대비를 각각 왕후와 왕태후로 격상하면서 그 존칭이 '폐하'(陛下)로 바뀌기도 했다. 침전은 경복궁의 경우 교태전(交泰殿), 창덕궁은 대조전
충북대 기초교육원(원장 박걸순 교수·사학과)이 지난주 연세대 이원경 교수를 초청, 콜로키움 시간을 가졌다. 콜로키움(Colloquium)은 어떤 주제를 놓고 여러 사람이 공동 토의하는 형식의 회의로, 전문가 집단이 많이 활용하고 있다. 이 교수는 '자유전공 도입의 의의와 효과적인 운영방안' 제목의 발표를 통해 연세대의 자유전공 운영사례를 상세히 설명했다. 자유전공은 대학 4학년까지 전공에 얽매이지 않고 임의로 강의를 선택해 들은 뒤 취득한 학점에 따라 전공을 부여받는 제도를 말한다. 그는 자유전공제도의 장점으로 △차별화된 교육과정 △다양한 전공선택의 기회 등을 언급했다. 이 교수는 전자에 대해 "연세대는 특화 교과목을 개발, 대상 학생들에게 학술적 글쓰기 등을 집중 교육하고 있다"며 "이는 지난 2009년부터 자유전공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밝혔다. 후자에 대해서는 "전공탐색 공모전을 개최하고 선후배 전공 멘토링을 갖는 등 해당 학생들에게 다양하고 깊이 있는 정보를 제공하려 노력하고 있다"며 "여기에는 강의실 밖 활동을 연계시킨 통합형 교육 프로그램도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유전공을 택한 학생들이 보인 반응으로 △한 수업 안에서 정치, 철학,
조선전기 호불군주(好佛君主)로는 세종과 세조가 있다. 세조는 속리산 복천암과 정이품송 전설에서 보듯 초지일관 불교를 사랑했다. 세종은 다소 달랐다. 처음에는 불교에 대해 강압적이고 비판적이었다. 조선전기 여러 종파가 난립하자 선종과 교종 등 두 종단만 남기고 정리한 군주가 바로 세종이었다. '그러므로 조계·천태·총남 3종을 합쳐서 선종으로, 화엄·자은·중신·시흥 4종을 합쳐서 교종으로 하며, 서울과 지방에 중들이 우거할 만한 곳을 가려서 36개소의 절만을 두어, 양종에 분속시킬 것입니다.'- 당시 예조가 건의한 내용으로, 세종은 이를 모두 수용했다. 그 결과, 지금의 충북에는 보은 속리사와 충주 노은면의 보련사만 남고 모두 산문을 닫아야 했다. 대신 살아 남은 사찰에는 재정지원 규모가 확대됐다. '충청도 보은 속리사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1백 4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이며, 충주 보련사는 원속전이 80결인데, 이번에 7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입니다.'- 세종은 말년에 가족사에 비운이 잇따르자 불교에 크게 의지했다. 그러나 궁궐 안의 호불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임금이 바뀌자 대신들의 상소가 경향을 가리지 않고 빗발쳤다. 다음은 충청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이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신라 혜공왕 때(776년) 진표율사가 처음 조성한 것으로 돼 있으나 직접적인 근거는 되지 못한다. 법주사 미륵대불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조선 전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처음 등장한다. '법주사(法住寺) 속리산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신라의 중 의신(義信)이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성덕왕이 중수했는데, 석조와 석교·석옹(石翁) 등이 있으며, 절 안 산호전(珊瑚殿)에는 금신장육상(金身丈六像)이 있으며, 문 앞에는 구리로 부어 만든 깃대가 있는데, 모양이 몹시 높고 그 한 쪽에 통화(統和) 24년에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인용문 중 '산호전에는 금신장육상이 있으며'라는 문장을 다시 한번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 표현은 당시 미륵대불이 장육상이기는 하나 산호전이라는 실내 전각 안에 모셔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금신'이라는 표현으로 봐서 32길상(吉相)의 하나인 황금옷을 입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조선후기의 옛문헌에는 비교적 자주 등장한다. 특히 영험스런 면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국시가 유교였던 점을 감안하면 다소 이
청주가 삽겹살 구이의 원조 고향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논리 보완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특히 청주 사람들이 초기 삽겹살을 왜 '시오야끼'라고 불렀는지를 규명하지 않으면 자칫 왜색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본보가 과거신문을 살펴본 결과, '삼겹살'이라는 명칭은 1950년대 후반에 처음 등장하나 이때의 삼겹살은 구이가 아닌 조림용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청주=삼겹살 원조 고향'이라는 주장은 무리가 아닐 수도 있다. 다음은 '돼지고기와 무볶음' 제목의 당시 기사다. '(재료) 돼지고기 삼겹살 이백문, 무 1개, 생강 2뿌리, 술 큰술 3개. (조리방법) 돼지고기를 3센치미터로 모나게 썰어서 기름두르지 않고 그대로 볶는다. 다음은 물을 잠길 정도로 붓고 졸인다.'- 그러나 구이식문화의 전국적인 지명도를 갖고 있는 이규진 씨가 논문 '근대이후 100년간 한국 육류구이 문화의 변화'에서 '삼겹살 구이문화가 서울에서 대중화된 것은 1970년대 후반으로 보이지만 그 이전에 개성 사람들이 '삼겹살'이라는 명칭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라고 기술, 여러 해석을 낳고 있다. 이원종 전충북지사가 아버지인 이씨는 '원래 세겹살이라고 불리던 삼겹살
국제저널 '무형유산' 편집위원들이 최근 속리산 법주사를 방문, 문화재를 둘러보고 예불의식도 참관했다. 법주사 금동미륵대불은 33m의 엄청난 높이로 주변 산세까지 압도하고 있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재료상 콘크리트-청동-금동불 순으로 변화했다. 콘크리트가 청동불로 바뀌는데는 안정상의 이유, 청동이 금동불로 바뀌는데는 외관의 모습이 크게 작용했다. 전자의 경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부 콘크리트 철근이 부식됐을 가능성이 우려됐고, 후자는 청동인 까닭에 용접선이 그대는 드러나는 등 외관상 보기가 안 좋았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더라도 법주사 미륵대불이 황금색의 띄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는 단순히 '보기좋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32길상(吉相) 80종호(種好)라는 교리적인 이유도 작용하고 있다. 32길상은 중아함경과 방광대장엄경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른바 부처님 외모에 관한 규정이다. 이중 일반인이 비교적 쉽게 접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정유육계(頂有肉髮), 나발우선 기색감청(螺髮右旋 其色紺靑), 액광평정(額廣平正) 등이 있다. 순서대로 '정수리에 육계가 있다', '소라같은 머리칼이 오른쪽으로 돌아오르고 그 빛은 검푸르다', '이마가 넓고 평평하며 바르다'
충주읍성을 3D 디지털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동서남북 방향에 4개의 옹성(甕城)이 각각 존재했던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이는 지금까지 '충주읍성에는 옹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크게 배치되는 것으로, 충주읍성의 역사·축성학적 가치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소장 김춘실 교수)와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원장 장호수)은 지난 10일 충주시청에서 '충주 읍성의 3D 디지털 복원과 활용'을 주제로 학술 세미나를 가졌다. 충주시청, 충북대 등 4개 단체는 지난 1900년에 작성된 충주 양안(量案·일명 광무양안)을 바탕으로, 1백년전 충주 시가지 모습을 3D 디지털로 복원하는 작업을 수년째 해오고 있다. 토지대장의 일종으로 대한제국기(광무 4년)에 작성된 충주 양안에는 건물과 토지의 규모, 모양, 위치 등 충주의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는 토지정보가 망라적으로 담겨있다. 복원팀을 이끌고 있는 신영우(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이날 발표에서 "양안을 살펴본 결과 당시 충주향교는 80칸, 연원역에 위치했던 일본군 병참소는 기와집 30칸에 초가집 6칸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3D 디지털에는 충주목사의 부임 장면, 관청
지난 1997년 이문건이 쓴 묵재일기 속에 '설공찬전'(薛公瓚傳)이라는 한글 필사본 소설이 함께 적혀 있는 것이 발견돼 학계를 흥분시킨 바 있다. 저자는 우리고장 음성 태생인 채수(蔡壽)라는 인물이다. 작품은 일종의 저승 경험담 계열의 전기(傳奇)적인 내용으로, 주인공 설공찬의 영혼이 잠시 지상에 나와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는 구조로 돼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반역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부분이다. 이는 연산군을 축출하고 집권한 중종정권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채수는 폭군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보필하여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아울러 소설에는 여성도 글을 할 줄 알면 관직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는 여성을 차별하는 조선 사회체제를 통박한 것이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최초의 국문소설인 홍길동전이 장편인 데다 완벽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그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 국문표기 소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왔다. 그러나 그 중간 작품으로 제시된 안락국태자전·왕랑반혼전 등이 소설이 아닌 모두 불경의 번역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줘왔다. 설공찬전은 조선 최초의 금서였다. 그러나 각계각층의 독
'안순이 말하기를, '인명(人命)은 지극히 중한 것이고,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알지 못하고 극형에 두는 것은 의(義)에 있어 어떻겠습니까. 마땅히 유사(攸司)에 회부하여 그 죄를 밝히십시오' 하니…'- 인용문에 안순(安純·1371∼1440)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안순은 중세 봉건시대인 조선사회에서 보기 드물게 인권에 대한 의식을 강하게 지닌 인물있다. 특히 그는 사형 집행의 신중함을 역설했다. 사고가 유연했던 그는 흐르는 물의 운동 에너지를 이용하는 수차(水車)에도 관심을 보였다. 수차의 역사는 청동기시대인 기원전 1세기 무렵의 서아시아로 거슬로 올라간다. 당시 서아시아 사람들은 하사(下射), 즉 아래로 떨어지는 물을 수차에 이용해 밀을 빻았다. 중국에서는 후한 초기에 수대(水石+焦), 삼국·육조 때는 수애(水석+豈), 당·송 때는 통차(筒車)가 발달했다. 수대는 물방아, 수애는 맷돌류, 통차는 관개용 수차를 각각 의미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때 수차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백성에게 수차(水車)를 만들도록 권한 것은 한 마을에 몇 개씩이며, 관에서 만들어 나누어 준 것은 한 마을에 몇 개씩인가.권경(勸耕)한
인류 뇌물의 역사는 기원전 15세기 무렵의 이집트 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이집트도 뇌물이 골칫거리였다. 이집트 왕조는 뇌물을 '공정한 재판을 왜곡하는 선물'이라고 규정, 이를 단속했던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때 수령이나 무관에 임명된 벼슬아치는 인사가 날 경우 해상 부서인 이조나 병조에 가서 사례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를 당참례(堂參禮)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는 당시 규정으로 불법은 아니었다. 조선전기에 이미 그 내용이 보인다. '새로 임명된 호군(護軍)은 사은숙배하고 의정부에 당참례를 행한 뒤 본방에 참알·회좌(回坐)를 행하기 전에는 (…) 각처에만 명함을 들이고, 타처에는 출입할 수 없다.'- 문제는 당참례가 아닌, 이때 은밀히 오가는 굼품인 당참채(堂參債)에 있었다. 지방관에 임명된 수령이나 무관이 인사부서인 이조나 병조를 방문했을 때 그곳 하급관리들이 노골적으로 금품을 요구했다. 이때 자문(尺文)이라는 영수증까지 발부됐다. 어떤 거래가 있을 경우 이를 증명하기 위해 교부됐던 자문은 길이가 한 자 가량되는 짧은 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결국 지방관들이 부임지 고을에서 당참채의 재원을 마련하면서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백성들에
청주에서 보은을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청원 가덕-피반령-회인을 경유하는 25번 국도이다. 또 다른 하나는 청원 미원-보은 한화공장 앞을 경유하는 19번 국도이다. 한화공장은 보은군 내북면에 위치하고 있다. 충북의 행정 변천사를 살필 때 지금의 보은군 내북면 창리 일대만큼 '떠돌이 신세'가 된 곳이 없다. 조선후기에 작성된 대동여지도(1864)를 보면 충청도 땅 안에 2개의 '청산'(靑山)이 존재하고 있다. 속칭 '도리뱅뱅이'로 유명한 지금의 옥천군 청산면 일대에 '靑山'이 표시돼 있다. 그리고 북쪽으로 보은을 건너 뛴 지금의 내북면 일대에도 한자가 같은 '靑山'이 존재하고 있고 그 옆에 '酒城'(주성)이라는 행정지명을 기록해 놓았다. 이때의 '酒城'은 주성부곡을 의미한다. 그리고 청산과 함께 명기해 놓은 것은 주성부곡이 행정상 청산현의 소속이라는 뜻이다. 주성부곡의 본읍인 청산에 이웃하지 않고 북쪽으로 보은을 건너 뛰어 존재하는 것은 전형적인 월경지(越境地) 모습이다. 월경지는 전회에 소개한 바와 같이 마치 미국 본토와 알래스카 모습처럼 섬같이 떨어져 존재했던 과거 행정구역을 말한다. 주성부곡의 떠돌이 신세는 의외로 역사가 깊어 고려말부터
대동여지도(1864)를 바탕으로 할 경우 충북 백두대간에는 단양 영춘면의 여촌령(일명 늦은목이)에서 영동 상촌면의 우두령까지 총 24개의 옛 고개길이 존재하고 있다. 현재 24개 중 승용차 통행이 가능하도록 현대화된 길은 11곳, 오솔길 형태로 도보만 가능한 곳은 8곳, 나머지 5곳은 위치 확인이 미뤄지고 있다. 충북도와 도내 기초단체들은 올레길로 대표되는 걷기문화와 산림·휴양림 문화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4개 옛고개를 콘텐츠 부족 등으로 인해 지역자원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옛고개는 △工자형 지형흐름 △환상형 영로 올레길 △조선통신사 사행로 △주막촌 △소금길 등 경북과는 다른 충북만의 또 다른 영로문화 가치를 지니고 있다. 工자형 지형흐름은 백두대간 충북 중·북부 사면이 능선(마루금)-옛길-남한강 물길(수계) 등의 모습을 띄는 것을 의미한다. 즉 工자의 상단부 횡선은 백두대간 능선, 하단부 횡선은 남한강 물길, 중간 수직선은 양자를 연결하는 백두대간 옛길의 모습이 되고 있다. 환상형 영로 올레길은 충북의 특정 고개에서 출발, 백두대간을 넘어 경북지역을 순회하고 또 다른 쪽의 옛고개 길을 통해 출발점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코스
신미대사를 이야기 할 때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 동생 김수온(金守溫·1410∼1481)이다. 신미대사의 본명이 김수성이니까 영산(영동 지칭) 김씨의 '守' 자 돌림이다. 김수온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집현전학사, 승문원교리 그리고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한성부윤(오늘날 서울특별시장)에 이어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부원군은 임금의 장인, 즉 국구(國舅) 또는 정1품 공신에게 준 칭호로 받는 사람의 본관인 읍호(邑號)를 그 앞에 붙인다. 김수온은 탁월한 문장가였다. 그의 졸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세종이 그 재주를 듣고 특별히 명하여 집현전에 사진(仕進)하게 하고, 치평요람을 수찬하는 일에 참여하게 하였다. 임금이 때때로 글제를 내어 집현전의 여러 유신을 시켜 시문을 짓게 하면, 김수온이 여러 번 으뜸을 차지하였다.'- 형 신미대사와 마찬가지로 김수온도 세종에 이어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세조은 김수온의 집이 가난하다는 말을 듣고 쌀 10석과 말(馬)를 내려주었다. 세조는 김수온이 우리고장 영동의 어머니에게 문안차 가려하자 한강에서 술을 내어 전송하기도 했다. '그때 김수온이 어머니를 성문하러 영동현(永同縣)에 가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과 경북 영주시 도계(道界)에는 고치령, 마구령 등 2개의 통행 가능한 옛고개가 위치하고 있다. 두 지자체는 지난 2009년 새 주소사업을 추진할 때 일대를 어느쪽 도로명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갈등을 빚었다. 단양군과 영주시는 논의 끝에 백두대간 고치령을 경유하는 옛길을 양측의 연결지점인 영주(榮州)와 단양(丹陽)에서 각각 한 자 씩을 따 '영단로'(榮丹路)로 명명했다. 또 단양 영춘면(永春面)과 영주시 부석면(浮石面)을 연결하는 백두대간 마구령 옛길 역시 양쪽 면이름에서 한 자씩을 따 '영부로'(永浮路)로 이름지었다. 이밖에 두 지자체는 문헌상 우리나라 제 2호 고개인 죽령(AD 158·신라 아달라왕 5년)을 한쪽 지자체가 독식할 수 없다는데 합의, 단양IC-죽령-영주 가흥IC를 경유하는 도로를 '죽령로'로 명명했다. 그러나 경북은 이같은 선례와 달리 다른 지자체의 간섭이나 견제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백두대간 문화에 대한 선점작업을 계속 밀어붙이고 있다. 백두대간 소백산은 국립공원이면서 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봉화 등 3개 지자체의 동·서 사면에 걸쳐있다. 특히 단양군은 소백산을 주제로 철쭉제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해 오고 있다. 그럼에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