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조선 조정이 왜 진휼정책을 중요시 했는가를 살펴봤다.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1차적인 목표지만 그 이면에는 국가재정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고 밝혔다. 기근에 대한 책임은 1차적으로 수령이 졌다. 따라서 고을주민 구제를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 곤장을 명령하던 수령이 도리어 곤장을 흠뻑맞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다. 진휼은 그만큼 중요시됐다. '예조 판서 황희(黃喜)가 계하기를, "고양현에 굶어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하여 승정원주서 이극복(李克復)을 명하여 가서 살펴보게 하였더니, 사비(私婢) 모란의 모자(母子) 세 사람이 굶주리어 부종(浮腫)이 났고, 소동(小童) 1명은 굶어 죽었다 합니다." 하니, 의금부에 명하여 현감 김자경(金資敬)을 추핵하니, 곤장 80대에 좌죄(坐罪)하였다.'- 조선 제일의 책사 한명회는 청주가 본향인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의 묘가 천안 수신면(당시 청주목 소속)에 위치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한명회의 장소(葬所)는 충청도 청주 땅인데 3일의 노정이 되니 백관이 회장하기가 어렵습니다. 발인하는 날에 각사의 한 관원이 담복으로 먼저 도문(都門) 밖 육조·의정부에서 설전한 곳에 나아가서, 위(位)
조선 정조 때 간행된 '戶口總數'(호구총수·1789)는 당시 전국의 호구와 인구수를 꽤나 정확히 기재해 놓았다. 호구총수에 따르면 당시 전국의 총호수는 1백75만2천837가구, 총인구는 7백40만3천606명이었다. 이를 행정 단위별로 살펴보면, 한양 18만9천153명, 평양 10만7천592명, 의주 8만9천970명, 충주 8만7천331명, 전주 7만2천505명, 경주 7만1천956명으로, 충주가 전국 4위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는 상주, 진주, 길주, 해주, 대구,양주, 강계, 성천, 나주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처럼 충주가 대읍(大邑)의 규모를 지녔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당시 충주목이 관할하던 행정 면적은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일제강점기 직전까지 존재했던 지도를 보면 충주의 서쪽 경계는 지금의 음성 금왕, 맹동면 일부까지, 동쪽은 백두대간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문에 충주의 인구 규모는 대동지지가 간행된 1861년(철종1)에도 청주목 인구를 크게 앞선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충주 인구는 9만7천명, 청주는 4만6천명이었던 것으로 고산자 김정호는 기록했다. 두번째 이유는 하항(河港) 목계나루의 번창에 있었다. ◇ 충주 조운(漕運)과 왜구 지방의 조
'많은 사람이 비슷한 증상을 나타내며 앓는 돌림병.' 조선시대 사람이 역병(疫病)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이다. 오늘날 전염병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발생 원인에 대한 생각은 웃음이 나올 정도로 비과학적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역병에 대해 기후와 환경 이상이 그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체로 억울하게 죽은 자의 원혼이나 제사밥을 얻어먹지 못한 잡귀들이 천지간을 떠돌아다니다 만들어낸 결과로 생각했다. 때문에 임금은 물론 지방에서도 연례 행사로 제사를 지냈다. 바로 '여제'다. 특히 역질이 만연할 징후가 보이면 봄철에는 청명, 가을철에는 7월 보름, 겨울철에는 10월 초하루에 여제를 지냈다. 역질이 함경도 등 국경지역에서 발병, 사람이 많이 죽을 경우 집단 이주정책을 긴급히 쓰기도 했다. 국경 방어를 위해서는 인적 자원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죄인들은 강제로 이주시켰다. 역질을 옮겨온 원귀를 쫓는데는 군기감이라는 기관도 동원됐다. 군기감은 병기 제조를 관장하던 기관으로, 특히 화약·각궁(角弓)·화포를 만드는 것이 주임무였다. 군기감은 화약이 갖고 있는 뜨거움과 요란한 소리를 이용해 역귀를 쫓으려 했다. '군기감에서
풍수가들은 충주의 풍수가 매우 좋다고 말하고 있다. 산이 높고 물이 깊으며 들이 넓기 때문이다. 이런 지리(地理)라면 한번쯤 나라의 도읍지가 됐을 수도 있으나 그렇치는 못했다. 풍수가들은 그 이유로 충주가 풍수상 인체의 어깨 쯤에 위치하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 우리 몸의 어깨는 전면이 아닌 후면에 위치한다. 이때 그 기준점이 되는 것이 백두대간이다. 이와 관련 풍수가들은 충주가 백두대간 안쪽, 즉 경상도 북부지역에 위치했으면 도읍지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지만 충주를 도읍지로 삼으려 했던 시도는 고려시대부터 나타난다. 고려 후기는 왜구의 극성기였고, 이 때문에 개경의 방어가 불안해지면서 도참설이 횡행하였다. 도참설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 혹은 징조를 통칭하는 말이다. 그것을 적은 책은 비기, 밀기 혹은 비결이라고 부르고 있다. 충주로의 천도는 신돈(辛旽·?~ 1371)이 공민왕에게 알리지 않고 은밀히 추진했다. 신돈은 충주가 내륙의 요새이며 교통의 중심지라는 지정학적 조건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돈이 비밀리에 시중 이춘부를 시켜 충주 천도를 청하니 왕이 크게 노했으나, 신돈이 송경은 해구가 두렵다고 하자 노염을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은 표현 중에 '창생'(蒼生)이라는 단어가 있다. '왕의 왕인 지위에 앉아서 억조의 창생을 다스리던 그는…'.(김동인의 '젊은 그들'). '그 본의가 결단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가운데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라.'(문순태의 '타오르는 강') 창생은 직역하면 '푸른 삶'이지만, 지금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영어로는 'The people'로, 창맹(蒼氓)·창민(蒼民)도 같은 뜻이다. 광제창생(廣濟蒼生·널리 백성을 구제함), 여로창생(如露蒼生·아침 이슬과 같이 덧없는 많은 백성)도 여기서 파생됐다. 조선 중기 때 '창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멋진 시를 지은 인물이 있다. 신재 최산두(崔山斗·1483-1536)다. 15세 때 통감강목(通鑑綱目) 80권을 가지고 석굴(石窟)에 들어가 2년간 여러번 독파를 하고 나왔다는 인물이다. '운창에서 도학 궁리 아홉 해를 보냈는데 / 연일 두고 쏟는 빗발 은하 포구 이었는지 / 강산을 온통 수국으로 할라치면 / 창생(蒼生)들은 포구에서 배를 붙들려 하겠지.'- '천자암 장맛비'(天子菴 霖雨)라는 제목의 시로, 창생들도 도학 공부를 열심히 하면 끝
달천의 한자 표기는 '達川'이다. 여기서 '달래강'이라는 이름도 파생된 것으로 여겨진다. 달천의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수달(獺)이 많이 살아서'와 '물맛이 달아서' 등 두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다. 옛부터 달천수계에 수달이 많이 살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은 토산조에서 당시 충주에서 많이 나는 것으로 철, 해송자(잣), 송이, 활석(일명 곱돌), 수달 등 5가지를 적었다. 후자에 대한 근거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에 함께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달천의 물맛에 대해 '본조(本朝)의 이행(李行)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사진 참조)라고 적었다. 택리지는 충주목 조에서 '임진년에 명나라 장수가 달천을 지나다가 물맛을 보고 '(중국) 여산(廬山) 폭포의 물맛과 같다고 했다. 고을이 한강 상류에 있어서 물길로 오가기가 편리하므로 서울의 사대부들이 예부터 여기에 많이 살았다'라고 적었다. 이처럼 달천은 예로부터 물이 매우 맑았다. 그러나 청정수가 흐르던 달천은 1592년 피로 물들었다. 한국 전란사 중 가장 참혹한 패배가 이곳에서 일어났다. ◇신립은 왜 새재에 진을 치지 않았나 1592년 4월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얼마전 김익수(金益壽·?~?)라는 인물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일반의 생각과 달리 푸대접 받았던 일반어사로 유명했다. 실록에 실려있는 내용이 너무나 생생, 안쓰러움과 함께 웃음을 나올 정도다. '신은 말을 타고 다니느라 피곤한데다가 밥먹을 겨를도 없어서 기갈이 심했으나 전혀 음식을 공궤(供饋)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대로 밤을 새웠는데 아침에도 역시 이와 같았으므로 또 밥을 먹지 못한 채 나왔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김익수가 우리고장 충청도관찰사를 매우 이례적으로 두번이나 역임했다고 밝힌 바 있다. 8도감사를 모두 지낸 인물은 있어도, 특정지역 관찰사를 두번 역임한 인물은 그 사례가 매우 희귀한 편이다. 관찰사는 국왕의 특명을 받은 사신으로, 끊임없이 도내를 순력하면서 1년에 두 차례 수령을 비롯한 모든 지방관리에 대한 성적을 평가, 조정에 보고했다. 이를 '포폄'(褒貶)이라고 부른다. 그가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충청도 지방에서 대홍수가 발생했다. 그 내용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사진)가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가 된 것은 이른바 독립운동에 대한 주체적 선변(善變)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쓰임새가 많지 않은 '선변'이라는 단어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어떤 내용이 과거보다 좋은 방향으로 변한 것을 일컫는다. 충북대 박걸순(사학과·사진) 교수가 최근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 38집에 '신채호의 아나키즘 수용과 동방피압박민족연대론'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단재는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1927년 신간회(新幹會)의 발기인과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하는 등 1920년대 후반부터 무정부적인 색채를 짙게 드러냈다. 특히 1928년부터는 무정부주의를 직접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 그해 5월 위조 위체(환어음)를 찾기위해 대만 기륭우편국에 들렸다가 체포돼 결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와 관련, 국내 학계에는 '단재가 민족주의를 위해 무정부주의를 수단으로 했다'는 설과 '무정부주의를 최고 가치로 보고 민족주의를 수단으로 했다'는 설이 존재해 왔다. 반면 신용하 교수는 단재의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적 독립사상으로 보면서도, 그가 무정부주의자가 된 것에 대해서는 '뜻밖의',
복정(卜定)은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먼저 점(卜)을 쳐서 길지를 정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밖에 조선시대 그 지방의 토산물을 강제로 바치게 하던 것을 복정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남에게 억지로 부담지우는 것을 '복정씌운다'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유래했다. 복정은 궁궐의 부족한 물품을 채우는 것이 1차적인 목표였다. 그러나 중국사신 접대용으로도 복정이 자주 하명됐다. '간원이 아뢰기를,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사체가 중대하니, 유사(有司)로서는 마땅히 마음을 다해 조처하여 사대하는 성상의 지극한 정성을 우러러 몸받아야 할 것입니다. (…) 그러나 신들이 해조(該曹)에서 각도에 분정한 물목을 가져다 보건대…"'- 복정은 강제성을 띄었다. 이는 하명된 양을 채우지 못할 경우 벌이 가해졌음을 의미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파직이라는 중징계도 내려졌다. 그와 같은 일이 우리고장 충청도의 한 병영에서도 일어났다. '간원이 아뢰기를, "충청 병사 김거병은 연소한 무부로서 부임한 뒤로 방비에는 뜻이 없고 오직 군졸을 침어(侵漁)하는 것으로 일을 삼는 데다가 법금(法禁)을 무시하고 가족을 많이 거느리고 가 있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이번에 조사가 왔을 때 각도에 복정
충북도내 시군 중 한시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최북단 단양이다. 단양문화원이 조사를 한 결과, 무려 130여수에 달하고 있다. 이들 한시의 대부분은 단양팔경 등 명승을 노래했다. 퇴계 이황, 추사 김정희 등의 작품이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흔치 않게 유배시를 남긴 인물도 있다. 정철(鄭澈·1536∼1593)과 더불어 조선 시가(詩歌)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고산 윤선도(尹善道·1587~1671)다. 그는 85살 생애를 살면서 14년은 유배지, 19년은 은거지, 나머지 8년은 관직에 몸을 담았다. 윤선도는 이 기간중 세 차례의 유배와 두 차례의 이배(유배지를 옮김)를 당해야 했다. 고산은 이때 우리고장 단양을 지나며 '歇馬孔巖'(헐마공암)과 '죽령도중'(竹嶺道中) 등 두 편의 한시를 남겼다. ◇14년을 유배지에서 살다 윤선도는 1616년(광해군 8) 일개 성균관유생 신분으로 이이첨(李爾瞻)·유희분(柳希奮)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은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일상적인 이야기거리입니다. 그런데도 이이첨이 또한 감히 변명을 하고 있으니 신은 삼가 통분스럽게 생각합니다.'- 당시 이이첨은 일인지상의 최고 권력자였다
조선시대 어사(御史)는 암행어사와 일반어사로 구분됐다. 암행어사는 글자 그대로 왕명을 받고 비밀리에 지방을 순행하면서 악정(惡政)을 살피던 특명 관직을 말한다. 이들의 임명과 임무는 일체 비밀에 붙여졌다. 암행어사 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세조 때였다. 성종실록에 '암행어사'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나, 세조 때 이미 도입됐던 정황이 나타난다. '옛날에 세조(世祖)께서 신에게 분부하기를, '지금 그대들을 보내는 것은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옛날 사람의 말에 '고양이를 기르는 집에서는 쥐가 함부로 다니지 못한다' 고 했으니, 암행어사(暗行御史)가 한 번 나간다면 탐관(貪官)이 저절로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암행어사 제도는 조선 전기에는 그리 발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신간의 신뢰를 해치는 것이라고 해서 안 좋게 여겼다. 대신 공개리에 활동하는 일반어사 제도가 더 많이 활성화됐다. 종류도 파견 목적에 따라 순무, 균전(均田), 독운(督運) 등 매우 다양했다. 순무는 순찰, 균전은 형평 과세, 독운은 조운을 살피는 것을 일컫고 있다. 이밖에 호패(號牌), 구황(救荒), 재해 점검을 위해서도 일반어사가 자주 파견됐다. 암행어
'춘파마늘에 식물생장홀몬처리가 생육 및 수량에 미치는 영향'. 충북대 제 1호 석사학위 논문(1970)의 제목으로, 논저자는 김진한(金鎭漢)이었다. 충북대 박물관(관장 양기석 교수·사진)이 개교 1갑(甲·60년)을 맞아, 26일부터 오는 12월31일까지 교내 개신문화관 1층 로비에서 학교사 사료 특별전을 갖는다. '충북대학교 60년-과거를 통해 미래를 보다'를 주제로 하고 있는 이번 특별전에는 1951년 청주초급농과대학으로 개교한 후의 성장·발달 과정이 당시 사진과 유물 등을 통해 파노라마처럼 전시되고 있다. 전시 유물로는 조현하 초대학장 관련 유물, '淸光', '개신' 등 각종 교내 교지, 1회 졸업증서 등이 있다. 서두에 언급한 제 1호 석사학위 증명서는 약간의 웃음까지 자아내고 있다. '이분'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논문 춘파마늘에 식물생장홀몬처리가 생육 및 수량에 미치는 영향: 이분은 본대학원의 석사학위 과정을 이수하고 논문을 제출하여 대학원위원회의 심사에 통과하므로써 농학석사의 자격을 얻었음을 이에 증명함.(...) 위의 증명에 의하여 농학석사학위를 수여함. 1970년 2월 26일 충북대학장 조건상' 빛바랜 것이 어느덧 역사가 된 충대사 사진으로는
얼마전 우리고장 음성 인물 채수(蔡壽·1449~1515)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연산군 시절을 산 인물이다. 연산군이 보위에 오른지 5년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채수는 이때 정희대비(세조의 비)가 폐비윤씨에 대해 적은 글을 사관에게 넘겨줬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당시 분위기로는 극형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러나 그는 곤장 70대만 맞고 풀려난다. 이때 실록에 우리고장 지명이 어느 때보다 많이 등장한다. 누가 "기생을 데려다 잔치를 했다"고 고변을 한 모양이다. '신이 먼저 충주에 가서 기다리자 아비가 또한 뒤따라 왔었습니다. 단지 하룻밤을 자고서 이튿날 신이 먼저 떠나 안부역(安富驛)에 이르고 아비가 뒤에 왔는데, 충주의 수령이 잠시 전별만 했을 뿐이고 기생을 데리고 잔치를 하느라 오래 머무르며 폐단을 만든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안부역은 지금의 수안보 일대를 말한다. 그의 손자가 채무일(蔡無逸·1496∼1556)이다. 조선시대 화가는 이른바 문인화가와 화원으로 대별된다. 문인화가는 사대부를, 화원은 속칭 환쟁이를 일컫고 있다. 문인화가도 조선시대 미감(美感)을 일정 부분 주도했다. 그러나 이들은 화가로 이름이 남는 것을 꺼려했다. 따라서 자식들에게
재실(齋室)은 묘제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을 말한다. 재실과 같이 죽음에 관련된 문화는 엄숙한 편이다. 따라서 일반 주택과 차이가 많다. 재실의 누(樓)는 묘제를 지낼 때 주로 사용되는 공간으로 문중회의와 묘제 후 음복하는 장소로 사용된다. 전사청(典祀廳)은 제사에 필요한 기구 및 제수를 보관하는 곳으로 유사실(有司室)로 연결된다. 유사실은 제수 점검, 제사절차 협의, 문중회의 주관 등을 담당하는 유사들이 거처하는 공간이다. 재실도 엄연한 건축물이기 때문에 묘지기, 산지기 등 관리인이 필요했다. 조선시대 묘·산지기는 상민이나 천민 신분으로, 재실의 문중에 신분·경제적으로 종속됐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경주 부윤(慶州府尹) 전동생은 그 첩(妾)이 죽으니, 치내(治內)에 장사하고, 또 관노(官奴)를 묘지기(墓直)로 정하였으며, 품관(品官)이 있는 인리(人吏)로 하여금 재(齋)를 베풀게 하여…'- 그러나 재실문화는 근래들어 거의 붕괴됐다. 묘직이나 산직은 경제적으로 수지가 맞지 않는다. 또 조상숭배와 동족 관념이 희박해 지면서 제사 참가율이 하락, 폐허로 변하는 재실이 크게 많아지고 있다. 이런 환경속에 우리고장 영동 용산면 율리에 송담재(松潭齋·충북문화재
단양 도담삼봉(국가명승 제 44호)은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낸 절경이다. 주변의 석회암지대는 하천과 지하수 등에 의해 모두 깎여나갔다. 지질학 용어로 용식(溶蝕) 현상이다. 반면 도담의 세 봉우리는 석회암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의 원추 모양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강 안에 '바위섬'(巖島)이 존재하는 곳은 국내에서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도담삼봉의 이같은 명승성은 역사적으로 '에피소드 공간'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것도 단색이 아닌 다원색이었다. ◇택리지도 장문으로 언급 이중환(李重煥·1690~1752)은 숙종~영조 연간을 산 인물이다. 그는 택리지에서 단양을 '들판은 없지만, 강과 시내, 바위와 골의 홀륭한 경치가 있다'(無十里野有江溪巖洞之勝世)라고 적었다. 또 '이담삼암'(二潭三巖)이라는 표현으로 단양 전체의 명승성을 함축했다. 이담은 2개의 못이라는 뜻으로 구담과 도담을, 3개의 바위를 의미하는 삼암은 상선암·중선암·하선암을 의미한다. 그는 도담삼봉에 대해 돌로 인위적으로 쌓았다는 뜻인 '석가산 같다'고 표현했다. '강물이 휘돌아 가면서 모여 깊고 넓다. 물 가운데 세 개의 돌봉우리가 각각 떨어져 한 줄로 선 것이 활줄같이 곧으며 쪼아서 새긴 것이 기이하
연산군은 폭정 만큼이나 식탐이 강했다. 맛이 있거나 몸에 좋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 즉시 진상을 명령했다. 그 대상도 짐승, 해물을 가리지 않고 다양했다. '경기감사에게 하서(下書)하기를, "해별(海鱉)·강돈(江豚)·옥복(玉腹) 각두 마리씩을 산 채로 잡아 봉진하라" 하였다.'- 인용문 중 해별은 바다자라, 강돈은 돌고래를 말한다. 옥복은 지금의 사문화돼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다만 옥돔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연산군의 식탐은 외국 것도 가리자 않았다. 당시 부산 등 남해안 지역에 일본 전복이 유입된던 모양이다. '전교하기를, "왜전복(倭全鰒)이 있다 하니, 사서 바치도록 하라. 이 물건 뿐 아니라 모든 특이하게 맛난 것은 널리 구해서 바치라" 하였다.'- 호색한이었던 연산군은 보양식에도 당연히 관심을 보였다. 이번에는 백마(白馬)가 정력에 좋다는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역시 진상을 명령한다. '전교하기를, "백마(白馬) 가운데 늙고 병들지 않은 것을 찾아서 내수사(內需司)로 보내라" 하였으니, 흰 말의 고기는 양기(陽氣)를 돕기 때문이었다'- 연산군 식탐을 길게 이야기한 것은 왕의 밥상에도 정치적인 색채가 상당 부분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충주 상모면을 지금의 수안보면으로 개명한 것은 지명의 정체성을 한껏 높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지금까지 "개명후 수안보 이미지가 훨씬 빨리 다가온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학문적으로 규명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숭의여자대학 이영희(관광과) 씨는 얼마전 '지명을 통한 장소정체성 재현과 지명역역의 변화' 논문을 한국지역지리학회지를 통해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지명을 통하면 그것이 만들어졌을 당시의 역사 환경과 과거 사람들의 사고·태도를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선(線)이 아닌 면(面)이 성격이 강했던 과거 국경선의 한계를 밝히는데 귀중한 열쇠가 되고 있다. 따라서 지명의 정체성은 '다른 장소와 차별화할 수 있는 장소의 고유한 특징' 정도로 정의되고 있다. 이씨는 이같은 개념 정의를 바탕으로 충주 수안보면이 갖고 있는 지명의 정체성을 학문적으로 연구·분석했다. 수안보면은 지난 2005년 지금의 지명으로 개명되기 전까지 줄곧 상모현이나 상모면으로 불렸다. 자연 지명은 '수안보'였으나 공식 행정지명은 '상모'로 불리면서 지명 갈등이 자주 유발됐다. 그러나 '상모현' 역사는 의외로 오래돼 고려시대부터 등장한다. '장연현: 본래 고구려의
사람에게는 인명(人名)이 있고, 땅에는 지명(地名)이 있다. 한반도 지명 분류를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은 아쉽게도 일본인 젠쇼에이스케(善生永助)였다. 그는 1935년 발간한 '조선의 취락'이라는 책에서 한반도 취락과 지명을 학문적으로 처음 분류했다. 지명은 땅에 대한 단순한 호칭같지만 그 이상의 문화·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지명은 토지에 고착된 것이기 때문에 보수성이 매우 강한 편이다. 경기도 수원의 지명에서 이같은 현상을 발견된다. 수원(水原)은 상고시대에는 매홀(買忽)로 불렸다. '매'는 '물', '홀'은 '성'을 의미한다. 지금의 수원은 고대 후기에는 수성(水城), 고려 시대에는 수주(水州)라는 지명을 갖고 있었다. 근원인 '물 水' 자는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명의 보수성은 역으로 그것이 바뀔 경우 종종 적지 않은 혼란을 초래한다. 우리고장 보은군에서 그같은 사례가 발견되고 있다. 신라는 470년(자비마립간 13) 3년의 공사 끝에 보은에 산성을 쌓았다. 바로 삼년산성으로, 보은군의 최초 이름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은 여기서 유래했다. 이후 삼년군으로 첫 개명을 하게 된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 삼년산군을 '보령'(保齡)으로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의약서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있다. 세종의 명에 의해 1433년 노중례, 유효통, 박윤덕 등이 편찬했다. 내과·전염병·외과·이비인후과·안과·산부인과·소아과·치과 등 각종 임상을 망라적으로 다루고 있어 종합 의약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향약집성방의 모든 내용이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에 앞서 편찬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跋)이라는 의약서를 꽤 많이 인용했다. 향약제생집성방은 권중화, 김사형, 김희선, 조준 등이 지은 것을 제생원(濟生院)에서 편찬했다. 당시 실력자인 권근(權近)이 이 의서의 발문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제생원의 향약집성방은 이 백성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 예천백 권상(權相) 중화仲和)와 더불어 그가 일찍이 저술한 향약방을 가지고 다시 수집을 더하여 전서의 판각을 완성하니, 장차 중외에 반포하고 영원히 전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모두 그 거주하는 곳에 따라 약을 구할 수 있고, 병중에 따라 치료할 수 있음을 알게 하고…'- 찬자 4명중 한 명인 권중화(權仲和·1322∼1408)는 개인적으로 황당한 경험을 한다. 그는 고려의 사신으로 명나라에 들어갔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홍건적이 침입하다머리에 붉은 두건을 써 이름이 붙여진 홍건족은 고려를 노략질하기 위해 1차(1359년·공민왕8), 2차(1361년·공민왕 11) 등 두 차례에 걸쳐 한반도를 침입했다. 1차 때는 평안도 함종까지 진출했으나 고려군의 반격으로 퇴각했다. 2차 때는 10만여명의 대군이 침입했다. 공민왕은 개성의 마지막 방어선인 절령(일명 자비령·개성~평양 중간)이 돌파를 당하자 남쪽으로의 몽진(蒙塵)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몽진은 왕의 피난길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본래는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공민왕 일행이 지금의 경기도 땅에 들어서자 우리고장 충주, 청주목사 등이 잇따라 알현했다. '분수원(焚修院) )에 이르니 안렴사 안종원 충주목사 박희(朴曦)가 와서 알현하고 드디어 영서역(迎曙驛 양주에 이르니 남경유수 최인원(崔仁遠), 청주 목사 김성갑(金成甲)이 와서 알현하였다.'- ◇충주를 경유하다 고려 수도인 개성은 공민왕이 이천현을 경유할 때 홍건적에게 완전히 함락됐다. 이때 천인공로할 만행이 저질러졌다. '우설(雨雪)이 내리는데 어가가 이천현에 이르니 어의가 젖어 얼어서 섶을 태워 스스로 따뜻하게 하였다. 이날에 적이 경성을 함락하고 유
고려시대 천민계급이 하나로 양수척(楊水尺)이 있다. 달리 수척(水尺)·화척(禾尺)·무자리라고도 불렀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후삼국시대 압록강 밖으로 망명했던 후백제 잔민, 여진 또는 거란 계통의 북방 귀화인 설 등이 있으나 아직 정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없다. 양수척은 떠돌이 생활을 하며 도살, 광대 등의 직업을 갖는 등 한반도 집시처럼 살았다. 특히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왜구(倭寇)로 가장, 민가와 관청을 노략질 하기도 했다. 또 거란군이 고려에 쳐들어올 때 그 앞잡이 노릇을 하는 등 그 이미지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양수척은 조선시대에도 고민거리였다. 세종대왕이 온건책을 내놓았다. 명칭도 이때부터 지금도 사용하는 백정으로 바뀌게 된다. '병조에서 계하기를, (…) 비옵건대, 칭호를 백정(白丁)이라고 고쳐서 평민과 서로 혼인하고 섞여서 살게 하며, 그 호구를 적에 올리고, 경작하지 않는 밭과 묵은 땅을 많이 점령한 사람의 밭을 나누어 주어서 농사를 본업으로 하게 하고…'- 세종이 온건책만 구사한 것은 아니었다. 강경책도 병행했다. 누범으로 개전의 정이 뚜렷하지 않은 양수척에 대해서는 극형을 마다하지 않았다. '형조에서 아뢰기를, "백정 약로(若
1394년(태조2) 6월 14일 갑자기 대간과 형조에서 올라온 상소 한 장이 궁궐 분위기를 삽시간에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대신들이 내시 이만(李萬)이 남대문 밖에서 목이 달아나고 세자빈궁 현빈유씨가 자기 집으로 쫓겨난 이유가 무엇이냐고 왕에게 묻는 대목이 나온다, '대간과 형조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가만히 보건대 내수(內竪) 이만(李萬)이 참형을 당하고, 현빈 유씨(柳氏)가 내쫓겨 사제로 돌아갔으나, 나라 사람들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하여 의심하고 두려워함이 그치지 않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좌우(左右)의 친근한 사람을 법사에 내려 국문해서 나라 사람들의 의심을 없애게 하소서."'- 이에 대해 태조 이성계는 이들을 다짜고짜 순군옥에 가둬버렸다. 순군옥(巡軍獄)은 고려시대 도적질이나 난을 일으킨 사람을 잡아 가뒀던 곳이다. 이 순군옥은 조선 초기까지 유지되다가 태종 14년 의금부로 대체됐다. 모두 7명의 신하가 갖혔다. '임금이 노하여 우산기 상시 홍보(洪保)·좌습유 이조(李·)·사헌중승 이수·시사 이원(李原)·형조정랑 노상(盧湘)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었다.'- 조선시대가 일인지하의 전제정치로 흐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왕권을 견제하
◇일제 강점기 서양력을 채택한 일제는 한반도 백성들에게도 양력 1월 1일에 설을 쇨 것을 강요했다. 이른바 신정(新正)이다. 그러나 일제가 추석문화에도 간섭했는가 여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민족의 강점이 계속 되면서 이 땅 백성들의 삶은 훨씬 팍팍해졌고, 따라서 추석명절을 즐길 만큼 여유를 갖지 못했다. 1930년대 '추석 명절을 부흥하라' 제목의 사설이 등장했다. '이십년래로 점점 쇠퇴하는 명절이 인제 와서는 거의 形骸만 남기고 말앗다. 새옷닙고 머리빗고 질겁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조차 점점 업어지고 니른바 명절기분이라는 것이 아조 업서지고 말앗다.(...)청풍명월에 新酒에 취하고 新餠에 飽하는 것이 엇더케나 큰 惡이랴.'- 농촌의 사정은 더욱 열악했다. 벼가 누렇게 익기 전에 논벼에 대한 차압이 들어왔다. 이른바 빚을 받아내기 위한 '입도차압'이다. 이는 자금 수요가 많은 추석을 전후해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아직도 나락은 청색 그대로이며 황색으로 변하기까지는 요원한대(...). 이때가 아니면 농촌에서 빗받기는 심히 곤란한지라 허둥지둥하여 수속을 하지만 개중에는 아주 악독하고도 고약한 채귀들의 발호도 여간아닌 모양인데 가장 공포와 우울을 갖는 요때의 빗
마패(馬牌)는 중앙 벼슬아치가 공적인 업무로 지방 출장을 나갈 때 역마(驛馬)를 징발할 수 있는 징표를 말한다. 한쪽 면에 연호·연월일과 '상서원인(尙瑞院印)', 또 다른 면에는 가용할 수 있는 말의 수를 새겼다. 상서원은 옥새와 병부 등 여러가지 패를 관리하던 곳으로 6부 중 이조에 속했다. 암행어사와 마패는 눈익은 조합이다. 역졸이 마패를 들고 '암행어사 출두'라고 크게 외치는 모습이 사극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조선시대 마패법 실시를 처음 건의한 인물은 이응(李膺·1365∼1414)이다. '마패법을 세워 아뢰었다. 병조 판서 이응이 아뢰었다. "처음에 마패를 상서사(尙瑞司)에 속하게 하여 이를 무겁게 하였으나, 이제 정부에서 포마(鋪馬)를 발하는데…."'- 그는 장수하지 못하고 50나이에 졸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유난히 길(路)과 관련된 업무를 많이 처리했다. 마패가 땅길에 관련된 것이라면, 세곡(稅穀) 운반은 물길과 관련이 깊다. 실록에는 이응이 물길과 세곡을 함께 언급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조선 초기에는 경상도 세곡을 남해, 서해 등을 거치는 해로 운송을 택했다. 예나 지금이나 해로 운송은 거센 바람이 문제가 된다. 경상도의 조운선 34척이
도로 중앙 분리대가 차량의 중앙선 침범을 차단하는 것 외에, 운전자 과속운전을 예방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충북대 이순철(심리학과·사진) 교수가 얼마전 '중앙분리대의 형태가 운전자의 주관적 속도에 미치는 영향' 제목의 논문을 한국심리학회지에 발표했다. 중앙 분리대는 양방향으로 주행하는 차량을 분리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말 그대로 도로 중앙에 설치된 시설물을 말한다. 교통 시설면으로는 차랑의 중앙선 침범을 예방하고, 또 차선이탈을 방지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현재 국내 도로에는 가요성 방호 울타리(일명 가드레일)와 콘크리트 중앙분리대가 가장 많이 설치돼 있다. 전자는 국도, 후자는 고속도로 노면 위에서 주로 관찰된다. 그러나 이 교수의 연구 결과, 중앙 분리대는 중앙침범 차단 외에 운전자 과속 운전을 사전 예방하는데도 큰 효과를 지닌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콘크리트 중앙 분리대보다 가드레일의 효과가 더 뛰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이 교수는 운전 경험이 있는 1백명을 선발, 이들이 △가드레일 △콘크리트 중앙분리대 △단순 중앙선 노면 표시 구간 등을 통과할 때 느끼는 '주관적 속도감'을 측정했다. 주관적 속도감은 차량 계기판이 아닌 주변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