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즐거운 소풍길 - 진천 덕산

풍요의 고장에서 풀어놓는 술 이야기

  • 웹출고시간2011.08.11 16:40:33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농번기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밤낮없이 일해야 했다. 새벽에 일어나 붉은 석양이 지고 땅거미가 꺼져도 논과 밭에서는 쟁기질, 거름주기, 모내기, 고추와 담배수확 등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무슨 일이 될까 싶었지만, 배고파 못 견디겠다며 어른들의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그날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어른들은 어린 소년에게 곧잘 잔심부름을 시켰고 어떤 날은 학교 가는 것도 포기해야 했다. 모내기철만 되면 일주일씩 학교를 가지 못하는 친구도 있었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학교는 얼어 죽을~" 어른들의 이 같은 넉두리가 아이들의 가슴에 비수로 꽂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직 목구멍에 풀칠을 하고 남들보다 많은 논밭을 경작하는 것만이 희망이라 생각했다. 보릿고개를 겨우겨우 넘기면서 뼈저리게 겪는 삶의 애환이야 모르는 게 아니지만 절벽의 아찔함에 상처 입은 것을 생각하면 어른들이 야속하기도 했다.

술익는 옹기를 바라보며 개망초꽃이 활짝 웃고 있다.

그렇지만 잔심부름 중에도 해 볼만 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술심부름이었다. 필자의 고향인 초정리에는 마을 입구에 술집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곧잘 술심부름을 시키셨다. 주전자를 들고 술집에 가면 주인은 항아리에 담긴 막걸리를 조롱박으로 떠서 주전자에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한 모금 마셔보라며 조롱박에 참새 오줌만큼 남아있는 것을 건네주기도 했다. 그 달콤하고 알싸하며 구수한 맛에 흥분돼 주전자 주둥아리에 내 몸을 맡기기도 했다. 너무 많이 먹었나 싶으면 약수를 섞기도 했는데 아버지는 그 때마다 "이놈의 술집이 돈에 미쳤구먼, 툭하면 술에 물을 타고 지랄이여~"라며 술집 주인을 향해 온갖 육두문자를 날리곤 했다. 술에 취한 소년은 청보리밭이나 호밀밭 한 가운에 누워 푸른 하늘만 말똥말똥 바라보기도 했다.

아, 나는 그때 한 없이 높고 깊은 하늘이 내 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보리밭의 파릇파릇한 향기로움 역시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아찔하고 무중력 상태의 내 몸이 자연과 하나 되는 가벼움을, 그리하여 황홀함 속에 녹아나는 자유로움을 잊을 수가 없다.

초정리에서는 이처럼 농번기에만 공장에서 만든 술을 사다 먹었을 뿐이지 일 년의 절반은 술을 직접 빚었다. 집집마다 술독이 있었으며 술을 담그는 비법도 제각각이었기 때문에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술을 얻어먹는 어른들도 있었다.

술맛은 발효 미생물인 효묘균을 배양하는 솜씨, 누룩과 고두밥을 잘 버무려 내는 기술과 정성, 초정리의 맑은 물, 그리고 초정리 인근의 다양한 약초의 배합에 따라 결정된다. 어머니는 고두밥을 찧고 누룩과 함께 버무린 뒤 항아리에 담아 이틀정도 밀봉시켜 미생물을 배양시켰다.

미생물이 잘 자랐는지는 어머니가 직접 독 안으로 코를 집어넣고 향을 맡는 것으로 확인했는데 이 때 미세한 후각과 청각, 시각까지 총동원 된다. 그리고는 물을 넣고 한약재를 섞은 덧밥을 넣은 뒤 사랑방에서 며칠을 묵으면 술맛을 볼 수 있었다. 한약재는 모두 초정리 인근의 들녘에서, 야산에서 틈틈이 거둬들인 것만을 사용했다. 매실, 산머루, 뽕열매, 산수유, 석류, 오미자, 황기, 황정, 참당귀, 토사자, 한련초, 일당귀, 잔대, 음양곽, 인삼, 도라지, 산약, 구기자, 구절초, 대추, 더덕, 영지, 진달래, 씀바귀…. 나물로 무쳐 먹기도 하고 말렸다가 떡에 넣어 먹기도 했으며, 술을 빚어먹기도 하는 등 초정리의 식물들은 버릴 게 하나도 없었다.

술이 익을 즈음이면 부산하게 움직이는 발효균의 미세한 소리와 은은한 향이 공장 안에 가득하다.

술이 익을 즈음이면 부산하게 움직이는 발효균의 미세한 소리와 은은한 향이 집안에 가득했다. 술이 제대로 숙성했는지는 코끝과 두 귀로 느낄 수 있다. 이따금 목젖을 축이면서 맛을 보기도 하지만 어머니는 "술맛은 마음으로, 가슴으로 느껴야한다"며 술독 주변을 서성거렸다. 이어 용수를 집어넣고 하얀 사발에 술을 건저올린 뒤 한 모금 마시고는 온 몸을 부르르 몸을 떨었다. 술에 대한, 첫 경험에 대한 경배의 순간이랄까. 어머니는 그렇게 순결한 마음으로 술을 빚으셨다.

어른들은 아무리 많이 마셔도 뒤끝이 없고 정갈하게 취할 수 있어야 좋은 술이라고 했다. 늦은 밤까지 술을 마셔도 다음날 아침에 시원한 약수 한 모금이면 숙취가 깔끔하게 사라졌다. 술 마신 다음날 꿀물이나 콩나물국을 준비해주는 배려심 많은 여자는 초정리에서 사랑받지 못한다. 술 잘 빚는 여자만이 사랑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초정리 사람들은 일 년 내내 술을 끼고 살았다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이놈의 술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초정리 사람들이 여럿 있었으니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것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물론 술 먹는 양으로 치자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계에서 으뜸일 것이다. 매년 34억병의 소주와 44억병의 맥주를 소비하고 있으니 쌀밥 먹는 양보다 술 먹는 양이 더 많은 것 같다. 회식자리가 많고 두 사람 이상 모이면 반드시 술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민족인 것이다. 좋게 말하면 우리들에게는 흥겨움을 즐기고 나눌 줄 아는 유전인자가 흐르고 있는 것이며 나쁘게 표현하면 한반도 전체가 술독에 빠져 있는 알코올중독국가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술 마시는 취향에 따라 그 사람을 성격을 구분 짓기도 한다. 전통주를 즐기는 사람은 까다롭고 고집이 세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프로가 많다는 것이다. 또 보드카를 좋아하는 사람은 단순하고 즉흥적이며 유머 있는 성격의 소유자라 할 것이며 와인을 즐기는 사람은 고품격의 스타일리시한 성품이라고 한다. 또 전형적인 서민의 술인 소주는 인정이 많고 바라는 꿈도 그리 크지 않는 서민 중의 서민을 대표하며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교성이 강하고 유머감각이 풍부한 게 특징이란다.

진천은 풍요의 고장이다. 덕산면소재지 뒷골목을 거닐다보면 낮고 두터운, 깊고 느린 생명의 이야기와 삶의 여정을 느낄 수 있다.

고향 친구 향주는 술공장으로 시집을 갔다. 진천의 덕산양조장집(현 세왕주조) 며느리가 된 것인데 3대째 술을 빚어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술공장이자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 됐으니 시집은 잘 간 것 같다. 향주네는 막걸리에서부터 동동주, 청주, 그리고 한약재 가득 넣은 천년주 등 여러 가지 술을 빚었다. 향주가 직접 두 손으로 고두밥을 비벼 넣는다 하니 그 사랑스런 손맛이 어디 가겠는가. 진천의 기름진 들녘에서 수확한 재료로 정성스레 빚었다. 애비의 애비적부터 비법으로 내려온 그 기술 그대로 담았다. 낡은 건물에서 풍기는 빈티지를 가슴에 품고, 코끝을 간질이는 향기로움에 취하고, 달차근하며 뱃속을 따뜻하게 감싸는 신비로운 맛에 마음 빼앗기며, 덕산의 뒷골목을 풍경을 노래하면 어떠한가.

한국의 술은 본래 그러하다. 취하되 인사불성이 되지 않고, 마시면 요기가 된다. 힘이 없을 때 가운을 북돋우고, 힘겨울 땐 시름을 덜게 하며, 여럿이 함께 마시면 기쁨의 노래가 나오는 오덕五德을 지닌 술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사람 사는 재미를 느끼며 인정을 마시고 흥에 취하는 술이니 막걸리가 세계의 명주를 꿈꾸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게 아닐까.

사실, 3대째 술을 빚는 집이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것 또한 가난과 역사의 단절 때문일 것이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지방마다 수 백 년 묵은 술공장이 여러 개 있지만 우리는 두 눈 부릅뜨고 찾아 봐도 전통의 명맥을 그대로 유지하며 술 빚는 곳을 찾아볼 수 없다. 그마저도 돈벌이가 안돼 손을 놓거나 형식적인 명맥만 유지하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일제시대와 근대화 과정에서 금주령이 내려지고 민간인이 술 빚는 것을 금지하면서 왜곡되거나 단절된 경우가 많았겠지만 전통의 가치를 소중하게 보존하고 자신들의 삶으로 발전시키는 일본인들의 지혜가 부러울 뿐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나카르시스는 "술 한 잔은 건강을 위해, 술 두 잔은 즐거움을 위해, 술 석 잔은 방종을 위해, 술 넉 잔은 광란을 위해"라며 애주가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 땅의 애주가들이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술공장인 진천덕산양조장(현 세왕주조)의 옛 건물과 항아리를 이미지로 신축한 건물의 풍경이다.

이제는 한국의 술과 한국의 음식과 한국의 그릇이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면 좋겠다. 술에 취한 사회가 아니라 술과 문화가 하나되고 새로운 문화콘텐츠가 되며 글로벌 상품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세계적인 함께 즐길수 있는 표준화, 동공의 기예와 불꽃의 합궁으로 빚은 도자기 잔과 정갈한 음식, 그리고 이것들을 상품화 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세계의 와인, 세계의 맥주처럼 세계의 막걸리를 만들어 한국의 정신을 세계 곳곳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하면 좋겠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