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신미(信眉·?-?)대사의 법호가 이례적으로 길고 극존칭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신미대사가 문종으로부터 받은 법호는 '대조계 선교종 도총섭 밀전정법 승양 조도 체용 일여 비지 쌍운 도생 이물 원융무애 혜각 종사(大曹溪禪敎宗都總攝密傳正法承揚祖道體用一如悲智雙運度生利物圓融無·惠覺宗師)로, 무려 37자에 달한다. 그러나 이 법호는 사실은 문종이 아닌 세종이 준비했던 법호였다. 세종은 궁궐내 내원당 건립 등 신미대사의 불사에 감사를 표시하는 의미로 '선교종 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싸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宗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준비했었다. 그러나 이 법호를 내리기 전에 승하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고, 아들 문종이 대신 전하게 된다. 골수 유교분자들인 대신들이 "그 법호는 안 된다"며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그들이 보인 반응 정도는 '국조 이래로 이런 승직이 없었다'(문종실록)라는 것이었다. 하위지는 "안팎이 눈을 비비며 간절히 유신(維新)의 정치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정사에서 간사한 중에게 존호를 내리시었으니, 바르지 못한 것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했다. 본문에 등장하는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道岩面)이 지난 2007년 행정지명을 '대관령면'으로 개명하면서 대관령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일거에 가져간 바 있다. 본래 대관령은 강릉시 위치에서 볼 때 '동해쪽으로 넘어오는 큰 관문'이라는 뜻을 지닌 지명이었으나 도암면이 선수를 치면서 강릉시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백두대간 대관령이 지니고 있는 청정, 생태, 고랭지, 설원, 목축관광 이미지가 적어도 지명상으로는 고스란히 도암 대관령면으로 넘어갔다. 지난해 본보의 취재 결과, 경북은 이번 단산면 파동 외에도 적어도 십수년 전부터 영로에 천마도 조형물과 소공원을 만드는 등 백두대간 문화에 대한 선점작업을 진행해 왔다. 천마도 조형물은 경주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말그림으로,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하늘로 웅비하는 기상을 담고 있다. 충북도 본받을 만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천마도 조형물과 표지판이 충북과 경북 도계(道界) 대부분에 설치돼 있다. 소공원은 영로 정상이나 바로 밑에 조성돼 있어, 길손과 차량 운전자들에게 영로 정상이 마치 경북 단독의 영역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충북은 경북과의 도계를 그냥 방치하거나 기껏해야 '고드미'와 '바르미'와 같이 시대에 전
조선시대 세종~예종 연간에 우리고장 속리산 복천암 주지를 지낸 인물로 신미대사((信眉·?~?)가 있다. 그의 본관은 영산(永山), 즉 지금의 영동으로 그의 집안은 본래 유학을 숭상했다. 그러나 신미는 부친 김훈(金訓)이 주지육림에 빠지자 출가했다. 문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집현전 직제학 박팽년 등이 상서하기를, "(신미는) 그 아비 김훈이 죄를 입게 되자, 폐고(廢錮)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몰래 도망하여 머리를 깎았습니다…'" - 본문 중 '폐고'는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미대사와 관련해 이른바 '한글창제 주도설'이 자주 거론되고 있다. 이 설은 대략 세종이 한글창제를 기획하고 작업을 주도한 인물은 신미대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로 신미가 세종·세조 두 임금과 유난히 친밀했던 점, 한글창제후 유교가 아닌 불교경전이 집중적으로 간행된 점, 법호가 유난히 길고 극존칭으로 돼 있는 점 등을 꼽고 있다. 이밖에 월인석보와 훈민정음이 불교적 상징을 지닌 108장과 33장으로 각각 구성돼 있는 점 등도 거론하고 있다. 신미대사가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내용은 현존하는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월경지(越境地)와 두입지(斗入地)라는 독특한 형태의 행정구역이 존재했다. 월경지는 같은 행정구역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본토와 알래스카처럼 다른 행정구역을 뛰어넘어 마치 섬 모양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두입지는 다른 행정구역을 국자 모양으로 파고 들어간 형태를 말한다. 이때의 '斗'는 북두칠성으로, 역시 길쭉하게 파고 든 모양을 상형하고 있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행정상 청주시에 소속된 땅이 대전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 거의 전기간 동안 지금의 대전시 동구 추동 일대(대청호 자연생태관 주변)에 청주목 땅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건너 편인 지금의 옥천군 군북면 항곡리와 회인 접경 일대에도 청주목 소속의 땅이 존재했다. 바로 주안현(周岸縣·후에 주안면)이다. 조선후기 지도에서 보듯 월경지 주안현의 상당 지역은 금강수계와 대면을 하고 있다. 주안현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조선 전기부터 등장한다. 세종실록지리지 청주목 편은 주안현에 대해 '향(鄕)이 1이니, 주안(周岸)이며,예전에는 주애(朱崖)라 하였다'라고 적었다. 주안현은 중종 때 쓰여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옛날에는 주애(朱崖)라고 했는데, 고을의 동남쪽 60리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재료와 모양에 따라 술잔(盃)의 이름을 다양하게 불렀다. 규화배(葵花盃), 옥배(玉杯), 수정배(水晶재), 앵무배(鸚鵡盃), 나배(螺杯) 등이 있다. '규화배'는 접시꽃 모양, 앵무배는 바다의 앵무조개, 나배는 소라껍데기로 만든 것을 말한다. 사전은 앵무조개에 대해 '헤엄칠 때는 아가리를 위로, 갓을 아래로 하고 껍데기를 앞으로 하여 후퇴 방향으로 한다'고 적고 있다. 조선시대 대다수 임금들은 잔을 중요시 여겼다. 특히 애주가형 임금일수록 잔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연산군도 애주가형 군주에 속한다. 그에 얽힌 이야기가 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전교하기를, "나배(螺杯) 3백∼4백 개를 생산되는 곳에서 채취하여 들이게 하라"하였다.'- '전교하기를, "규화배 1천, 앵무배 1백을 구워 만들라" 하였다.'- 연산군이 왜 한번에 수백내지 1천개의 술잔이 필요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여러가 정황상 '궁중 파티'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같은 추정은 "팔정배(八呈杯) 및 일체 주기(酒器)를 숙용(淑容)의 집 헌수연에 진배하라"는 표현에서 어느정도 입증되고 있다. 숙용은 임금의 후궁에게 내리던 종3품 내명부의 품계를 말한다. 조선시대 후궁들은
조선시대는 청렴결백한 관리인 청백리(淸白吏)를 제도적으로 육성·관리했다. 청백리 제도가 언제 시작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성종실록에 청백리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 도입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청백리의 선발은 전후기가 달랐다. 조선 전기에는 의정부·이조에서, 후기에는 비변사·이조가 왕명에 따라 2품 이상의 관료자 중 생존하거나 사망한 인물을 1차 대상으로 했다.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청백리 중에 이약동(李約東·1416∼1493)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세종 때 진사시와 문과에 잇따라 급제한 후 제주목사까지 승진했다. 그의 청백리에 얽힌 이야기는 이때 만들어 진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공이 제주 목사로 있으면서 사냥할 때에 채찍 하나를 가졌었는데, 임기가 차서 돌아올 때 그 채찍을 벽 위에 걸어 두었었다. 후에 섬 사람들이 보배처럼 간수하여 매양 목사가 도임하면 채찍을 내어 놓았다. 세월이 오래 되자 좀이 먹어 부서지니 화공(畵工)을 시켜 그 채찍의 형상을 그려 걸어 놓았다.'- 공적(公的)으로 주어진 물건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개인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인용문에는
도굴(盜掘)의 사전적인 의미는 '법적 수속이나 관리자의 승낙을 받지 않고 고분 따위를 파거나 광물을 캐내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꼭 땅속이 아니더라도 사찰이나 고택에서 옛 유물이나 유품을 훔치는 행위도 넓은 의미의 도굴로 보고 있다. 몇년전 국내 최고 수준의 도굴꾼으로 불리는 서모씨가 "내가 직지를 훔쳤다"고 말해, 지역의 주목을 끈 바 있다. 또 얼마전에는 1백년전 청주 음식문화를 다룬 '반찬등속'이라는 고문헌의 존재가 확인되기도 했다. 1백년전 청주 강서의 한 양반가에서 쓴 것으로 추정되는 반찬등속은 아쉽게도 우리 지역이 아닌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따라서 여러 정황상 강서지역에서 도난당한 것이 여러 경로를 거친 끝에 민속박물관으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도굴꾼들이 활개를 쳤다. 실록에도 도굴과 관련된 내용들이 다수 등장한다. 특히 충북 불교의 공간적인 종가(宗家)가 되는 속리산도 자주 등장한다. 지금은 법주사가 도내 최고의 대찰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복천사(福泉寺·지금의 복천암)도 그에 못지 않았다. 복천사는 신미대사가 주지로 있을 때 세조 임금이 방문했던 사찰로 유명하다. 이때 세조는 불전 이상의 파격적인 경제적 지원
◇ 세초(歲木+少) 자주 사용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시간의 '공간성'을 실감나게 표현하는 단어다. '초'는 나뭇가지의 끝이라는 뜻으로 음력 12월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비슷한 표현으로 '초동'이 있다. 겨울 석달(10월, 11월, 12월) 가운데 맨 마지막 달인 12월은 곧 그해의 끝이다. 따라서 옛 사람들은 '나뭇가지 초' 자를 써서 초동(木+少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세초를 한자 '歲初'(세초)로 쓰면 새해 첫날이 된다. ◇막달 역시 음력 12월달을 부르는 말이다. 막달은 '마지막'에서 '막'과 '달'(月)의 합성어(合成語)로, 달력상 마지막을 의미한다. 흔히 가정에서 가장 마지막에 태어난 자식을 '막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경우다. ◇썩은달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묵은 것이나 썩은 것을 버려야 한다. 선조들은 세월도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봤다. 따라서 음력 12월을 막달이라고도 표현했다. 막달인 12월에는 '썩은 것'을 보내기 위해 다양한 행위도 이뤄졌다. 폭죽, 빚청산, 대청소, 목욕, 머리 태우기, 묵은 세배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야광귀(夜光鬼) 동국세시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다. '이름이 야광인 귀신이 이날 밤 민가
고려말기의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은 우왕과 창왕을 공민왕의 핏줄이 아닌, 신돈과 시녀 반야(般若)의 사생아라고 빡빡(?) 우겼다. 어떤 때는 '왕'이라는 호칭도 생략하고 그냥 '우', '창'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래야 자신들의 쿠데타 명분이 반비례적으로 강화되기 때문이었다. 조선 초기에 쓴 고려사에 이어 실록에도 같은 표현이 보인다. "왕씨는, 공민왕이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남으로부터 신우(辛禑)가 사이를 틈타서 왕위를 도적질했다가, 죄가 있어 사양하고 물러갔으나, 아들 창(昌)이 왕위를 물려받았으므로 국운이 다시 끊어졌습니다."- 조선 초기 조정은 반란을 우려해 왕씨들에 대한 대대적인 멸족 작업에 착수했다. 언뜻 생각하면 '과연 한 성씨를 멸망시키려 했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록을 보면 사실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매우 단문이지만 왕씨에 대한 수장 행위가 있었음을 그 행동자 이름까지 기록해 놓았다. '윤방경 등이 왕씨(王氏)를 강화 나루에 던졌다. 손흥종 등이 왕씨를 거제 바다에 던졌다.'- 이밖에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 베었다'(태조실록)라는 표현으로 봐 육지에서도 멸족 행위가 진행됐음을 알
조선은 '대국을 섬긴다', 즉 사대(事大)를 외교의 한 방도로 삼았기 때문에 매년 중국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해야 했다. 하정사(賀正使), 동지사(冬至使), 성절사(聖節使) 등이 바로 그것으로, 이른바 삼절사라고 불렀다. 하정사는 새해 정월, 동지사는 세밑 동지 무렵, 성절사의 황제나 황후의 생일에 맞춰 보내던 사신을 말한다. 이중 하정사는 매년 10월말이나 12월초에 떠나서 그 해가 가기 전에 북경에 도착, 40∼60일 동안 머무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때 중국 황제에게는 모시·명주·백면지(白綿紙)를, 황후에게는 나전소함(螺鈿梳函) 등을 바쳤다. 백면지는 고급 종이의 일종, 나전소함은 자개로 만든 화장 도구함을 일컫고 있다. 힘없는 나라 조선의 사신은 황태후와 황태자에게도 선물을 바쳐야 했다. 그 종류는 황제와 비슷하나 그 수량은 대략 절반 정도였다. 그해 하정사는 2월중에 떠나서 3월말이나 4월초에 돌아오는 것이 통례였다. 세종 즉위년(1418)의 하정사로 김여지(金汝知·1370∼1425)라는 인물이 선발됐다. 세종이 김여지에게 중국 황제의 신년맞음을 축하하는 내용의 글을 휴대하게 했다. 이렇게 정초에 중국에 올리는 외교글을 '정조하표전'(正朝賀表箋)이라
조선의 국가방위체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며 변모하기 시작했으나 숙종대에 이르러 가장 많이 변화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숙종은 그동안 이어져왔던 '국가 위난시 국왕→강화도, 왕자→남한산성'의 피신 원칙을 접고 한양도성 수호전략을 수립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청주시청 라경준(사진) 학예사에 따르면 남한에만 2천1백37 곳의 성터가 존재하고 있는 가운데, 이중 산성이 9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한반도가 '성곽의 나라'로 불려지고 있는 것은 △대륙과 해양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인 이유 △외침이 있을 경우 '들을 청소하고 성에 들어가 농성한다'는 청야입조(淸野入保) 전략이 전통적으로 존재해 왔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조선의 이같은 국가방어체제는 화포 등장과 전략미숙을 경험한 임란·병자호란 후부터 변화하기 시작, 그 중심에 이른바 관방개념이 위치하게 된다. 선조가 임란 중에 성을 보수하고, 또 광해군과 인조가 후금의 침입에 대비해 황해도와 의주-한양 교통로를 중시하는 등 임진왜란 후 국가방위에 대한 작은 변화가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숙종대의 국가방어 전략은 종전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이른바 '3중 방어 시스템'과 '한양도성 수호'
중국의 용은 은나라, 그러니까 신석기시대부터 등장한다. 우리나라는 이보다 늦은 청동기 시대부터 용 문화가 관찰되고 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에는 국보 제 147호인 천전리 각석이 존재하고 있다. 선으로 새긴 그림들 중에는 4개의 다리와 2개의 지느러미를 가진 몸통이 긴 동물이 그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우리나라 최초의 용그림으로 보고 있다. 용 문양이나 장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아무대로 사찰이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사연이 존재하고 있다. 불교 건축물에 용 문양과 장식이 적극적으로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다. 사명, 영규대사 등에서 보듯 조선의 승려들은 북인과 합세해 임진왜란 때 전공을 많이 올렸다. 임란이 끝난 후 불교에 대한 탄압이 크게 완화됐다. 그러자 불교계는 이때부터 백성들을 절로 불러들이기 위해 민간에 퍼져있던 용 사상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기 시작했다. 불교 건축물의 각종 용 조각과 용 그림은 바로 백성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계산된 상징기호였다. 따라서 고려 건축물인 부석사 무량수전과 유교건물인 향교와 서원에는 용장식이 관찰되지 않는다. 국보 55호인 팔상전은 임란후인 인조(17세기) 때 재건된 목탑이다. 이 팔상전을 잘 살펴보면 용그림
충주시 이류면의 행정명칭이 2012년 1월 1일부터 '대소원면'(大召院面)으로 공식 변경됐다. 이류면은 그 동안 한자가 '利柳'(이류)로 다름에도 불구, 어감상 '이류'(二類)를 자주 연상시켜 왔다. 따라서 충주시는 지난 2010년 10월의 실태조사, 2011년 3월의 명칭변경추진위 구성 등 그 동안 면이름을 바꾸기 위한 절차를 꾸준히 진행해 왔다. 그 결과, 시민공모를 통해 들어온 '국원', '대소원', '다인', '서충주', '중원' 중 인지도다 높은 '대소원면'으로 정하고 주민의견 조사와 시의회 조례 개정을 통해 이를 최종 확정했다. 이로서 이류면이라는 행정명칭은 97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류면이라는 명칭이 처음 생겨난 것은 경술국치(1910) 이후의 일로, 그리 오래된 편은 아니다. 일제는 지난 1914년 이안면에서 '이', 유등면에서 '유' 자를 따서 '이류면'으로 작명했다. 당시 이안면에는 대소원리, 금곡리, 마치리, 성종리, 본리, 노옥리, 흑평리, 불방리, 하검리 등 19개 리가 속해 있었다. 반면 유등면에는 팔봉리, 수주리, 하담리, 월은리, 기동, 매산리, 장승리, 수현리, 산정리, 용두원, 만적리 등 18개 리가 포함돼 있었다
금년은 용의 해, 그것도 흑룡의 해로 일컬어지고 있다. 용은 열두띠 중 유일한 상상의 동물이다. 이와 관련, 학계에는 뱀, 공룡, 인도신화, 기상관련설 등 대략 4가지 설이 등장해 있다. 앞선 3가지는 표현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 기상관련설은 용오름 현상과 관련이 있다. 극단적인 저기압이 해수면에 형성되면 깔대기 모양의 구름이 만들어진다. 작년 가을에도 동해에서 이같은 현상이 관찰됐다. 옛사람들이 이를 목격했으면 충분히 용의 승천을 연상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다. 일부에서는 용을 '구사(九似) 동물'이라고 표현한다. 용은 이른바 이미지 조합의 동물로, 여러 짐승의 특장을 두루 갖추고 있다. 뿔은 사슴, 머리는 뱀, 눈은 토끼를 닮았다. 이밖에 목덜미는 뱀,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손바닥은 호랑이, 귀는 소와 비슷하다. 바로 '구사'는 용이 아홉가지 동물을 닮았다는 뜻이다. 용은 성장하면서 이름도 달리 부르고 있다. 정치계절이 되면 자주 들을 수 있는 표현으로, 이무기·잠룡·항룡 등이 있다. 이무기는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상태로, 물속에서 5백년을 지내야 용이 된다고 한다. 잠룡은 용이 됐으나 아직 물 밖으로 나오지 않은 용을 말한다. 대권 잠재 주자들에게
지역 문화유산을 체계적 발굴·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이 얼마전 개원 6주년을 맞았다. 2대에 이어 3대 원장에 재임된 장호수(56·사진) 씨를 만나 그 동안의 소회와 주변에서 궁금해 하는 내용을 대신 물어봤다. -충북지역에 분포하는 문화재들은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볼 때 어떤 특성이 있고 질적, 양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으로 볼수 있나. "충북의 지정문화재수는 우리나라 전체의 6% 수준으로 경북이 18%, 충남이 9%인 것을 보면 숫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다. 그나마 국가지정문화재는 전국의 4.8%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지정 대상문화재를 발굴하고 확대해 나가는 정책이 필요하다." -지정문화재는 아니라도 중요한 유산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비지정문화재들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우리 지역에는 국가지정문화재 164건, 도지정문화재 522건으로 지정문화재는 모두 686건 뿐이다. 그러나 지정되지 않은 것들 가운데에도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다. 가령 청주읍성지역만 해도 이곳 저곳에 남아있는 성돌이나 구조물들이 있을 것이고 이러한 것들은 앞으로 읍성을 복원하는데 기초자료가 된다." -충북의 문화재 가운데 활용가치가 높은 것들은 어떤 것들이
문서위조는 지금도 고전적인 범죄에 속한다. 조선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토지문서는 물론 과거 시험장에서 문서를 위조하는 사건이 비일비재 했다. '형조에 전지하기를, "부장소(部將所)의 서원(書員) 백주(白珠)·김양선(金楊善) 등은 정병(正兵)의 재물을 받고 혹은 놓아 보내고 혹은 대신 입번(立番)하게 하였으며, 사노 유석숭(劉石崇) 등은 제포선군의 해령직 고신(告身)을 위조하였으니, 아울러 국문하게 하라" 하였다.'- 인용문에 등장한 문서위조는 병역과 학력에 관한 유형들로 볼 수 있다. 전자는 뇌물을 받고 병역 대상자를 풀어주거나 혹은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 하는 것이고 후자는 고신, 즉 인사 임명장을 위조한 사건을 말한다. 조선 조정은 문서 위조범을 엄하게 다스렸다. 특히 임금의 뜻이 담긴 왕지를 위조했다고 적발될 경우 목을 베는 참형에 처했다. 그리고 공포감을 의도적으로 조성하기 위해 그 시신을 저잣거리에 장시간 방치했다. '사노(私奴) 최문(崔文)·오천수(吳天壽) 등이 왕지(王旨)를 위조하였으므로 모두 참형에 처하여 기시(棄市)하였다.'- 뿐만 아니라 문서 위조범의 가족에게도 연좌죄를 적용, 시골 관청의 노비로 삼기도 했다. 예종실록의 '인문(印文)을
경차관은 조선시대 중앙 정부의 필요에 따라 특수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된 관직을 말한다. 1396년(태조 8) 8월 신유정(辛有定)이라는 인물을 전라·경상·충청 지방에 파견한 것이 그 효시가 된다. 왜구 소탕이 주목적이었다. 재정·산업과 관련된 것을 살피는 것도 경차관의 중요한 업무의 하나였다. 이들은 이른바 곳간관리 실태와 재해발생 상황 그리고 유랑자 발생 여부 등도 자세히 관찰했다. 이밖에 수령과 향리(鄕吏)의 근무태도, 법 적용이 공정했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도 경차관의 주요 업무였다. 조선전기의 명 경차관으로 박원형(朴元亨·1411∼1469)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가 충청도를 한번 돌고 오면 관내 수령들의 비행이 고구마 줄기를 뽑아 들 듯이 걸려나왔다. 특히 기생과 관련된 기행이 가장 많았다. 충청도 경차관 박원형이 돌아와 아뢰기를, "충주 목사 임효충과 판관 임계중 이 비석(碑石)을 끌어 나른다고 핑계하고 숙마(熟麻)를 백성들에게 중하게 거두었고, (…) 충주에 갔다가 국상(國喪)의 기년(期年) 안에 여기(女妓)와 간통하여 잤습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숙마는 잿물에 삶아 희고 부드럽게 만든 삼 껍질을 말한다.권간이라는 인물도 거의 같은 유형의 비
조선시대 칠거지악(七去之惡)은 이이(離異)의 사유가 됐다. 이이는 '헤어져서(離) 다르게 된다(異)'는 뜻으로, 이혼의 조선시대식 표현이다. 여자의 경우 저고리 섶을 잘라 남편에게 주는 것으로 이혼의 징표를 대신하기도 했다.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不順舅姑) △아들을 못 낳는 것(無子) △행실이 음탕한 것(淫行) △질투하는 것(嫉妬) △나쁜 병이 있는 것(惡疾) △말이 많은 것(口舌) △도둑질하는 것(盜竊) 등이 칠거지악에 해당한다. 그러나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렀거나 △장가들 때는 가난했지만 뒤에 부귀하게 되었거나 △아내가 돌아가서 의지할 곳이 없는 경우 등은 삼불거(三不去)라고 해서 남편은 부인을 버리면 안 됐다. 이 경우 이른바 유처취처(有妻娶妻)에 해당돼 처벌을 받았다. 이는 정실 부인이 있으면서 또 다른 정실 부인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전기 유처취처를 했다가 처벌을 받은 인물로 고태필(高台弼)이 있다. 해외인(海外人)인 그는 현감으로 있으면서 오늘날의 고시인 문과에 급제하고 또 좌익공신 2등에 책록되는 등 관료생활 초기에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조선시대에는 제주도 사람은 '해외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유처취처 때문에 곤욕
충북대 김병로(목재·종이과학과) 교수가 얼마 전 이와 관련된 '고대 먹과 현대 먹의 특성 비교' 논문을 '과학 기술사와 문화재 과학'이라는 학술 세미나에서 발표했다. 김교수에 따르면 전통먹의 제조기법 등을 다루고 있는 동양의 고문헌은 패관잡기(稗官雜記·조선중기), 천공개물(天工開物·명나라 말기), 산림경제(山林經濟·조선후기) 등이다. 이들 고문헌 중 패관잡기는 먹제조 첨가물의 하나로 달걀 흰자를 언급, 적지 않은 호기심을 낳고 있기도 하다. 그는 이들 고문헌을 이론적인 토대로 연대가 밝혀진 고건축물에서는 먹자국 4점, 역시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불상 발원문에서는 먹글씨 14점 등 총 28점의 시료를 채취했다. 반면 현대먹에서는 일본산 7점, 중국산 2점, 한국산 8점 등 총 17종의 시료를 채취, 전통먹과 단일 입자크기, 원소 등을 비교·분석했다. 그 결과, 고목재에 사용된 먹이 고문서에 사용된 먹보다 단일 입자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고목재 시료의 하나인 창덕궁 신선원전 적심의 먹그림의 경우 평균 107㎚로 가장 크게 분석되었으며, 고문서 시료는 평균 38~86㎚로 분석되었다. ㎚(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의 단위를 말한다. 이밖에 송연먹이 유연먹보다
조선전기 청주를 찾은 임금은 태조, 세종, 세조 등이다. 이들은 계룡산, 초수리(초정약수), 속리산 복천암 등을 가는 도중에 각각 우리고장 청주를 방문했다. 이와 관련, 세 임금의 어가행렬 모습을 살펴보면 재미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집단으로 움직이는 어가행렬에도 개인의 성격이나 당시 문화가 뚜렷하게 반영돼 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어가행렬 자체를 간소화하려 했다. 지방관리가 행정구역 경계까지 마중나오는 것도 그리 반기지 않았다. '충청도 도사(都事) 한질이 와서 문안을 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초수 행차에는 참으로 간편한 것을 따르려 하였는데, 충청도 도사가 지경을 넘어 왔으므로 번거로운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 뒤로는 삼가서 이같이 하지 말라" 하였다.'- 태조 이성계의 어가행렬에서는 고려 문화가 상당부분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건국 초기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인용문 중 나례(儺禮)라는 단어가 그 힌트어가 된다. '청주에 이르니 목사 진여의와 판관 민도생 등이 나례(儺禮)를 갖추어 북교(北郊)에서 맞이하고, 부로(父老)들은 노래를 불러 올리면서 어가 앞에 절하였다.'- 나례는 음력
1백여년 역사의 양력설이 음력설(민속의 날·구정)에게 패배한 것은 일반 국민들이 사실과 다르게 '양력설=일본의 설'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가졌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신정'이라고도 불리는 양력설은 일본에서 건너온 풍습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고종에 의해 한말인 1896년(고종 33) 처음 도입·시행됐다. 고종은 외국과의 조약체결 등 각종 대외적인 활동에 있어 불편함이 뒤따르자 1895년 9월 음력 대신 양력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로 결정, 이듬해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궁내부 대신이, 만수성절(萬壽聖節·고종생일 지칭)인 임자년(1852) 7월 25일을 양력(陽曆) 9월 8일로, 왕태후의 경절인 신묘년(1831) 정월 22일을 양력 3월 6일로 (…) 만들어 신력(新曆)에 따라 인명한 안건을 반포하여 시행하자는 뜻으로 상주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좋다" 하였다.'- 그러나 인구의 상당수가 음력설을 계속 선호하면서 양력설은 일제 강점기에도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러자 일제는 1937년 12월 관공서 등 각종 매체를 동원, 이른바 양력과세(陽曆過歲)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했다. 이와 관련, 동아일보 1937년 12월 18일자는 '過歲와 市日 양력으
지금의 청원군 문의면은 과거에는 현(縣)이 설치돼 있던 곳으로, 그 현은 비교적 늦은 대한제국기까지 존속됐다. 이와 관련,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문의현에 현감이 파견됐던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문의현에는 현령(縣令)이 파견됐다. 현감과 현령은 다같이 외직(지방직)의 밀단 기관장이나 품계에서 차이가 났다. 현감이 종6품인데 비해 현령을 종5품의 품계를 지녔다. 현령이 1등급 더 높은 셈이다. 조선시대 현감은 태종 임금 때 처음 도입됐다. '각도의 단부(單府)) 고을을 도호부로 고치고, 감무(監務)를 현감으로 고치고…'- 현령제도가 언제 도입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현령은 삼국시대에 이어 고려 때도 그 이름이 보인다. 따라서 조선의 현령제도도 이를 계승한 측면이 있다. 다만 현의 규모가 중요도에 있어 현감과 차별을 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따라 대현에 현령, 소현에 처음에 감무를 두었다가 후에 현감을 두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문의는 규모가 큰 현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감이 아닌, 현령이 파견된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문의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본래 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인데, 신라 때
'한명회의 장소(葬所)는 충청도 청주 땅인데 3일의 노정이 되니 백관이 회장하기가 어렵습니다. 발인하는 날에 각사의 한 관원이 담복으로 먼저 도문(都門) 밖 육조·의정부에서 설전한 곳에 나아가서, 위(位)를 달리하고 서립(序立)하여 전송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한명회(韓明澮·1414~1487)의 이승 마지막 모습이다. 그는 예종, 성종 등 잇따라 두 임금의 장인이 되었기 때문에 백관이 도문 밖에 도열하는 등 장례식도 무척 화려했다. 그의 딸은 장순왕후(예종비)와 공혜왕후(성종비)이다. 한명회의 관은 3일간 운구된 끝에 지금의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에 안장됐다. 이와 관련, 문중사를 기록한 '청주한씨사감'(淸州韓氏史鑑)은 한명회가 '나의 선조 고향은 청주요, 나의 고향도 청주이니 내가 죽거든 청주 땅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천안 일대는 청주목 소속으로, 한명회의 관향과 일치한다. 그러나 한명회가 관향을 의식해 지금의 장소에 묻히길 원했는지는 분명치 않은 면이 있다. 실록에는 이와 합치되지 않는 내용이 등장한다. 조선시대 대사헌은 사헌부의 으뜸 벼슬(종2품)로, 정무적인 것을 논평하고 모든 관료를 규찰하고 풍속
충북에서 가장 추운 곳은 내륙이면서 백두대간 지역에 속하고 있는 괴산 청천면 송면리 일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청천은 지난해에도 제천을 제치고 가장 추운 곳으로 확인된 바 있어, 앞으로 '충북의 냉장고'라는 별칭이 뒤따라 다닐 것으로 보인다. 26일 청주기상대에 따르면 도내에는 단양 영춘면에서 영동 가곡면까지 총 28곳에 자동-무인관측기가 설치돼 있다. 이곳에서는 구름의 양(운량)을 제외하고 기온, 강수, 습도, 퐁향, 풍속 등의 기상요소를 자동무인으로 관측, AWS(지역별 상세관측자료)라는 이름으로 매 1분 간격으로 인터넷 서비스를 하고 있다. 이 AWS에 따르면 혹한이 1주일 가까이 계속 되고 있는 가운데 26일 오전 청천 송면리 일대의 최저기온이 영하 18.1도(오전 7시 26분)를 기록, 도내에서 가장 낮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 다음은 수안보 영하 17.8도(안보리·7시 39분), 미원 영하 17.1도(미원리·6시 57분), 음성 영하 16.6도(평곡리·7시 14분), 속리산 영하 16.4도(상판리·7시 24분) 등의 순서를 기록했다. 그동안 충북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알려져 왔던 제천은 이날 오전 영하 15.8도(신월동·7시 26분)의 최저기온을 나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전통사회에서 왕들은 백성들에게 해와 달의 움직임을 관찰, 농사의 시기를 정확히 알려줘야 했다. 따라서 천문기구는 그 자체가 통치의 도구이기도 했다. 이처럼 천체의 운행을 관찰해 백성들에게 농사의 절기를 알려주는 것을 '관상수시'(觀象授時)라고 불렀다. 조선은 동방의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 15세기 무렵에 세계 최고의 천문학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천문시계의 창의성은 다른 나라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는 세종대왕이라는 불세출의 인물과 천문학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 그리고 장영실, 이천과 같은 창의적인 전문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충북대 이용삼(천문우주학과) 교수의 '시계왕국 조선의 천문시계의 복원' 논문에 따르면 세종대왕이 장영실 등을 시켜 제작한 해시계는 규모가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대별되고 있다. 전자에는 규표(圭表·26.49x8.28m), 간의(簡儀·3.72x2.48m) 등이 있다. 규표는 1년의 정확한 시간적 길이와 24절기를 알기위해 , 간의는 천체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는 기능을 지녔다. 후자에는 앙부일구(仰釜日晷·35.2㎝), 정남일구(定南日晷·25.8㎝), 소간의(小簡儀·8㎝) 등이 있다. 앙부일구는 많이 알려진 모습으로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