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충북지역의 항일운동은 당시 지역 신문기자들이 주도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공동 주최하는 '충북지역 독립운동사의 재조명' 학술회의가 27일 오후 충북대 인문대학에서 열린다. 이날 학술회의에는 장승순(충북대), 박걸순(〃), 김민호(단국대) 씨 등이 등단, 각각 '일제하 충북지역의 신간회운동', '유자명의 자료 현황과 새로 발굴한 手記의 성격', '이범석의 생애와 독립운동' 등의 주제를 발표한 예정이다. 먼저 미리 입수한 발표문에 장씨(박사과정)는 △충북지역 신간회 조직은 1927넌 설립되기 시작했고 △그 주축은 당시 신문기자들이었으며 △이들은 이른바 '호서기자단' 소속이었다고 밝혔다. 신간회(新幹會)는 1920년대 활동한 대표적인 항일단체로 좌익과 우익이 합작했다. 충북출신 신채호(청원), 권동진(괴산) 등도 34명 발기인의 한 명으로 참여했다. 장씨는 이에 대해 "1927년 11월 괴산지회 설립을 시작으로 음성, 청주, 진천, 충주지회 순으로 설립됐다"며 "영동은 준비위원회까지 구성됐으나 일제의 방해로 설립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당시 신간회 설립을 주도한 세력은 지역의 청년회
'토종 여우가 불법엽구에 부상을 안 당했으면 여우우는 단양을 기대할 수 있었는데…'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법 엽구(獵具)를 설치행위는 도리어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같은 현상에 대해 계속되고 있는 서민들의 경제난과도 관련이 있다는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최근 국립공원소백산 단양 사면에 방사된 토종여우 수컷이 창애(덫의 일종)에 의해 다리 부상을 입은 것과 관련해 지난해까지의 단속 실적을 발표했다. 그 결과, 창애(덫 포함), 올무, 뱀그물 등의 불법엽구 수거 실적이 4년 전이 2007년에 비해 대부분 2배 가량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거실적과 설치행위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으나, 밀렵이 줄지 않고 도리어 성행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창애는 지난 2007년에는 전국적으로 628개가 수거됐으나 지난해에는 거의 2배에 가까운 1천126개가 회수됐다. 창애는 충청도에서는 '차우' 또는 '차구'라고 불리는 것으로, 그 용도에 따라 노루창애, 너구리창애, 쥐창애 등으로 불리운다. 올무는 그 정도가 더 심해 2007년에는 1만417개가 회수됐으나 지난해에는 2배가 넘는 2만4천436개가 수거됐다.
조선시대에는 죄인을 가두어두는 곳을 감옥(監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냥 '옥'(獄)이라고 불렀다. 감옥은 일본식 표현으로, 갑오경장 무렵 국내로 들어오면서 우리말 '옥'을 물리치고 대중성을 획득했다. 전옥서(典獄署)라는 관청이 이 조선시대 옥을 총괄했다. 그러나 전옥서라는 명칭은 고려의 것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개국 직후부터 벌써 그 이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전옥서는 수도(囚徒)의 일을 관장하는데, 영(令) 2명 종7품이고, 승(丞) 2명 종8품이고, 사리(司吏) 2명이다.'- 조선시대 옥에 대한 정보는 문헌 외에 의외로 고지도에 다수 남아 있다. 구한말이 되자 서구열강 세력이 밀물 듯이 몰려왔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이에 대한 대비책의 일환으로 전국 군현에 지도를 그려올리도록 지시했다. 이른바 1872년 군현지도이다. 흔히 말하는 수령은 군수와 현령의 준말로, 달리 사또 또는 원님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수령은 행정, 군사 외에 사법권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전국의 모든 군현 주변에는 옥이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1872년 군현지도에는 청주와 충주목 그리고 영동·청산·청풍현 등 5개 목현에만 옥이 그려져 있다. 왜 이같이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나무 판자·무기 또는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르지 못하였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습니다.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첨사 이영남 등 10여 명이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1598년(선조 31) 이순신 장군이 우리고장 진천출신 이영남 등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유탄을 맞고 전사했다. 이는 그날의 전투가 생각보다 격렬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인물이 이시언(李時言·?∼1624)이다. 현재 남해안 일대에는 이순신과 관련된 고건축으로 여수 진남관과 충무공 사당인 충민사 등이 남아 있다. 바로 이시언이 세운 건물로 진남관은 국보 제 324호, 충민사는 사적 제 3891호로 지정돼 있다. 그는 또 삼도수군의 사령부를 가배량(加背梁·현 거제도)에서 통영으로 이전한 인물이기도 하다. 통영 시민들은 삼도수군통제사가 있었던 것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다. 따라서 시의 이름을 '충무'에서 '통영'으로 개명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이시언이 수군로서만 활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남해안으로 가기 전에 우리고장 충청도 병사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 '병사'는 지금으로 치면 향토사단장 쯤이 된다.
청주-조치원 사이에 영업용 자동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14년 4월이었다. 그러나 첫 영업자는 내국인이 아닌 일본인 織居加一이었다. 그는 경무부 허가를 받아 매일 2회씩 청주와 조치원 구간에 영업용 승용차를 운행했다. 이후 이 일본인은 재미를 봤는지 '조선자동차운전회사'라는 여객운수회사를 차려 청주를 중심으로 괴산. 미원,진천 등에도 정기적으로 왕복하는 영업용 자동차를 배차했다. 청주-충주간은 처음에는 여객의 왕래가 적어서 승객의 수요에 따라 부정기적으로 운행했다. 그러나 얼마안가 승객이 점차 늘면서 짝수일에 1회씩 정기 운행을 개시했다. '청주 연혁지'(1923년 출간)를 쓴 오꾸마쇼지라는 일본인은 책에서 청주-조치원 신작로와 함께 주변도 설명했다. 그 내용이 다소 이채롭다. '고문경찰시대에 조치원 도로가 개수되어 겨우 도로다운 형태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거의 중앙에 해당하는 지점에는 하나의 당우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지역에 덕망이 높은 인격자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당우의 비석은 그 사람의 덕을 칭송하고 있다.' 당우와 당우의 비석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수의동에 위치한 송상현 사당과 신도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조선후기 임금들은 지방을 통치를 하는데 있어 이른바 '충청도 양반' 때문에 골치를 많이 앓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역사학에서는 국왕보다 재지사족(향촌 사대부)의 영향력이 더 크게 먹혔던 지역을 이른바 '난치읍'(難治邑)이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 후기의 난치읍 현상은 경상도 안동과 한양과 가까운 경기도 여주·광주 등에서 많이 나타났다. 경상도 안동의 사대부들은 인조반정 이후 집권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게 되자 서원(書院), 계 등을 만들어 '우리끼리 잘 살아보자' 식으로 단결·단합했다. 이들이 워낙 강한 배타성을 나타내다 보니 감사(오늘날 도지사)와 수령의 영(令)이 먹히지 않으면서 난치읍의 이미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경기도 광주와 여주 지역은 한양과 가까운 근기(近畿) 지역인 까닭에 사대부들의 묘가 대거 조성됐다. 그러다보니 묘지소송(일명 산송)이 많이 발생하면서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난치읍)이 되기 시작됐다. 그러나 안동과 근기 두 지역보다 난치읍의 이미지가 강했던 곳은 지금도 그 소리가 남아있는 양반의 고장 충청도였다. 당시 사대부 중에는 호서(충청도) 출신이 적지 않았고, 또 일부는 경화벌열이 돼 충청도에 농장을 갖기 시작했다. 경화벌열은 향촌
전회에 경부선 역이 한적한 마을인 조치원에 들어서면서 조치원이 크게 발전하게 된다고 밝힌 바 있다.조치원은 청주와 사이에 신작로 개설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된다. 신작로(新作路)는 말 그대로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고 새롭게 낸 길을 이르는 말이다. 소설가 박태순은 '무너지는 산'에서 신작로를 실감나게 표현했다. '시냇물은 이제 그 양편에 축대를 쌓아 하수천이 되었고 소달구지가 지나다녔을 오솔길은 자갈로 다져진 신작로가 되어 버스가 경적 소리를 내며 달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당시 신작로가 바탕이 된 지금의 청주-조치원 국도는 비교적 반듯한 편이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조치원과 청주를 잇는 신작로 노선으로 2개 안을 검토했다. 하나는 지금의 노선이고, 또 하나는 미호천 둑을 따라 보다 북쪽으로 청주를 연결하는 안이었다. 일제는 검토 끝에 지금의 노선을 택하고 1910년 10월 신작로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6월에 완공했다. 신작로가 들어서기 전의 구한말 우리나라 도로 사정은 불문가지였다. 이방인의 눈에도 조선의 길은 '스스로 그렇게'(自然) 생긴 길이었다.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여사가 1890년대 한국을 찾아 이런 기행문을 남겼다. '한국의 도로는 인공적
속보= 소백산 국립공원의 북쪽사면(충북 생활권)에 방사된 수컷 토종여우는 암컷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첫 방사지 주변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따라 종복원기술원(원장 권철환)은 내년 3~4쌍을 다시 방사할 계획이다. 종복원기술원 정철운 센터장과의 전화통화 내용이다. - 수컷의 동태가 궁금하다. 암컷과 헤어져 혼자가 됐는데 정상적인 먹이활동을 하고 있나. "처음 방사된 곳(경북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 161)의 1~1.5㎞ 반경을 떠나지 않으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낮에는 계곡 깊숙한 곳에 들어가 숨고, 밤에는 활발히 돌아다니며 먹이활동을 하는 것이 무선추적을 통해 계속 포착되고 있다. - 수컷 토종여우가 첫 방사지 부근을 떠나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수 있나. "여우의 주먹이원은 쥐같은 설치류이다. 사전 조사를 했을 때 첫 방사지 주변은 설치류의 서식밀도가 매우 높게 나타났던 곳이다. 수컷 토종여우도 이를 알기 시작한 것 같다. " - '부부'가 될 줄 알았던 암·수컷 두 토종여우가 왜 헤어졌는지 궁금하다. 일반인이 잘 모르는 여우만의 습성이 있는가. "여우는 암수가 항상 붙어다니지 않는다. 겨울에 교미하고 봄에 가족을 만드는
겨울철새이자 천연기념물(제 243호)인 독수리의 이동 경로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규명됐다. 15일 문화재청은 지난해 12월 경기 파주에서 조난됐다가 구조된 5마리의 독수리중 1마리가 몽골고원으로 갔다가 월동을 위해 처음 조난지로 다시 되돌아왔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당시 조난된 5마리의 독수리에게 국내외 이동과 서식지 이용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GCT-B2로 불리는 위치추적 장치를 각각 부착했다.그 결과, 올봄 방사된 5마리 중 '3281번 독수리'가 북한 청천강(4월 15일)→중국 랴오닝성(5월 5일)을 거쳐 최대 번식지인 몽골고원에서 여름을 나고 최근 파주로 다시 귀환했다. 이를 수치로 환산한 결과, '3281번 독수리'는 직선거리로는 1천700km, 또 하룻동안에 많게는 340km를 이동한 것으로 나타났다. 독수리의 이동 경로와 그에 따른 시간 소요가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앞으로 독수리의 월동 시기별 행동 특성과 번식·서식지 정보 획득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독수리뿐만 아니라 큰 대형 조류인 큰고니, 저어새 등도 이동 경로 모니터링을 수행하여 천연기념물 보호관리 정책에 반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조혁연 대기자
보은 회인은 지금은 면(面) 단위에 불과하지만 고려시대 때는 현(縣)이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도 그 행정적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의 대전시 회덕에 짧은 기간 예속된 적이 있다. 회덕, 회인할 때의 '회'는 한자 '품을 懷'(회) 자다. 두 지역의 지명을 직역하면 회덕은 '덕을 품는다', 회인은 '인을 품는다'라는 뜻을 지닌다. 이른바 유교식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두 지역이 한때 친족 관계였던 것을 의미한다. 실록 지리지에 그 내용이 들어있다. "고려가 회인으로 고치어, 현종 9년에 청주 임내에 붙였다가, 뒤에 회덕 감무로써 회인을 겸임하였다."- 인용문 중 '회덕 감무로써 겸임했다'는 뜻은 회인이 회덕 현감의 행정적 지휘를 받은 것을 뜻한다. 회인은 이같은 부침을 무릅쓰고 부군 통폐합 조치가 있던 지난 1914년까지 현의 지위를 유지했다. 회인에는 호점산성(虎岾山城)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성이 있다. 호점을 글자 그대로 풀면 '호랑이 고개'라는 뜻이 된다. 구한말까지 호환(虎患)이 존재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여름철에는 방입구에 그물을 치고 잘 정도였다. 계곡이 깊고 산이 높은 회인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강원도 산골에는 아직
7. 조슈대포(長州大砲), 시모노세키에서 서양군함을 포격하다 일본은 끊임없이 내전을 치룬 실전의 나라였다. 축성할 때에도 실전 경험을 반영해서 커다란 돌로 살벌하게 성벽을 쌓았다. 중요 성내 건물의 방어 구조를 보면 끔찍하기조차 하다. 야마구치시 하기에는 외부 침입자를 몰아넣는 T자형 길과 막다른 골목이 있다. 실전 경험에서 나온 함정이었다. 일본에선 실전에 필요하면 무엇이든 즉각 확보해서 응용했다. 1543년 규슈 남부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류한 중국배에 철포(鐵砲, 화승총)를 가진 포르투갈 상인이 타고 있었다. 섬의 영주인 토키타카(時堯)는 놀라운 무기로 판단하여 거금을 주고 철포 2정을 구입해서 복제에 성공했다. 경이로운 속도로 보급된 이 철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일과 1592년 조선 침략의 원인이 되었다. 유럽에서 이양선이 오자 조선의 조정은 걱정만 하고 대처 방도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각 번이 경쟁하던 일본에서는 금방 서양의 무기를 배웠다. 서양식 대포를 제조한 것은 실전에서 나온 노력의 성과였다. ■ 한일 간 군대와 무기 관심도 한국에서 군대의 역사와 무기의 발달사는 교양의 영역에서 비켜나 있다. 국가와 사회사에서 군대가 갖는 비중이 매우
조치원을 가리켜 흔히 '충북같은 충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만큼 청주를 생활권으로 하는 사람이 많고 역사적으로도 청주와 인연이 깊다. 지금의 전의지역은 940년(고려 태조 23) 청주목 소속이었고, 연기현은 1018년(고려 현종 9) 청주에 영속된 사례가 있다. 봉수도 청주의 것을 받았다. '봉화가 1곳이니, 현의 남쪽 용수산(龍帥山)이다. 동쪽으로 청주 저성(猪城)에, 서쪽으로 공주 독성(禿城)에 응한다.'- 최근 조치원에서 '조치원역'을 '세종역'을 바꾸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조치원도 당연히 세종시에 속하고 있다. 그러나 세종시의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개명을 통해 조치원역을 세종시의 관문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지금은 연기군청이 조치원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연기현 치소는 지금의 조치원읍이 아닌 다른 곳에 위치했다. 조치원읍에서 남쪽 삼십리 되는 곳에 연기군 남면 연기리가 있다. 바로 이곳에 연기현의 치소가 위치했다. 역사도 비교적 오래 돼 백제시대부터 조선말까지 이곳의 현의 중심지였다. 그러다가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고, 그리고 조치원에 역이 생기면서 군청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이
조선시대 충주 이홍윤 옥사 사건으로 인해 한 달 사이에 능지처사를 당한 사람은 28명, 고문사한 백성은 8명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능지처사를 당한 사람들 중에는 그 가족도 연좌제에 따라 교수형을 당한 사람도 적지 않아, 당시 극형을 당했던 충주 사람은 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정됐다. 이홍윤 옥사는 명종대의 훈구파가 이홍남·홍윤 형제의 개인적인 다툼을 이용해 충주사림을 해체하려 했던 사건을 말한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얼마전 '충주지역 유학전통과 사림의 역할' 주제의 특강을 충주문화원에서 가졌다. 강사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 박홍갑 박사로, 그는 '충주사림'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명종실록에는 앞서 언급한 이홍윤 사건과 관련해 '충주고을 전체가 온통 텅비었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사신은 논한다. 이 옥사에 연루되어 주륙(誅戮)당하거나 귀양간 자가 무려 40∼50인에 달하여 충주(忠州) 전체가 온통 비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이홍남이 꾸며낸 일이었다. 그런데 이홍남이 자손을 둔 것이 어찌 천도(天道)이겠는가.'- 이와 관련해 박 박사가 실록 행간을 보다 자세히 분석한 결과, 당시 혐의를 받고 추국장으로
멸종위기종 2급 이상의 희소성을 지닌 '작은관코박쥐'(학명 Murina ussuriensis)가 충북 제천에서 80여년만에 발견됐다. 이에 따라 충북 백두대간은 종 다양성이 가져다 주는 생태성 이미지를 더욱 높일 수 있게 됐다. 환경부 산하 국립환경과학원이 2011년 실시한 '국가장기생태연구사업'에 대한 연구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 환경과학원은 전국 생태 전문가 3백여명이 참여, 지난 2004년부터 담수, 연안, 육상, 동물 등 4개 분야의 기후 변동에 따른 동·식물의 생태 변화를 연구해 오고 있다. 이 연구는 2013년까지 계속 된다. 그 결과, 80년 만에 충북 제천에서 멸종위기종 2급인 '작은관코박쥐'(일명 쇠뿔박쥐)의 서식을 확인했다고 과학원측은 밝혔다. 개체수는 수컷 2, 암컷 1 등이다. 작은관코박쥐는 지난 1931년 한반도에 서식한다는 기록이 있었을 뿐 남한지역에서는 관찰되지 않아왔다. '작은관코'라는 독특한 표현이 들어간 이 박쥐는 코가 그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데서 이름이 지어졌다. 작은관코박쥐는 콧구멍이 관모양으로 주둥이 끝까지 돌출돼 있으면서 양옆으로 열린 모습을 하고 있다. 이밖에 이 박쥐는 △머리~몸 4~5㎝ △꼬리 2~3㎝ △팔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당시 경상우수영는 원균(元均·1540∼1597)이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왜수군과의 전력차가 너무 심하자 배를 불태운 후 육지로 도망하려 했다. '왜병들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대적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전함과 전구를 모두 물에 침몰시키고 수군 1만여 명을 해산시키고 나서 혼자 (…) 육지를 찾아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이때 원균을 붙잡아둔 인물이 부하 이운룡이다. 그는 원균의 앞을 가로 막으며 "장수는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며 눈물로 호소했다. '사또가 나라의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상 관할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이곳은 바로 양호(兩湖)의 요해처로서 이곳을 잃게 되면 양호가 위태롭다. 지금 우리 군사가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모을 수 있으며 호남의 수군도 와서 구원하도록 청할 수 있다.'- 원균을 결국 경상우수영을 버리지 못했다. 대신 이운룡의 건의대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과 '연합함대'를 구성하기로 했다. 그러나 상대 진영의 전체 동의가 있어여만 가능한 연합함대 구성은 쉽지만은 않았다. 이때 양진영을 오가며 청병사절 역할을 한 인물이 이영남(李英男·1563∼1598)이다.
지난달 31일 국립공원내 백두대간 서쪽사면(충북 생활권)에 방사됐던 토종여우 1쌍 중 암컷이 6일 국립공원을 벗어난 경북 영주시 부석면 임곡마을 민가에서 발견됐다. 이는 당초 "방사된 토종여우는 방사지 근처에서 적응기간을 거칠 것"이라는 생태 전문가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특히 수컷과 떨어져 왜 그렇게 멀리 이동했는지 여부가 전문가들의 최대 궁금증이 되고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종복원기술원 정철운 센터장과의 전화통화 내용이다. - 토종여우 폐사체가 발견된 곳이 단순히 민가인가, 아니면 민가의 아궁이인가. "민가의 아궁이에서 발견됐다." - 민가 아궁이는 잔열이 있는 따스한 곳이다. 혹시 낮아진 기온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닌다. "그럴 개연성을 배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우는 원래 굴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다. 사인을 정확히 규명하기 위해 사체에 대한 부검을 실시할 예정이다." - 이번에 여우가 방사지에서 직선거리로 5㎞ 이동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 곡선 이동거리는 훨씬 더 길은 것 아닌가. "당초 예상과 달리 백두대간을 넘어 동쪽 사면 여러 곳을 지그재그로 오가는 등 이동거리가 무척 길은 편이다. 이는 당초 예상을 크게 빗나가는 것으로 이 과정에
우리고장 진천에서 가장 오래 된 성씨의 하나는 상산임씨다. 중시조는 임희(林曦)는 고향에서 이름을 딴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지기도 했다. 많이 알고 있듯이 상산은 진천의 별칭이다. 따라서 지금고 상산임씨와 진천임씨라는 표현이 함께 쓰이고 있다. 상산이 진천의 별칭이었다는 사실은 신라말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의 하나인 문경 희양산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비문에 처음 등장한다. 비문에 '상산의 혜각(慧覺)은 진주(지금의 진천)의 김(金)'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혜각이라는 스님이 진천 상산의 어느 절에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산은 이후 고려사, 세종실록 등 여러 지리지에 자주 등장한다. '충경왕 10년 기사에 또 지의령군사로 승격시켰다가, 임연(林衍)이 베임을 당하게 되매, 진주 감무로 강등하였고, 본조 태종 13년 계사에 예에 의하여 진천 현감(鎭川縣監)으로 고쳤다. 별호는 상산(常山)이다.'- 조선시대 각 고을은 그 읍치를 정할 때 풍수적인 원리를 철저하게 따졌다. 따라서 당시 각 고을은 주산(主山)과 안산(案山)이 있고 그 사이를 하천이 흐르는 모습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이때의 안산은 '책상다리 案' 자로 무릎을 꿇고 주산을 맞이한다는 의미다.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은 '어제'와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충돌했다. 그럴적마다 그 아들은 유교적 정신주의와 물질문명의 틈바구니에 끼여 늘 신음했다. 소설 '만취당기'(晩醉堂記)의 작가 김문수(金文洙) 씨가 5일 별세했다. 향년 73세. 충북 청주가 고향으로 청주고를 나온 고인은 동국대 국문과에 재학중이던 지난 6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이단부흥'(異端復興)이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지난 1989년 제 20회 동인문학상(조선일보 주관)을 수상, 그의 작가 인생에 정점을 찍었다. 이외 그는 장편 '환상의 성', '바람과 날개', '어둠 저쪽', '안개지대', '서러운 꽃' 외에 수많은 중·단편을 발표하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김선학 씨는 고인의 이런 작품을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아픔을 정확하게 이야기로 엮어내는 작가"라고 평했다. KBS는 지난 1991년 'TV문예극장'을 부활할 때 그의 작품 '만취당기'를 첫번째 작품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의 글인생은 처음에는 신문으로 시작했다. 그는 충청일보 성안길 시절에 문화부에서 처음으로 펜을 잡았다. 충북 언론사에 있어서 '제 1호 문화부' 기자인 셈이었다. 그는 몇해전 옛글을 인용, 산림
청안은 현(縣) 즉 지금으로 얘기하면 군청 소재지가 있던 곳이다. 청안은 지금은 일개 면소재지에 불과하나 구한말까지도 현세가 비교적 당당한 편이었다. 얼마전 음성현이 한때 청안현에 예속된 적이 있다고 밝힌바 있다. 그 정도였다. 이것 외에도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가 개편되기 전까지 지금의 증평읍을 비롯해 도안면, 청원군 북이면 그리고 지금의 오창읍 일부 등도 모두 청안현에 속했었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가 증평면을 만드는 과정에서 현의 지위를 잃고 괴산군에 편입되는 운명을 맞았다. 그러나 바로 청안면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1914년은 우리나라 행정사에서 가장 굵은 마디가 형성된 해가 된다. 이 해에 청안군 읍내면과 동면 전부 그리고 북면의 일부가 합쳐져 괴산군 청당면(淸塘面)이 만들어진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17년에 그 이름이 청안면(淸安面)으로 바뀌었다. '청안'이 한 때 '청당'으로 불려진 것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청안현'을 이렇게 적었다. '청당현(靑塘縣)은 고려 초에 본래 청주(淸州) 임내에 붙여 일명 청연(靑淵)이라 하였는데, 뒤에 감무(監務)를 두어 도안(道安)을 겸임하게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15
'저자는 섬돌 하나를 얹은 기분이라고 했지만, 앞으로의 충북 독립운동사 연구는 이 책을 반드시 통과의례로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가 최근 '충북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책을 국학자료원 이름으로 출간했다. 지금까지 충북의 독립운동사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소수의 연구가들에 의해 단편적, 사건 중심적으로 저술돼 왔다. 그것도 '지역이 민족사의 중심이 된 적도 있었다'라는 시각이 아닌, 거의 중앙사의 하부개념으로 다뤄진 경우가 많았다. 박교수의 이번 저술은 그런 아쉬움에 대한 '지역사는 중앙사를 귀납적으로 체계화시켜주는 대상'임을 하나하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서문에서 '지난 90년대부터 충북의 독립운동사를 써왔고, 이를 논문 15편을 중심으로 다시 구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구성은 과거 글을 단순히 글모음한 것이 아닌, 새로운 고증과 해석을 바탕으로 논지를 수정한 경우도 더러 있다. 그는 당초에는 청원출신 한봉수를 '진위대 출신 의병장'이라고 밝혔으나 이번에 '평민출신 의병장'으로 수정했다. 680여쪽 분량의 방대한 이번 저술은 '충북지역의 독립운동'(제 1부), '충북인의 독립운동'(제 2부), '신채호의 독립운동과 역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충북북부 지역의 남한강수계→백두대간을 거쳐 경상도 북부지방으로 확산된 것으로 밝혀졌다. 5일 동국문화재연구원(대구 소재)은 "경북 영주시 가흥-상만간 우회도로 공사구간에서 청동기 마을유적과 함께 대부소호(臺附小壺·일명 굽달린 작은 호), 무문토기, 반달돌칼, 돌도끼 등의 유물을 수습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연구원측은 청동기 전기 유물인 대부소호가 고고학 발굴 사례중 경상도 북부지역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점을 주목했다. 지금까지 국내 선사 고고학자들은 경상도 지역의 청동기 문화 시작을 △태백산맥 동쪽 사면으로의 유입 △남해안을 통한 북쪽 이동 △백두대간 서쪽으로부터의 유입 가능성 등을 제기해 왔다. 그러나 이번 발굴로 경상도 지역의 청동기 문화가 충북북부 지역의 남한강수계→백두대간 등의 루트를 통해 기원전 10~8세기 쯤에 경상도로 확산됐음이 확인됐다. 따라서 마지막 선사시대인 청동기시대에도 이미 충북의 남한강 수계와 백두대간 고개가 문화전파의 교통로 역할을 했다는 추정이 가능해지게 됐다. 동국문화재연구원 차순철 실장은 전화통화에서 "대부소호는 충북 충주 조동리, 단양 수양개, 원주 등 남한강수계 인근에서 주로 발견되던 청동기 전기의 토
충북도내 수계중 겨울철새가 가장 많이 날아드는 곳은 남강한의 충주 앙성 수계인 곳으로 조사됐다. 뿐만 아니라 앙성 수계에서는 가장 다양한 종류의 겨울철새가 관찰돼, 도내 최고의 겨울철새 서식환경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환경부 산하 국립생물과학관이 2011년 1월 21~23일 사이에 실시한 '겨울철 조류 동시 센서스' 결과를 얼마전 내놨다. 국립생물과학관은 92개팀 183명으로 조사요원을 구성, 망원경과 쌍원경 등을 이용해 전국 192곳의 수계를 관찰했다. 도내에서는 남한강 충주-여주, 대청호, 진천 백곡저수지, 초평저수지, 괴산호(칠성댐), 충주호, 미호천 등 7곳이 조사 대상에 올랐다. 그 결과, 지난 겨울 도내 수계 중에서 겨울철새가 가장 많이 찾아온 곳은 비내늪이 위치한 남한강의 충주 앙성수계 일대로 총 1만1백여마리가 관찰됐다. 이는 전국 24위에 해당한다. 또 남한강 앙성 수계에서는 전체 73종의 겨울철새가 관찰됐다. 이는 도내 최다일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3위에 해당한다. 이밖에 남한강 앙성수계 일대에서는 흰꼬리수리, 참수리 등의 1급 멸종위기종과 큰고니, 큰기러기, 호사비오리, 독수리, 참매, 말똥가리, 흰목물떼새 등 2급 멸종위기종이 동시에
도내 기초단체의 막내는 증평군(曾坪郡)이다. 2003년 8월 30일 군청이 정식으로 개청됐다. 지금의 증평지역은 고려시대에는 도안현,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주로 청안현에 속했다. '증평'이라는 지명이 처음 생겨난 것은 일제 강점기 때인 1914년이었다. 일제는 이때 청안군 일부지역과 청주군 산외이면 일부지역을 합쳐서 '증평면'이라는 새로운 면을 만든 후 괴산군에 편입시켰다. 따라서 증평이라는 행정지명은 올해로 98년을 맞고 있는 셈이다. 증평이라는 행정지명은 의외로 '증'과 '평'이 두 글자가 합성된 지명이다. 먼저 증평할 때의 '증'은 현 삼기천(三岐川)의 옛이름인 증자천(曾子川·혹은 증천)에서 유래했다. 증평군 동편 하천인 증자천은 초정고개, 송오리고개, 반탄천 등 세 갈래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현재 이름이 삼기천이다. 이 삼기천은 여지도서나 대동지지에는 한자 '일찍이 曾', '아들 子'인 '증자천'으로도 표기돼 있다. 증평 할 때의 '증' 자는 여기서 왔다. 나머지 '평' 자는 들(野)과 관련이 있다. 증평에는 '장평리'라는 마을이 있다. 순우리말로는 '장뜰'이라고 한다. 증평할 때의 '평'은 바로 '장평'할 때의 뒷말 '평'에서 유래했다. 장뜰 할 때
환경부가 멸종위기 1급 동물인 토종여우(학명 붉은여우) 암수 1쌍을 먹이자원이 풍부한 소백산국립공원 일원에 31일 방사했다. 이와 관련 환경부가 방사 장소를 절묘하게 선택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환경부는 지난해 토종여우 복원사업을 소백산 일대에서 한다고 발표했으나 토종여우 종복원 기술원이 들어선 곳은 경북 영주시 풍기읍이었다. 이에따라 소백산맥의 북쪽 사면에 위치한 단양군을 포함한 충북도민은 적지 않은 불만과 함께 소외감을 표출해 왔다. 이날 토종여우가 방사된 장소도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 161'로 행정상 경북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마락리 161'은 백두대간 북쪽 사면에 위치하기 때문에 생각없이 지나치면 '충북땅'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곳이다. 또 마락리 주민들은 고치령이 해발 670m로 높고 험하기 때문에 단양군 영춘면 의풍을 생활권으로 하고 있다. 고치령은 평소에도 승용차를 제외한 버스 왕래는 불가능하고, 또 눈이 조금만 와도 통행이 금지되는 백두대간 준령이다. 따라서 환경부가 단양 등 충북의 불만을 의식, 최종 방사 장소를 백두대간 북쪽 사면으로 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생태학자들은 토종여우의 서식반경이 대략 12㎢라고 밝히고 있다.
태조 연간에 조준이 올린 상소문에 이런 표현이 보인다. '경제육전의 예에 의하여, 매양 목(牧)에만 주(州)라 칭하고, 부와 군에는 일체 주를 칭하지 못하게 하여, 주·부·군·현으로 하여금 각기 명실상부하게 대소 군현간에 큰 것으로 작은 것을 부리고, 아랫 것으로 윗 것을 이어받게 하면….' 세종도 경제육전을 명분삼아 행정지명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때의 개혁은 단순히 '州자' 남용을 바로잡는 것만이 아닌, 작은 고을을 하나로 묶는 것이었다. 고을 수는 많으나 그곳에 파견할 인재가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고을에 인재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인재에 고을을 맞추는 셈이 됐다. 도승지 안숭선의 상소다. '본국의 주군의 수는 327군(郡)이나 되오니, 한정이 있는 인재로 어떻게 공수·황패같은 재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메꾸어 임명할 때에 인재를 얻기 어려우므로 도리어 자주 체임시키는 걱정이 있게 되오니, 작은 고을들을 병합하여 사람을 가려서 임명하여 보내면…."- 이같은 조치에 따라 경기도 교하현(현 파주시)이 지도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교하현은 고양(高陽)과 원평(原平)에 끼어 있어 형세가 궂은살과 같으며, 남쪽으로 고양과의 거리가 일식
[충북일보] 충북 도내에서 저발전 지역이자 인구가 감소하는 동남 4군을 연결하는 새로운 산업벨트 조성이 추진된다. 충북도는 건설이 가시화되고 있는 영동~진천 고속도로 주변에 이 벨트를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2일 도에 따르면 보은과 영동, 옥천, 괴산 등 4개 군에 '동남권 신산업벨트'를 조성할 계획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이들 지역의 개발을 유도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다. 도는 영동~진천(오창)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신산업벨트를 구축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고속도로가 4개 지역을 모두 지나는 만큼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지역별로 산업단지를 1곳씩 새로 조성해 하나의 벨트로 연결하는 것이다. 먼저 보은군은 충북개발공사가 맡은 제4산업단지 조성이 진행 중이다. 사업 타당성 검토와 함께 관계기관과 협의 중이다. 옥천군은 민선 8기 공약 사업의 하나로 미래성장 산업단지를 조성한다. 현재 타당성 조사에 들어갔다. 영동군은 용산면 일원에 영동2산업단지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기본구상 및 타당성조사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괴산군의 경우 산업단지 조성을 구상 중이며 아직 명칭은 정해지지 않았다. 도는 4개 산업단지 조성이 완료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에서 저발전 지역이자 인구가 감소하는 동남 4군을 연결하는 새로운 산업벨트 조성이 추진된다. 충북도는 건설이 가시화되고 있는 영동~진천 고속도로 주변에 이 벨트를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2일 도에 따르면 보은과 영동, 옥천, 괴산 등 4개 군에 '동남권 신산업벨트'를 조성할 계획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이들 지역의 개발을 유도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다. 도는 영동~진천(오창)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신산업벨트를 구축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고속도로가 4개 지역을 모두 지나는 만큼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지역별로 산업단지를 1곳씩 새로 조성해 하나의 벨트로 연결하는 것이다. 먼저 보은군은 충북개발공사가 맡은 제4산업단지 조성이 진행 중이다. 사업 타당성 검토와 함께 관계기관과 협의 중이다. 옥천군은 민선 8기 공약 사업의 하나로 미래성장 산업단지를 조성한다. 현재 타당성 조사에 들어갔다. 영동군은 용산면 일원에 영동2산업단지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기본구상 및 타당성조사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괴산군의 경우 산업단지 조성을 구상 중이며 아직 명칭은 정해지지 않았다. 도는 4개 산업단지 조성이 완료
◇취임 2주년 소회와 주요 성과는 그동안 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지속가능한 공감·동행 교육'을 펼쳐왔다. 학교는 교육의 본질에 충실하고, 학생은 스스로의 삶과 학습을 주도할 수 있도록 탄탄한 토대를 만들고 다졌다. 취임 후 2년은 충북교육의 '새로운 도전과 성장의 시기'였다.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었던, 공약은 도민과의 약속이다. 지난해 전국교육감 공약 실천 계획 평가 최우수에 이어 올해 공약 이행평가도 최고등급을 받았다. 2023년 교육부 17개 시도교육청 평가에서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됐다. 교육발전특구 공모에 도내 5개 지구가 선정돼 3년간 최소 150억 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학생 성장 기반을 단단히 다졌다. 학생들은 몸활동을 통한 기초체력 단련과 독서교육으로 마음 근육과 기초소양을 쌓고, 이를 바탕으로 기초·기본 학력을 기른다. 올해는 기초학력 진단검사 후 모든 학습지원대상 학생 1대1 개별 맞춤형 지원계획을 수립하고 '다채움' 플랫폼을 통한 촘촘한 지원방안도 살피고 있다. 현장에서 답을 찾아 충북형 정책을 수립했다. 교직원 단체의견 수렴과 전문가 협의회를 통해 '작은학교 활성화 종합계획', '지금은 아이성장 골든타임' 정책이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