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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소풍길 - 흥덕사지

삿된 마음 끊고 세상과 소통하려는 울림 가득한 곳

  • 웹출고시간2011.03.03 20:08:48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흥덕사 경내는 고요했다. 뒷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웅전 처마밑의 풍경에 걸려있는 물고기만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을 뿐이었다. 시냇물은 쏟아지는 햇살을 품고 아래로 아래로 흐르니 덧없고 막막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봄꽃이 여기저기서 피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묘덕은 외로웠다. 외로움은 기다림을 낳았고, 기다림은 새로운 생각과 용기를 낳게 했다. 살아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문득 백운스님이 열반에 들기 직전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인생이란 겪는 것이다. 나쁜 일도 겪고 좋은 일도 겪고, 기쁜 일도 겪고 슬픈 일도 겪는 것이다. 하여, 어차피 인생은 들판의 꽃과 같아서 자고 나면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늘 수행이란 이처럼 이런 저런 일들을 겪기 위해 스스로 단단해지는 시간이다." 그날 백운스님의 마지막 모습은 맑고 향기로웠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으며 부처를 만나는 것처럼 평화로웠다.

사르락 사르락 눈 내리는 소리에도, 손발을 꼭꼭 묶어두는 칼바람에도 아스라한 절망을 가슴에 묻고 다시 태어나는 복수초福壽草.

묘덕은 석찬과 달잠을 가람 뒷마당으로 불러냈다. 이들은 모두 백운스님의 시자侍者였다. 스님의 소중한 말씀과 고귀한 뜻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이미 스님께서는 중국 호주의 석옥선사에게 불법을 구하고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목판본 '직지'를 편집하여 저술한 바 있기 때문에 당신의 말씀은 부처의 가르침이자 선善이었다. 게다가 여러 고승들의 가르침과 선문답을 여러 해에 걸쳐 황모필 수백 개를 소진해가며 정리 해 놓은 것이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소통하며 참된 길로 인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남은 생의 몫이었다.

묘덕의 제안에 모두 뜻을 같이했다.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어 인쇄하면 대량생산도 가능하고 보존성도 뛰어나며 정보문화의 신기원이 될 것이라고 달잠이 귀띔했다. 달잠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찰 밖의 대장간을 오가며 금속활자 만드는 일을 시도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가깝게는 청주읍성에 있는 대장장이를, 멀리는 증평과 보은의 장터에 있는 대장간까지 수없이 들락날락했다.

묘덕은 인근에서 내로라하는 장인들을 찾았다. 금속활자장, 한지장, 배첩장, 필장, 서예가 등 1백여 명에 달했다. 이 일대는 일찍이 신라말기부터 불교문화가 꽃피고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철기와 한지제조법이 대대손손 이어져 왔기 때문에 장인을 찾고 협력을 끌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묘덕의 제안을 들은 사람들 대부분이 조건 없이 따르겠노라 했다. 이들은 흥덕사 대웅전 인근에 준비된 공방에 모여 밤낮없이 작업을 계속했다. 글자본을 제작하고 밀랍을 녹여 판형틀에 붓고 응고시켜 밀납판형을 만들었으며 그 위에 결정된 글자본을 뒤집어 붙였다. 이어 어미자를 만들고 밀납가지와 주형(거푸집)을 만들었으며 청동을 녹여 주형의 입에 쇳물을 붓고 쇳물이 식으면 단단해진 거푸집을 파내서 활자 가지쇠를 들어냈다. 그리고 쇠톱을 사용해 활자를 하나씩 떼어내 인쇄틀에 조판을 한 뒤 인쇄를 하기 시작했다. 인쇄용지는 닥나무 껍질을 베고, 찌고, 담그고, 짜고, 말리는 등 99번의 과정을 거쳐 100번째 장인의 손에서 나온다는 벌랏마을 한지만을 고집했으며 금속에 잘 묻는 유연먹으로 애벌인쇄를 했다. 그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문득 "쉬운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먼 곳을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고,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살다보면 수많은 욕망의 덫과 유혹에 빠지겠지만 그 욕망을 잠재울 수 있는 내밀함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선이다"라는 스님의 말씀이 가슴속으로 짠하게 밀려왔다.

연둣빛의 은행잎이 짙푸름의 시림으로, 다시 노랗게 물이 들고 정처없이 흩날리더니 바스락 거리는 낙엽위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청산이 곧 부처라 하신 백운스님의 뜻을 금속활자본으로 편찬하겠다는 대역사를 시작한지 몇 해나 지났던가. 그동안 묘덕은 삿된 생각을 끊고 오직 백운스님께서 초록해 놓은 말씀이 활자가 되어 세상의 빛이 되길 바라는 마음 곡진할 뿐이었다. 고난이 사람을 단련시킨다고 했다. 잎이 떨어지고 나니 비로소 열매가 맺듯이 그토록 난망했던 것들이 하나 둘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깊은 겨울날 대웅전의 망새?尾에 햇살이 난반사되었다. 묘덕은 마지막 남은 활자 가지쇠를 인쇄틀에 올려놓았다. 한지에 한 땀 한 땀 바느질 하듯 간절함을 담아 인쇄를 하고 쪽물염색과 능화판 밀랍을 거친 겉표지를 올려놓고 꿰매기 시작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백운스님의 말씀이 한 권의 책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소리가 쏟아졌다. 햇살의 소리, 바람의 소리, 산새 들새들의 합창하는 소리, 그동안 고난과 역경을 함께 이겨냈던 수많은 장인들의 감동과 눈물소리…. 고단하고 암울했던 현실이 맑고 향기로움으로 가득했다. 1377년 청주목淸州牧의 흥덕사는 그렇게 눈두덩이 시릴 정도로 눈부셨다.

직지는 상권과 하권으로 만들어졌지만 현재 하권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소장되어 있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초대 주한대리공사로 부임한 꼴랭 드 쁠랑시가 우리나라에 근무하면서 고서와 각종 문화재를 수집하였는데, 그 속에 직지가 포함되었던 것이다. 이 때 꼴랭 드 쁠랑시는 알았을 것이다. 직지는 구텐베르그 42행 성서보다 훨씬 앞서 금속활자로 제작된 책이고, 대한민국이 인쇄문화와 정보혁명의 발상지라는 사실을. 그렇기 때문에 주한대리공사 임기를 마치기가 무섭게 직지를 바리바리 싸들고 고국으로 줄행랑친 것이 아닐까.

묘덕 석찬 달잠, 그리고 수많은 장인들이 피땀 흘려 만든 직지는 한 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그 소식과 출처와 행방을 궁금해 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고단하고 비루한 삶의 연속이었으며 잦은 외침과 내란 등으로 나라 전체가 피로했다. 이 때문에 그날의 신비와 기원과 참뜻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직지의 가치와 의미가 왜곡되거나 훼손될 수는 없었다. 한국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었던 박병선 여인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중 한국에서 건너 온 자료가 많다는 것을 알고 밤낮없이 뒤지며 조사한 끝에 직지를 발견했으며, 1972년 세계 도서의 해에 출품되면서 세계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

직지가 청주 흥덕사에서 발간되었음은 1985년에 확인되었다. 당시 한국토지공사가 이 일대 택지개발 사업을 추진하던 중 연화문蓮花紋, 당초문唐草紋 등이 발견되자 개발을 중단하고 청주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 쇠로 만든 큰 북(쇠북 또는 금구)이 포크레인에 찍혀 올라왔는데 '황통 10년 흥덕사'라고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포크레인 기사는 사찰 건물의 주춧돌인 초석을 여러 개 수습한 뒤 새참을 위해 쇠바구니를 땅속에 처박고 시동을 끄려는 순간 어디선가 "깨갱~"하는 소리와 함께 흥덕사 뒷산 양병산에서 알 수 없는 굉음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어둠속에서 수백 년 숨죽이고 있던 진실이 햇살과 합궁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흥덕사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접어야겠다. 고인쇄박물관과 흥덕사지의 늦겨울 풍경을 가슴에 담고 내려오니 눈앞에 박목수네 가게가 예쁜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우측에는 직지골식당과 이바지음식전문점과 한국공예관이, 좌측에는 운봉서각과 유림필방이 길 가는 나그네에게 잉크한다. 문득 묘덕이 내게 귓속말로 속삭이는 듯하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티 없이 살다가면 어떠한가. 이제 나도 부질없는 영욕 꿈꾸지 않고 맑은 풍경소리처럼 살고 싶다.

/ 글 변광섭(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사진 강호생(화가, 충북미협회장), 사진 홍대기(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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