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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소풍길 - 성안길과 중앙공원

초록으로 물든 '천년의 거리'

  • 웹출고시간2011.05.19 19:30:4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천년의 숨결, 천년의 혼을 느낄 수 있는 중앙공원의 풍경. 봄의 끝자락에 신록으로 빛나고 있다.

햇솜 같은 봄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날 오후, 무심하게 길을 걷다 맨홀뚜껑에 내 시선이 멈췄다. 누추하고 번잡하며 고단한 도시의 삶, 미움과 증오만이 남아있는 회색도시에서 바동거리며 기력을 빼고 있을 즈음 어둡고 습한 맨홀뚜껑 속에서 노란 꽃이 피어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민들레의 노란 순정은 맑은 미소로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내 마음이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이기에 마음 빼앗기고 나만의 욕망에 상처받고 돌아오지 않을 추억에 가슴 시리던 나는 질긴 생명과 그 생명의 신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노란 꽃망울을 터뜨려 이 땅의 희망이 되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어둡고 습한 그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토해내는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웠다.

나는 내게 묻는다. 너는 단 한 번이라도 너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누군가를 열열이 사랑해 보았는가. 단 한 번이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참으로 값진 존재이긴 하였는지, 단 한번이라도 생명이 있는 것들을 내 몸속에 흐르는 피처럼 소중하게 생각하였는가. 그리하여 너는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을 품으며 세상의 참된 생명이 되어 곡진한 마음으로 살아갈 자신이 있는가.

ⓒ 강호생
성안길은 천년을 이어온 거리다. 민본중심의 지방행정을 실천했던 곳이며 민족지사들의 혼이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자 교육과 문화의 집결지였다. 또한 임진왜란과 일제시대에는 우리 고유의 삶과 문화가 짓밟히기도 했던 가슴 시린 상처가 남아 있는 곳이다.

고려 말 홍건적의 침입 때 공민왕이 청주에 6개월간 머무르면서 과거시험 장소로 사용했던 망선루는 일제시대에 헐리게 되었지만 민족지사들의 노력으로 이전하여 보존하고 있다. 이곳은 서원향약의 시원이도 하다. 선조4년 율곡 이이가 청주목사로 있으면서 만든 서원향약은 사족들의 향촌자치와 이를 통해 하층민 통제를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숭유배불정책에 의하여 유교적 예절과 풍속을 향촌사회에 보급하여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미풍양속을 진작시키며 각종 재난災難을 당했을 때 상부상조하기 위한 규약이었다. 중종대 정계에 진출한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등 사림파의 주장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청원군청 뒤편에 있는 청주동헌. 청주목사가 근무하던 곳으로 관아의 중심 건물이었다.

서원향약에서는 선악善惡 두 편을 만들어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세칙을 규정하고 있다. 그 주된 내용은 선에 관한 사항으로 부모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가정을 다스리는 일, 친척간의 화목, 유행에 의한 처신, 의리에 의한 자녀 규제, 청렴 절개의 고수, 은혜를 널리 베풂, 근학, 세약의 각근, 약속 이행, 신용이행, 싸움 화해, 환난시 조력, 명확한 시비 판단 등이다. 악과 관련된 사항으로는 불효, 불자, 불우, 불제와 스승에의 불공, 부부간의 무분별함, 정처에 대한 소박, 신의의 상실, 제사의 정성 부족, 예법 무시, 미신 숭상, 가족간의 불화, 이웃간의 우애 상실, 도박 음주에의 탐닉, 송사를 즐기는 일, 약자에 대한 냉대와 무시, 납세의 등한시, 예법 준수의 무시, 공공의 일을 빙자하여 개인의 이익을 꾀함, 음식을 마구 먹음, 태만으로 대사를 그르치는 일 등이다.

청주의 유일한 국보인 용두사지철당간도 이곳에 있다. 국보 제51호인 용두사지철당간은 고려 광종13년(962)에 만들어진 것으로 용두사라는 절 앞에 세워져 있던 것인데, 절은 없어진지 오래됐고 철당간만 남아있다. 당간이란 절 앞에 높이 세워 예불이나 법회 등이 있을 때 깃발을 걸어두는 곳으로 대부분 나무로 만들었다. 철당간이 남아있는 곳은 안성 칠장사, 공주 갑사, 청주 용두사지뿐인데, 이 중 용두사지철당간에는 당간을 세운 내력이 돋음글씨로 새겨져 있다. 철당간의 높이는 65cm의 철동 20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는 30개단으로 높이가 20m에 달했고 꼭대기에 용머리가 있었다.

중앙공원에 있는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과 오랜 세월 함께 해 온 숲의 풍경을 보니 나그네 마음이 숙연해진다.

요즘 청주읍성 이야기가 부쩍 세상 사람들로부터 회자되고 있다. 읍성을 언제 축조하였는지 명쾌한 답은 없지만 고려 태조 때 나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읍성 내에 있는 고려 초의 용두사지철당간은 이곳이 읍치의 중심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며, 읍성이 있던 지역의 도로망이 남문에서 북문까지의 대로를 중심하여 방격方格으로 짜여져 있는 것은 고대의 경성방리제京城坊里制와 무관하지 않다. 고려시대 읍성이 홍수로 말미암아 훼손된 기록이 있으니 조선시대에 이르러 석축으로 고쳐 쌓기 시작해 1487년(성종 18)에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읍성의 둘레는 1,640m, 성벽 높이는 4m 규모로 보고 있다. 이 안에는 13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모두 맑은 물이 샘솟아 연중 마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읍성과 연결되었던 남석교는 박혁거세 원년인 BC57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길이가 80m를 넘는다고 하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고 가장 긴 돌다리다.

그렇지만 지금은 청주읍성과 남석교의 기개를 찾아볼 수 없다. 읍성은 한일합병 직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고, 남석교 역시 1932년 일제가 땅 속에 묻어 80여 년간 어둠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뿐이다. 2천년을 이어온 청주의 혼맥이 하루아침에 단절되는 뼈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수령 900년을 살아 온 은행나무 압각수는 청주의 고단한 삶과 이야기를 알고 있을까. 뿌리가 오리발과 같다하여 이름 붙여진 압각수는 고려 말 이색 등이 무고로 청주감옥에 갇혔을 때, 성문이 떠내려갈 정도로 큰 비가 왔다. 이 때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이 이 나무위로 피해 목숨을 구하였고, 임금은 하늘의 뜻이라 하여 이들을 석방하였다. 그러니 신령스런 은행나무는 누가 잘났고 못났으며, 누구네가 어떤 말을 어떻게 해왔는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읍성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허물어졌는지, 남석교의 가슴 아픈 사연이 무엇인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은행나무는 단 한 번도 세상 사람들에게 천기누설을 한 적이 없다. 가볍게 듣고 가볍게 내뱉는 우리네와는 생각의 깊이가 다른 것이다.

성안길은 쇼핑의 거리, 낭만의 거리, 패션의 거리,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향한 젊음의 거리다.

한낮의 햇살이 뜨겁다. 나그네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숨이 가빠오기 시작한다. 봄은 잠시 왔다가는 것 같고 본격적인 여름을 예고하는 듯하다. 그래도 즐거운 것은 성안길의 풍경이 젊고 생기발랄하기 때문이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춘남녀의 발길은 끝이 없고 그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며 쏟아지는 말들은 사사롭다. 쇼윈도 안의 마네킹이 봄옷을 벗고 시원한 여름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연인끼리 팔짱을 끼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매장에서 여름옷을 고르며 수다를 떠는 사람들, 커피숍의 의자에 걸터앉아 바깥 풍경을 즐기며 차 한 잔의 여유를 훔치는 사람들, 영화관과 쇼핑몰을 오르내리며 짧지만 강렬한 꿈을 디자인하려는 사람들…. 사람 구경만으로도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음이 기쁠 뿐이다. 나그네도 가던 길 멈추고 매장 문을 두드렸다. 초콜릿과 커피맛이 일품이 본정本情을 들른 것이다. 커피의 깊은 향이 몸 속 깊이 스며들고 있으니 나른해 진다.

지금 대지는 꽃비 흩날리고 초록 물감질이 한창이다. 나는 이 길의 끝에서 주저앉고 싶다. 깊디깊은 질곡에서 퍼 올린 통곡으로 누추했던 삶의 파편들을 떠내려 보내고 싶다. 그리하여 노란 민들레의 맑은 웃음처럼 누군가에게 희망의 존재가 되고 싶다. 햇빛에 파르르 빛나는 푸르디푸른 저 나뭇잎처럼 살고 싶다.

/ 글 변광섭(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그림 강호생(충북미술협회장), 사진 홍대기(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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