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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소풍길 - 수암골

도심속의 아날로그, 내 삶의 始原을 찾다

  • 웹출고시간2011.03.17 19:05:05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이인좌의 난 등에서 순절한 충청병사 이봉상, 영장 남연년, 비장 홍림을 기리기 위해 1937년에 세워진 청주표충사와 시내 전경.

저녁나절인데도 한낮의 열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담장과 골목길에도, 기와지붕 양철지붕 슬래브지붕 위에도, 오르막길 내리막길의 돌계단에도, 그리고 습하고 어두운 맨홀 속에도 햇살의 흔적이 역력했다. 나는 가던 길 멈추고 숨을 죽였다.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고갯길 오르느라 숨이 가프지만 마음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낡고 오래된 수암골의 풍경이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허접한 냉기만이 감돌 것이라는 나만의 경직된 생각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골목길 나무그늘 아래에 평상을 차려놓고 햇살을 즐기는 구릿빛 노인의 뒤태가 한가롭다. 담장 넘어 부뚜막에서는 김치 볶는 냄새 구순하며, 아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땅따먹기 놀이에 하루해가 짧다. 길모퉁이의 구멍가게 앞에서는 청년들이 모여 연탄불 지펴가며 삼겹살을 안주삼아 조잔거린다. 이발소에도 낡은 풍경으로 가득하고, 낯선 사람들의 발자국에 개짓는 소리가 산막의 정적을 깨운다. 마을 꼭대기 작은 암자에서 들려오는 풍경소리가 바람처럼 내 마음속으로 밀려온다. 마을 중턱의 공터에 청춘남녀들이 모여서 수다를 떤다.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촬영지를 구경하러 온 이방인들이다.

수암골

ⓒ 강호생
황토빛 낮은 담장에는 연록의 담쟁이 풀잎 물오르고, 담장 너머 장독대에 내 시선이 멈춘다. 바람과 햇살과 구름과 계곡물이 만나, 여인의 손맛과 마을의 인심과 숨쉬는 옹기가 만나, 삭히고 묵히고 우려내고 통음의 신나는 짝짓기와 발효의 눈부신 놀이에 취하더니 은은하고 깊은 맛, 세월이 빚은 자연의 멋과 숨결이 느껴진다. 희미한 저녁햇살 툇마루에 내려 안고 늙은 여인의 주름진 손길이 부산하다. 어디 이뿐인가. 돌계단 오르는 걸음을 막아서는 낮선 풍경들이 내 마음을 슬며시 잡아당긴다. 담장이며 계단이며 할 것 없이 손길 닿는 곳에는 예쁘고 정겨운 그림들로 가득하다. 옛 이야기 노래하며 원 없이 뛰어노는 즐거운 악동이고 싶을 뿐이다.

수암골의 벽화와 사람들의 풍경이 한유롭다.

이처럼 수암골 풍경에 마음 빼앗기고 있는 순간에도 민초들의 마음은 마냥 무심한 게 아니다. 이들에게도 지긋지긋한 가난과 어수선한 삶을 청산하겠다는 꿈이 왜 없겠는가. 가혹한 삶을 짊어진 채 비틀거리되 쓰러지지 않고 고난은 있되 좌절하지 않고 희망의 탑을 쌓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울 뿐이다. 그러니 수암골 풍경은 오래된 미래를 보는 듯하다. 문명의 도시에서는 감히 느낄 수 없는 사람의 냄새, 과거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풍경화, 생명의 숲, 누추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세월과 인연이 수레바퀴처럼 하염없이 돌고 도는 마을….

수암골에 예쁜 찻집 하나 있으면 좋겠다.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오순도순 정겨움을 나누는 곳 말이다. 이왕이면 시인의 집과 소설가의 이야기 공간과 화가들의 아지트와 장인들의 창작공간과 난장이라도 만들면 더 좋겠다. 발 닿는 곳마다, 눈길 마주치는 곳마다 아날로그 서정이 그윽한 곳이면 좋겠다.

그러하다. 온갖 욕망과 번뇌와 찌든 마음을 씻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고 싶으면 이름 모를 숲길을 걷고 돌계단을 오르며, 뒷골목 풍경에 마음을 맡겨보자. 어디 수암골 뿐이겠는가. 우리의 작은 관심, 따뜻한 배려만 있으면 상상의 자유를 맘껏 펼칠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많은가. 어느덧 우암산 숲속에 머물러 있던 어둠이 수암골 고샅길에 촘촘해지고 있다. 알곡은 알곡대로 껍데기는 껍데기대로 서로 뒤엉켜 사는 회색도시 역시 어둠속에 잠기고 있다. 그동안 나는 거센 폭풍우와 맞서보지도 않았으면서 내 욕심만 채우기에 급급했던 것은 아닌지, 쫓기듯 살아오면서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옛 이야기를 헌신짝 버리듯 한 것은 아닌지, 후회와 미련과 아쉬움이 바람처럼 밀려온다. 지나온 길과 지나온 세월과 지나오며 부딪친 수많은 생명에 미안하다. 오늘 하루 수암골로 향한 이 걸음이 영 무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돌담길 걷는 게 어디 사람뿐이랴. 산새 들새 지저귀고, 하얀구름 뭉게구름 적막하고, 햇살과 바람까지 오달지니 낮잠 자는 낭만고양이, 강아지 떼 지어 노래하고, 끝끝내 담장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넝쿨에 올라앉은 청개구리 한가롭고, 오종종 예쁜 아이들 흙장난, 툇마루에 앉아 곰방대 물고 노래하는 구릿빛 촌로, 맑고 투명한 여인의 다듬이소리와 지는 석양, 군불 패는 청년의 깊은 시름과 세월의 노래 모두가 돌담길이요, 운명이요, 살아있는 생명이다.

돌이지만 돌이 아니고, 돌담이만 돌담이 아니다. 그 어느 것 하나 똑같지 않고 무엇 하나 요긴하게 써먹을 수 없을 것 같던 것들이 이렇게 모이니 썩 잘 어울린다. 돌과 흙과 물과 바람의 만남, 그리하여 사람과 자연과 세월의 만남,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새로운 미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굽이굽이 펴는 곡선의 노래, 하늘과 땅이 이어지고, 남자와 여자가 짝을 이루며, 만나고 헤어지는 여로, 돌담길 사이로 저녁노을과 연기 나부끼고 부엌과 샘물을 오가는 여인의 치맛바람 정겹다.

꽃샘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생강나무에서 노란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했다.

수암골을 지나 수동의 상좌길 오르다 보면 사람의 길, 자연의 길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오종종 예쁜 들꽃,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과 바람과 구름과 햇살, 정겨운 벗들과 속삭이는 돌담길…. 어찌 도심에서 이처럼 서정적인 그림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의 기억 저편에 있기 때문일까. 때묻지 않은 그 길을 오르면서 참으로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욕심 많은 인간들에 의해 짓밟히고 파헤쳐졌을 이곳이 아직도 인간의 온기와 자연의 비릿한 내음이 코끝을 징하게 하는데 그야말로 축복이다. 살아있음이 다행이고 고마울 뿐이다.

사찰이라고 모두 똑 같지 않다. 사찰의 역사와 내력과 가람의 형태와 스님들의 도량에 따라 느낌과 감동이 다르고, 수련과 정진이 다르며, 생명의 기운이 다르니 찾는 사람의 마음도 다를 수밖에 없다. 산속 깊이 들어 앉아 고고하고 풍광이 수려한 가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 섞여 번잡하지만 흥미로운 가람도 있다. 사람들은 관광을 위해, 참배를 위해, 비루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마음 따라 입맛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가람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그곳에 있는데 인간들만 부산할 따름이다.

수암골의 초입에 드라마 촬영지 홍보 현수막이 걸려 있다.

수동 상좌길을 힘겹게 걷다보면 크고 작은 절들이 여럿 있다. 그 중에는 굿을 하는 굿당도 눈에 뛴다. 사람들의 애절함을 담았는지 펄럭이는 깃발이 불그스름한 모습으로 떨고 있다. 고단한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람과 구름과 계곡물과 산새들과 함께 흐르고 또 흐른다. 일 배, 또 일 배가 반복되고 계속된다. 그들의 기도와 소망이 제각각이니 관음은 여간 부지런하지 않고는 이들의 소원을 다 들어주지 못할 것 같다. 나도 할 말 많고 소원 많고 미련도 많지만 이쯤에서 마음을 접어야겠다. 어쩌면 내 마음의 상처보다 저들의 상처가 더 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두 손 모아 합장하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기도를 올릴 때는 일상의 모든 상념을 버리고 곡진한 마음이어야 하는데 나는 항상 번잡하기만 하다. 참배의 발길 대부분이 여인들이기 때문일까, 그곳의 가람은 엷은 미소 머금은 저들처럼 수줍어보였다. 지금 대나무 숲에서 바람이 부드럽게 밀려온다. 내 마음에도 대숲의 바람이 다녀갔는지 한결 가볍다. 실낱같은 향기만으로도 얼마든지 살아갈 힘을 얻는다.

/ 글 변광섭(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그림 강호생(충북미술협회장), 사진 홍대기(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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