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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소풍길 - 초정약수

톡쏘는 '왕의 물' 흐르는 그숲엔 생명이 숨쉰다

  • 웹출고시간2011.02.24 17:52:45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초정약수터에서 물을 받는 사람들. 무병장수를 염원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세상 사람들은 초정리 하면 약수터부터 떠올린다. 세계 3대 광천수 중의 하나로 세종대왕이 안질 치료를 위해 120일간 머무르시던 곳, 그리고 톡 쏘는 알싸한 물맛이 일품인 곳, 약수목욕을 하면 한 여름 더위를 거뜬히 견뎌내고 땀띠 같은 피부병을 치료할 수 있는 마을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초정리는 아름답고 때 묻지 않은 사람들의 삶이 오롯이 새겨져 있는 곳이다. 사립문만 열면 산과 계곡, 들판과 냇가, 오솔길과 하늘의 오색 찬연함을 만날 수 있는 초정리 사람들은 저마다 꿈을 안고 꿈을 실천하며 사랑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전화기와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는 초롱불 아래 옹기종기 모여 단아하고 정감 있는 삶을 이야기 했다. 그곳에는 언제나 고단하지만 희망을 끈을 놓지 않는 초정리 사람들의 열정이 있었다. 그들만의 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 시대, 그 시절엔 대한민국 시골 구석구석이 아름답고 저마다 소중한 삶의 매트릭스가 아니었느냐고.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초정리에는 다른 시골에서 맛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함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초정리 인근의 운보의 집. 말 대신 붓으로 세상과 뜨겁게 살다간 운보 김기창 화백의 생가다.

우선 초정리는 스토리의 마을이며 한국사의 중심에 서 있는 뿌리 깊은 고장이다. 초정리를 감싸고 있는 소백산맥의 능선을 걷다보며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들려주던 신화와 전설을 숱하게 만날 수 있다. 지금도 구녀성이 문명의 이기를 등진 채 을씨년스럽게 남아있다. 어린 시절, 찢어진 문풍지 사이로 초승달이 밤하늘을 지키고 뒷산에서 부엉이 소리라도 들려오면 겁에 질린 소년은 할머니 치마폭 속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의 다정하고 구수한 옛 이야기를 들으면서 밤을 지새우거나 스르륵 꿈결 속으로 빠진 적이 어디 한 두 번 이었던가. 할머니가 들려주던 구녀성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옛날, 옛적에 어는 과부가 딸 9명과 아들 1명을 데리고 산속에서 살고 있었다. 자식은 많고 먹을 것은 없어 매일같이 끼니를 걱정해야 하고, 자식들은 배고프다며 보채고 이따금씩 땟거리라도 생기면 서로 먹겠다고 싸움이나 하니 과부는 시름만 깊어졌다. 아홉의 딸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이복형제였으니 그들의 싸움은 전투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과부가 큰 결심을 했다. 이복형제들을 모두 데리고 살 수 없으니 어느 한쪽을 죽이기로 한 것이다. 아들에게는 나막신을 신고 한양을 갔다 올 것을, 딸들에게는 아들이 한양에서 돌아올 때까지 성곽을 쌓을 것을 주문했다. 성곽을 다 쌓기 전에 아들이 도착하면 아홉의 딸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고, 성곽을 다 쌓았는데도 도착하지 못하면 아들이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몇 날 며칠 밤이 지났다. 성곽은 거지반 완성돼 가고 문만 만들면 되는데 아들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들에 대한 애착이 많았던 과부는 한여름의 어느 날, 작열하는 태양 앞에서 팥죽을 끓인 뒤 딸들을 불렀다. "너희들이 다 이긴 것 같으니 팥죽을 먹으며 쉬었다가 돌문을 완성하라." 딸들은 산 밑의 오솔길을 내려다보았지만 이복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안심하고 팥죽을 식혀가며 먹고 있는데 이복동생이 나막신을 신고 터덜터덜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과부는 말했다. "네가 이겼으니 이 칼로 누이들의 목을 쳐서 죽이거라." 그래서 성안에는 9개의 무덤이 있고 구녀성이라는 이름도 붙여졌다. 그러나 궁예가 적군을 물리치기 위해 만든 궁예성이라는 문헌이 있으니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구녀성을 오르는 고갯길은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는 생명의 숲이다.

구녀성에서는 아침마다 맑고 진한 햇살이 쏟아졌다. 전설처럼 능선과 계곡 모두 아홉 여인의 몸매를 닮아서 길고 가는 허리, 도드라진 엉덩이, 크고 작은 굴곡, 그 아래로 여러 개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고 샘물은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렸다.

어디 이뿐인가. 이 땅의 임금 중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은 한글창제의 과업을 몰두하던 중 안질병이 걸리자 초정리에서 행궁(行宮)을 짓고 한글창제를 완성하지 않았던가. 세종은 인재를 바르게 보고 선택하는 능력이 탁월했으며 문학 예술 과학 분야에서 왕성한 업적을 일구었다. 당신의 지혜와 열정, 당신의 영감과 슬기가 느껴진다. 배유안의 장편동화 <초정리 편지>는 세종이 한글창제 이후 병 치료와 한글보급을 위해 초정리를 방문해 산과 들을 벗삼고 초정리 사람들과의 아름답고 가슴 아픈 삶의 이야기와 호흡하며 지냈던 것을 스토리로 삼고 있다. 변광섭은 <생명의 숲, 초정리에서>라는 책에서 "시원하고 달차근한 게 아주 좋다"며 초정리 맑은 물을 예찬하고, "가지나물과 된장을 반찬으로 밥을 꿀처럼 달게 먹었다"며 서정이 철철 넘치는 초정리 풍경을 소개했다. 익히 알려진 사실에 바탕하고 있음에도 끝까지 흥미로움을 놓지 못하게 한다.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스토리텔링 시대에는 없는 이야기도 만들어야 하는데 초정리는 이 땅의 성군 세종대왕과 이 땅의 문자 한글과 이 땅의 생명 약수를 갖고 있으니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인가. 프랑스 남부의 산악지대에도 톡 쏘는 물맛으로 유명한 곳이 있다. 로마 제국 시절에 카이사르 병사들은 이 물을 마시고 갈증을 풀었으며 병까지 치료했는데 세월이 흐른 뒤 의사 페리에가 우물가를 발견하고는 병에 담아 팔기 시작했다. 톡 쏘는 물맛과 질병 치유 성분의 과학적인 분석, 그리고 역사적인 스토리를 조화시켜 마케팅 해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초정리 인근의 낚시터에서 어린 소년이 강태공의 꿈을 낚고 있다.

초정리 산천은 로렐라이 언덕의 추억과 서정보다도 아름답다. 사계절 마르지 않는 샘물이 그렇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다투지 않고 서로 보듬어 주는 기와집 초가집 함석집이 그러하며,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물과 시냇물 또한 그러하다. 아침 햇살과 저녁노을이 서로 다르지 않고 논과 밭, 계곡과 능선이 다르지 않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서로 살며 사랑하는 미덕 또한 치사하고 비루한 세속의 그것과 견줄 수 없다.

초정리 사람들은 순수하다. 맨몸으로 풍랑과 맞서보지도 않고 내 욕심만 채우기에 급급한 세상 사람들의 이기와는 견줄 수 없다. 맑고 고운 햇살, 정겨운 산하, 알싸한 약수, 붉게 물든 석양을 닮았으니 상처받은 사람이여, 초정리 풍경, 초정리 수채화를 가슴에 묻고 새로운 기운을 받아라.

초정리 사람들은 뜨겁게 살아간다. 초정리 인근에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며 평생을 조국의 평화와 독립을 위해 싸운 분들이 많이 있다. 단재 신채호선생, 의암 손병희선생, 의병장 한봉수선생…. 필자의 할아버지도 만주벌판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데 내가 두 눈으로 확인한 것도 아니고 들은 얘기일 뿐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분명한 것은 초정리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뜨겁고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는데 초정리는 물도 진하고 피도 진하고 산천초목도 진하다.

후드득, 후드득~. 북풍한설에 꽁꽁 얼어붙었던 저수지가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아픔이 깊을수록, 추위가 짙을수록 얼음의 두께도 깊고 짙으며 투명하다. 무거웠던 겨울이 녹는 소리가 내 마음속으로 밀려온다. 나도 이제 낡은 옷을 벗어야겠다.

/ 글 변광섭(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그림 강호생(충북미협회장), 사진 홍대기(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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