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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1.03.10 18:44:08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얼음을 뚫고 쏟아지는 화양동의 계곡물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다.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것이 있다. 책장 가득 좋은 책들이 꽂혀 있고 차 한 잔의 향기가 책 냄새와 함께 어우러진 나만의 공간. 그곳에서 지적 향수와 문화적 감수성을 키우고 이웃들과 함께 문학 및 예술을 논하는 행복한 꿈을 꾸곤 했다. 한 발 더 나아가 꽃피고 녹음 우거지며 단풍들고 설국의 풍경을 벗 삼아 풍류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라면 더 없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물론 나는 이처럼 아름다운 꿈을 일구지 못했다. 그럼에도 예쁜 그림으로 가득 찬 서재를 갖고 싶은 소망이 꿈틀거리고 있으니 세월은 유수 같고, 인생은 짧으며, 나의 삶은 정처 없어 마음이 시리고 아플 뿐이다.

옛 선비들에게 서재는 삶의 중심을 이루는 공간이었다. 책을 읽으며 지식을 쌓는 것은 기본이고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배우고 심신수양을 하며 지혜를 추구하는 문화곳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와 풍류와 벗들과 자연이 함께 했으니 서재야말로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물 맑고 숲속의 햇살 가득해 아름답기로 소문난 괴산의 화양계곡에는 우암 송시열의 서재인 '암서재'가 있다. 커다란 바위 위에 지어졌는데 송시열과 제자 권상하라는 학자가 책을 읽고 시를 쓰며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 강호생
조선후기 문신이자 학자였던 송시열은 외가인 옥천에서 성장했다. 1633년(인조11) 성원시에 장원급제하고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면서 관직에 발을 내디뎠다. 이후 그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지만 병자호란이 일어나면서 봉림대군이 청나라 인질로 잡혀가자 이곳으로 낙향, 학문에 몰두한 것이다. <주자대전차의>등 10여권의 성리학 저서와 <우암집>을 비롯한 100권이 넘는 문집을 남겼으며, 그의 주자학적인 정치 경제 사회사상은 조선후기 성리학의 정통적 흐름이자 가장 강력한 지배이데올로기로서 기능을 하게 되었다. 초야에 묻혀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준비했던 것이다.

이와는 별개지만 공부의 기쁨과 학문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느림의 미학은 그림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선의 대화가 겸재 정선은 <독서여가>에서 책을 사랑하는 한 선비의 일상을, 단원 김홍도는 <사인초상>을 통해 낮은 책상(서안), 벼루, 붓, 책, 촛대, 도자기 같은 서재의 풍경과 선비의 기상을 표현했다. 하긴 조선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독서를 장려하였는데 세종에 이어 성종과 정조는 신하들에게 독서를 위한 유급휴가를 주었으며 고종은 어려운 시국 속에서도 서책 보존에 힘쓰지 않았던가. 불행하게도 근대화와 산업화의 곡진 시간을 보내면서 서재는 상류층의 눈요깃거리나 몇몇 학자들이 책을 보관하는 서고 정도로 변질되었다. 속도의 시대 행여 다른 사람들에게 뒤질세라 서두르며 자신의 욕망만을 쫓다 보니 서정도 낭만도 풍류도 모두 속절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현대인들의 정보광장이라는 도서관이 획일화 되고 있음에 마음이 슬프다. 어디를 가도 대형화되고 천편일률적인 풍경, 수많은 책을 보관하고 이를 열람하는 사람들의 기계화된 모습, 정보의 바다인지 치열한 삶의 또 다른 연장인지 분간 안갈 정도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굳은 표정들…. 불안하고 안쓰럽고 처량하기까지 하니 무엇을 탓하고 누구를 나무랄 것인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1천여 년의 세월을 뚫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계승하고 재생하면서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학문의 자유, 생각의 자유, 창작의 자유가 보장되고 시대와 공간과 계급을 뛰어넘는 소통과 창조적 지혜가 결집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문화강국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하니, 우리 사회가 문화로 꽃피고 소통과 조화를 통한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면 문화의 향연으로 가득한 동네 도서관을 많이 만들어야겠다. 책을 읽고 정보를 교환하는 기존의 도서관이 아니다. 미술, 디자인, 어린이, 건축, 경제, 복지, 환경 등 테마별로 특화하고 도서관별로 네트워크가 가능해야 한다. 갤러리가 있어 메마른 가슴에 예쁜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어야 하고, 철학과 문학과 미학의 담론을 주고받으며, 패션 디자인 음악 등 다채로운 공연이 열리고, 시민들이 생활공예를 즐기고 보다 높은 꿈을 꿀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봄을 알리는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그날은 하루 종일 햇살이 눈부셨다. 눈보라 지나가고 바람마저 떠난 자리, 고요속에 남겨진 매화. 지난 겨울 오랜 시간을 인내하고 기다렸던가. 좀처럼 꽃피울 생각을 않더니 느릿느릿 조용히 열리기 시작한다. 대지의 기운을 받은 생명들이 마음의 빗장을 열기 시작하고 햇살은 새로운 미래를 축복하듯 초롱초롱 빛났다.

화양동은 구석구석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구김살 하나 없는 맑은 계곡과 사계절 푸른 소나무 숲과 기암절벽과 푸른 하늘…. 그리고 그 품에서 옛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니 들썽거리는 일상의 때를 벗고 역사와 자연을 벗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곳곳에 숨어있는 송시열의 유적과 14m 높이의 거대한 바위벽에 그려진 마애삼존불상, 인근의 미륵산성 등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화양구곡의 사계. 한국의 미, 자연의 미를 원 없이 표현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차를 세워놓고 가벼운 걸음으로 즐거운 소풍길을 시작하자. 맑은 계곡물 흐르는 소리 들려오고 소나무 숲을 빠져 나온 상큼한 바람의 이야기에 귓불이 간지럽다.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버들강아지는 산새 들새들과 합창하며 봄의 전령 매화도 뒤질세라 꽃망울을 터트리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입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님찾아 가는 길에, 뉘 집 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코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볼까나." 이은상이 시를 쓰고 홍난파가 곡을 붙였으니 대한민국의 대표 음악이 아닐까.

계곡물에 풍덩 빠져 한유롭게 노닐고 있는 물고기 구경도 잠시, 화양서원과 암서재를 지나 화양 제3교를 건너면 본격적인 등산코스로 접어든다. 해발 650m의 도명산을 올라야 할 시간이다. 도명산은 능선을 타고 정상을 향해 오르는 길도 일품이지만 마지막 철계단을 올라서면 백두대간의 푸른 정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대한민국의 산이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나도 모르게 가슴으로 밀려오는 경외감에 소스라친다. 정상에서는 속리산 문장대와 낙영산의 풍광이 지척으로 보인다. 낙영산은 떨어질 낙落자에 그림자 영影자를 쓴다. 중국의 천자가 세수를 하려는데 물속에 아름다운 경치가 보여 한반도로 내려와 찾았는데 이곳이었다 하니 중국까지 유명세를 탔던 것이다. 집채보다 더 큰 바위는 왜 이리 많은지, 어느 것이 바위고 어느 것이 구름인지, 무엇이 소나무 숲이고, 무엇이 푸른 상공인지 알 수 없다. 끝없이 펼쳐진 병풍 같은 풍경을 뒤로 하고 하산하다보면 단순한 선으로 표현했지만 인간의 염원을 곡진하게 담고 있는 마애삼존불상을 만나게 된다. 발 닿는 곳마다, 눈길 마주하는 곳마다 신록이 움트고 봄노래로 가득하다.

하산하는 발걸음을 서둘러야겠다. 이러다가 해 지고 달 뜨면 내 마음이 시리고 아플 것 같다. 산하는 이미 봄기운이 완연한데 나는 아직 봄채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지난날의 누추한 마음의 빗장을 열지 못했으니 화양동의 밤하늘에 상처 입을까 두렵다.

/ 글 변광섭(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그림 강호생(충북미협회장), 사진 홍대기(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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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