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상 19세기 초에 '아리랑'과 비슷한 표현이 보인다. 천주교 순교자 이승훈은 '만천유고'에 '농부가'(1790)를 남겼다. '호미매여라 호미매여라 / 황혼월색이 만기간(滿旗竿)일세 // 아로롱 아로롱 어희야(啞魯聾) / 일석노담재주환(日夕農談載酒還)'. 후렴구 '아로롱'은 말 안하고(啞) 우둔하게(魯) 귀막고(聾) 지낸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로롱'이 아리랑과 같은 의미를 지녔는지는 다소 논란이 남아 있다. '아리랑'이라는 분명한 명칭은 생각보다 늦은 19세기말에 등장하고, 그 배경의 주인공은 고종이었다. 황현(黃玹·1855~1910)은 '매천야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고종은 매일 밤마다 궁궐에 전등불을 대낮같이 밝히고 광대와 재인들을 불러들여 아리랑타령(阿里娘打令)과 같은 신성염곡(新聲艶曲)을 연주하며 놀았다.(…) 이제는 다름 아닌 궁궐에서도 하는 것이다.' '아리랑' 할 때의 '랑'을 '아가씨 娘' 자로 적어고, 그리고 이를 '염곡'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염곡은 이른바 남여상열지사의 노래를 말한다. 다소 퇴폐적인 분위기가 묻어나고 있다.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임금은 이것을 전담하는 원임대신으로 하필이면 민영주(閔泳柱)를 임명했고,
충북을 포함한 충청도에도 아리랑이 존재했다. 그러나 국내 음악계에서 '충청도 아리랑'이라고 개념화시켜 놓은 것은 없다. 그렇게 볼 정도의 음악적인 틀과 정형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다만 중국 만주 정암촌에서 불려지는 아리랑이 '청주아리랑' 또는 '충청도아리랑'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는 강력한 견해가 있다. '청주아리랑'은 임동철 전 충북대 총장이 처음 발견, 지난 2003년 관련 논문을 발표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날 가라네 날 가라네 날 가라네 / 삼베질쌈 못한다고 날 가라네 // 삼베질쌈 못하는 것 대단하고 / 아들딸 낳아준 건 대단찮나.(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시아버지 죽서어 좋댓더니 /왕골자리 떨어지니 또 생각난다 // 시어머니 죽어서 좋댓더니 / 보리방아 물저놓니 또 생각나네.' 후렴은 앞과 같다. 정암촌의 노랫자락이 '청주 아리랑'으로 인정받으려면 우리고장 청주 주변에 비슷한 노랫가락이 조금이라고 남아있어야 한다. 그래야 양자의 음악적인 혈연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정암촌 아리랑의 핵심적인 노랫말은 '날 가라네 날 가라네 날 가라네'다. '날 가라레'는 '나를 집밖으로 나가라'라는 뜻이다. 이 노랫말이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선정 이유를 "아리랑은 다양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창조됐으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여 주고 사회적 단결을 제고하는 역할을 했다"라고 밝혔다. 이에따라 우리나라는 15종목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아리랑 하면 가장 궁금한 것이 어원이다. 현재 무려 40개의 어원설이 있으나 정설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없다. 대신 '무어원설'이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이 설은 '노랫말 아리랑은 의미 없는 사설로, 흥을 돕고 음조를 메워 나가는 구실한다'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아리랑이 생겨난 시점도 궁금하다. 다양한 설이 있으나 고대, 고려, 조선초기, 근대 발생설 등 대략 4가지 설로 구분되고 있다. 고대 발생설은 이병도 박사가 주장했다. 그는 아리랑의 '아리'는 낙랑을 뜻하고, '랑'은 한자 '고개 령'(嶺) 자의 변형으로, 바로 평양(낙랑) 아래에 있는 '자비령'을 의미한다고 봤다. 고려시대 발생설은 고려속요에 선이 닿아 있다. 고려속요의 하나인 '청산별곡'에는 '살어리 살어리랏다 쳥산애 살어리랏다 / 멀위랑 다래랑 먹고 쳥산애 살어리랏다 /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신종 외래해충인 '미국선녀벌레'(Metcalfa pruinosa)는 중부지역 고속도로 축을 따라 남북과 동서 방향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심축 한 가운데 충북이 위치하고 있어, 대규모 확산이 예상되는 내년 가을 이전에 총력 방제에 나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환경부는 얼마전 도서지역 염소, 미국선녀벌레, 미국흰불나방, 미국실새삼, 족제비싸리, 만수국아재비 등 5종을 이른바 '생태계 위해성 2급'으로 지정했다. 이는 5종의 개체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그에 따른 국내 생태계 위해성이 높아졌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환경부는 5종 중 미국선녀벌레의 지정 사유에 대해 "2011년 조사결과를 통해 전국 14개 지역에서 농작물 3종, 과수 12종 등의 상품성을 저해하는 등 총 51과 107종의 식물에 피해를 준 것이 확인됐다"며 "다만 산림 분야에서는 피해 사례가 없어 평가 결과 2급으로 분류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미국선녀벌레가 빠르게 확산되는 것에 대해 농촌진흥청 작물보호과 이상계 연구관은 '미국선녀벌레 및 꽃매미 방제대책' 논문에서 "뛰어난 부착성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 연구관은 "미국선녀벌레는 다른 해충과 달리 어떤 대상 물체에 한번
아비가 묘터를 스승이 비문을, 제천 정보연 정철은 윤선도와 함께 조선시대 2대 문호로 일컬어지고 있다. 정철의 가계는 아들 정종명(鄭宗溟), 손자 정양(鄭瀁), 증손 정보연(鄭普演·1637∼1660) 순으로 이어진다. 정종명과 정양은 문벌의 자손답게 문관의 벼슬을 했다. 증손 정보연도 처음에는 그 길을 걸었다. 특히 부친 정양의 뜻에 따라, 어려서부터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했다. 정양은 1600년생, 송시열은 1607년생이다. 따라서 송시열은 생전에 정양을 '형'이라고 호칭했다. "송시열은 정형 안숙(어릴 적 이름)의 영구가 서울을 출발하여 동쪽으로 충주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병들어 깊은 산골에 엎드려 있는 처지이므로, 몸소 조제(노제를 지칭)의 자리에 나가지 못하고 삼가 아들 기태(基泰)를 보내어 대신 영연(靈筵)에 곡하게 하면서 고합니다."- 송자대전 행간에는 정보연이 지조가 있었으며, 청아하고 고매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로 그려져 있다. 대범하여 세속의 일들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송시열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우암은 일찍이 그의 단아한 인품을 칭송하여 공자(孔子)의 제자인 안연(顔淵)에 비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감옥이 열악한 환경을 지녔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고 죄인들에 대한 복지제도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요사이 장맛비가 너무 많이 내리니 필시 옥사가 지체되어 갇혀 있는 죄수가 있기 때문에 화기를 손상시켰을 것이다. 서울과 지방의 감옥의 죄수로 강도 이외에 장형 80대 이하는 모두 석방하고, 장형 80대 이상으로 연로한 자는 보방(保放)하도록 하라" 하였다."- 인용한 문장 중에 '보방'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보방은 '보석'(保釋) 제도의 일종으로, 보증인은 세워야 한다는 점은 오늘날과 같았다. 그리고 당시는 영구 보방 외에 한시적인 보방도 존재했다. "의금부·형조·사헌부에 전지 하기를, 지금 추위를 당하여 여러 날 구속되어 있으면 바람과 추위의 엄습을 당해서 혹시 목숨을 잃는 데까지 이를까 염려되므로 (...) 겨울 기간을 한하여 보방해서 추국하도록 하여 나의 흠휼하는 뜻에 부응하라."- 옥이 너무 비좁아 보방하는 경우도 있었다. 에는 '"본부에 갇힌 사람이 모두 1백 70여 인이고 전옥서에 옮겨 가둔 자도 40여 인이라, 갇힌 사람은 많고 옥은 좁아서 갇힌 사람들이 앉아 눕지 못합니다. (…) 전교하기를, "처녀의 가장 및 양부에게 시집가서
조선시대 청주옥(獄)은 철당간과 흥업백화점 사이에 둥근 담장 모습으로 위치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 조선전기 청주옥에 갇혔던 유명 인물로는 이색과 권근이 있다. 이들은 이른바 '윤이·이초 사건'에 연루돼 청주옥에 갇혔다.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파평군 윤이(尹彛)·중랑장 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이들은 이성계가 장차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밀고했다. 이는 명나라의 세력을 끌어들여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한 음모였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이색·우현보·권근 등 많은 대신들이 연루 혐의를 받고 청주옥에 갇혔다. 실록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에 우현보·권중화·경보·장하·홍인계·윤유린과 최공철(崔公哲)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고, 이색·이임·우인열·이인민·정지·이숭인·권근·이종학·이귀생 등은 청주(淸州)의 감옥에 가두고 이를 국문하게 하였다.'- 이어지는 문장은 "그해 여름에 이색 이하 여러 폄소에 있던 자가 모두 청주의 옥으로 잡혀 와 갇혔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큰비가 내려, 물이 넘쳐 성안에 들어와서 공해가 모두 물에 잠겼었다"라고 돼 있다. 바로 그 유명한 중앙공원 압각수 설화다. 익
경기도 의왕시 원통사(圓通寺)가 세종비 소헌왕후의 원찰이었음을 확인하는데는 충북 영동출신 김수온(金守溫·1410∼1481)이 지은 '식우집'(拭우集)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따라 식우집의 보다 자세한 내용과 그 저자인 김수온의 생애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17일 수원대박물관 양정석 교수가 이끄는 발굴팀은 의왕시 청계산 중턱에 존재하는 원통사 절터는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 심씨가 발원해 중창한 조선왕실 원찰이었음을 확인됐다고 밝혔다. 발굴팀은 문헌사와 고고학적인 근거로 △식우집에 '소헌왕후가 발원해 중창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원통암중창기'(圓通菴重創記)'에 소헌왕후의 막내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1434-67)이 이를 더욱 크게 중창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점을 들었다. 이밖에 이번 발굴조사에서 '홍희'(洪熙)라는 연호를 새긴 기와가 발견된 점 등을 들었다. 이와 관련, 양 교수는 "홍희는 1425년 한 해만 사용한 중국 명나라 연호"라며 "바로 이 연도는 바로 김수온의 원통암중창기에서 말하는 소헌왕후가 원통암을 창건하기 시작한 그 해이기도 하다"라고 밝혔다. 현재 식우집은 종손이 원본을, 그리고 성균과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이 영인본을 소장하
호랑버들이 탁월한 토양정화 기능을 지닌 것으로 밝혀졌다. 국립산림과학원은 최근 이같은 연구 성과를 담은 '환경정화용 산림유전자원-호랑버들'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자료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수백개의 폐광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 폐광의 대부분은 높은 농도의 중금속의 함유, 주변 토양을 지속적으로 오염시키고 있다. 이에따라 국내는 물론 세계 여러나라가 중금속 오염 토양을 정화시킬 수 있는 재료나 기술을 획득하는데 심혈을 기울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버드나무과 소교목인 호랑버들이 뛰어난 중금속 정화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국립산림과학원 연구팀에 의해 밝혀졌다. 연구팀은 경북 봉화의 한 폐광을 선정, 주변 소나무·물푸레나무·신나무·호랑버들·아까시나무 등의 중금속 축적 정도를 조사했다. 그 결과, 호랑버들 잎에서 카드늄(Cd)과 아연(Zn)의 축적량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카드늄의 경우 다른 수종의 5배, 아연은 무려 10~40배의 높은 축척도를 나타냈다. 호랑버들의 카드늄 함유량은 평균 5.92㎎/㎏인데 비해 소나무 등 다른 나무는 0.43~0.66㎎/㎏에 불과했다. 아연은 이보다 함유량 편차가 훨씬 커 호랑버들이 782.2㎎/㎏인데 비해 신나무는 135.8, 소나
정철의 묘는 그의 손자인 정양(鄭瀁·1600∼1668)과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에 의해 1665년 경기도 고양에서 우리고장 진천 문백으로 이장됐다. 손자 정양은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현재 문백에는 정철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정종명의 묘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바로 정종명의 아들이 정양이다. 정양은 진천현감을 역임하기도 했고, 또 병자호란 피난일기인 '강도피화기사'를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강도피화기사'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도중에 청나라 군대를 만나 온갖 고생을 한 경험을 매우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특히 일기에는 여인들이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자결하는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정양 자신도 청나라 군사의 공격을 받아 이때 한쪽 눈을 잃은 것으로 돼 있다. 피난도중 아내가 배위에서 출산을 하면서 가족들이 이중의 고초를 겪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정양의 묘는 진천이 아닌 우리고장 제천 금성면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송시열이 쓴 정양의 묘표(비석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부인 이씨는 덕화를 받아 공을 섬기는데 매우 예법이 있었는데 불행히 먼저 죽었다. 두 번째로 그의 묘를 옮겨 제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는 면리제(面里制)가 근간으로,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현재 里 밑에 자연부락 지명이 존재하나 이는 법적 행정지명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시골지역은 '~리 OOO번지' 식의 주소를 갖는다. 일제는 1914년 우리나라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하면서 농촌지역의 경우 부(府)와 현(縣)을 폐합, 군(郡)으로 일원화했다.이때 도내에서는 영춘, 청풍, 연풍, 청안, 문의, 청산, 황간현 등이 면(面)으로 격하됐다. 이중 청풍현은 바로 청풍면이 되지 않고 1914~1917에는 비봉면(飛鳳面)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행정명으로서의 면은 태조 때부터 등장한다. '목조는 두타산성을 지켜서 난리를 피하였다. 때마침 전일의 산성별감이 새로 안렴사에 임명되어 또 장차 이르려고 하니, 목조는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바다로 배를 타고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에 이르러 살았는데…'- 조선전기 우리고장 보은에서도 면(面) 이름이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청산현의 월경지(越境地)인 주성부곡을 서술하면서 '북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월경(越境)은 청산(靑山) 임내의 주성부곡(酒城部曲)이 현 북면(北面)에 터무니 없이 들어와 있다.'-
10. 이노우에, 동학은 물론 명성황후 시해에도 관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에 대한 평가를 보면 그가 왜 조선과의 악연을 자원했는지 알 수 있다. "이노우에의 장점은 머리회전이다. 일단 분규가 일어나면 전광석화처럼 대처해서 수완을 보인다. 어떤 어려운 문제에도 임기응변하는 재주를 갖고 있다. 성격은 급하지만 싫증을 잘 내지 않으며 공명심에 담박하고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부탁받으면 나쁜 직무라도 열심히 일했다. 세상의 악평은 그런 점에서 나온 것도 있다." 메이지정권이 당면 목표로 삼은 조선 침략의 앞잡이로선 실무에 밝은 그가 적임자였다. 불평등조약 체결부터 개화파정권의 친일 정책과 최대 반일세력인 동학농민군 제거까지 이노우에 가오루가 책임을 졌고, 명성황후 시해에도 마무리에 등장했다. 조선의 국권 탈취는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2대 소네 아라스케(1849~1910), 3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가 담당했다.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은 그렇게 50년만에 조슈번의 사무라이들인 야마구치 인맥에 의해 완수되었다. ■ 유다온천의 메이지유신 사적지 야마구치 시청의 남서쪽에 대형 호텔과 여관들이 늘어선 곳
정철에게는 정여립을 단죄한 기축옥사의 업보가 계속 따라다녔다. 그는 임진왜란 와중에 명나라를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선조의 신임을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동인들은 기축옥사의 한을 곱씹고 있었다. 결국 정철은 전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동인의 모함을 받아 지금의 강화도 송강촌이라는 곳으로 방축됐다. 실각한 그가 왜 강화도로 들어갔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선조의 부름이 다시 있을 것으로 보고 한양 가까운 곳을 선택했다는 추정이 있다. 반면 그의 문인(門人·제자)인 권필(1569∼1612)이 강화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권필은 젊었을 때 평안도 강계에서 유배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이때 역시 그곳에 건저의 사건으로 유배와 있던 정철을 만나 사제 관계를 맺은 바 있다. 권필은 이후 강화도에 정착, 그곳에서 많은 유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혹자는 정철이 이를 고려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쫓기듯 들어간 강화도에서, 정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난과 병고였다. 그는 지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썼다. '내가 강화로 물러나온 후 사면을 둘러봐도 입에 풀칠할 계책이 없으니 형이 조금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 (…) 그러나 형처럼 절친한 이에게서는 약
신립(申砬·1546∼1592)은 과연 임진왜란 충주전투에서 자살을 했을까. 지금까지 신립은 금년 기준으로 7갑(1592년) 전인 임진왜란 충주전투 때 패배에 따른 책임을 지고 달천에 뛰어들어 자결했다는 것이 정설로 돼 있다.이는 선조실록 1592년의 기사 중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라는 표현에 근거하고 있다. '적이 복병을 설치하여 아군의 후방을 포위하였으므로 아군이 드디어 대패하였다. 입은 포위를 뚫고 달천 월탄(月灘)가에 이르러 부하를 불러서는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고 하고 빠져 죽었다. 그의 종사관 김여물(金汝山+勿)과 박안민(朴安民)도 함께 빠져 죽었다.'- 선조실록 원문은 '賊設伏繞, 出我師之後, 衆遂大潰。 砬突圍至달(수달달)川月灘邊, 召其下曰: "無面目見殿下。" 遂溺死。 其從事金汝山+勿、朴安民, 亦溺死'로 적혀 있다. 그러나 신흠(申欽·1566~1628)의 상촌집(象村集)은 같은 전투였지만 약간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조선중기 문신인 신흠은 '상촌집'이라는 시문집을 63권 22책의 방대한 분량으로 남겼다. 이중 '여러 장사들이 왜란 초에 무너져 패한 기록'(諸將士難初陷敗志) 편에 임진왜란 충주전투와 신립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
지금까지 뿌리만 사용하고, 별 쓸모가 없어 버려지던 인삼잎이 피부탄력 증대와 주름 개선에 커다란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에 위치하고 있는, 농촌진흥청 산하의 인삼특작부(팀장 김승유)는 최근 이같은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연구팀은 인삼잎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그 이용 가능성을 새롭게 규명하는 실험을 실시했다. 특히 인삼잎의 프로콜라겐 생성과 엘라스타제의 저감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주목했다. 생화학 이론상 프로콜라겐은 콜라겐 생성유도물질로, 노화와 피부주름 방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프로콜라겐은 효소반응을 거쳐 콜라겐 섬유를 형성하게 돼 피부의 결합성과 탄력성을 높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험결과, 인삼 잎은 프로콜라겐 생성이 우수한 것으로 확인됐다. 인삼 잎 추출물을 100μg/ml 투입했을 때 대조군보다 프로콜라겐이 36 % 더 생성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콜라겐을 형성하는 중요한 영양성분인 비타민C를 투입했을 때보다 프로콜라겐 생성이 더 우수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밖에 탄력성 단백질 분해요소인 엘라스타제는 태양광에 노출되면 활성이 증가해 피부의 탄력이 떨어지고 주름이 만들어지는 원인으로 알려져 왔다.
우리고장 진천 문백에 영면하고 있는 송강 정철(鄭澈·1536∼1593)은 조선중기 당쟁의 한 복판에 서 있던 인물로 생각될 수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 그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임진왜란을 수습하는데 진력을 다 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이 기간 동안 충청과 호남의 양호체찰사가 되어 우리고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체찰사는 왕명에 의해 특정 지역에 파견되는 임시 고위관료를 말한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전에 이른바 건저의(建儲議·세자를 세우는 것에 대한 논의) 사건에 대한 선조의 노여움으로 압록강 아래인 평안도 강계에 유배됐다. 이때 그는 유배생활의 고달픔을 시로 남겼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모르고 / 하늘을 업고도 하늘 보기 어렵네 / 마음을 아는 넌 오직 백발이라 / 나를 따라 또 한 해를 지나는구나.'- 인용문 중 '하늘을 업고도 하늘 보기 어렵네'는 유배된 곳의 집담장 둘레는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배의 한 종류인 위리안치(圍籬安置)는 빽빽히 들어산 탱자나무가 담장을 이룬 것을 말한다. 탱자나무 울타리는 가시가 나 있고, 또 그물처럼 촘촘하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달여만에 유배지 강계에서 사
전회에 송강 정철의 아들 종명이 아버지를 변호하는 내용을 간략히 소개했다. 그러나 이 글은 장문이고 또 정종명 혼자가 아닌, 동생 홍명(弘溟)과 같이 올린 상소문이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변호·복권시키려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의 사실'이라는 것도 있다. 더욱이 상소하는 대상이 일국의 지존인 국왕이다. '신의 아비가 명종·선조 두 조정을 섬기게 되어서는 용호가 풍운을 만나고 고기가 물을 만난 듯한 기쁨이 한때 견줄 데 없었으나 다만 강직한 충성 때문에 남과 화합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철은 '한 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놓고 무진 무진 먹세그려'의 장진주사(將進酒辭)를 지을 정도로 술을 매우 좋아했으나 불같은 성격을 함께 지녔다. 두 아들은 '남과 화합하지 못했다'라는 말로 그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상소문은 아버지 정철이 기축옥사의 위관을 맡고 싶어서 맡은 것이 아닌, 선조의 강권 때문에 맡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은 사실일까. 위관(委官)은 죄인을 추국할 때 대신 중에서 임시로 뽑아서 임명하는 재판관을 말한다. 국조인물고를 보면 어느 정도 사실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해 11월에 공을 우의정에
그날 서인 영수 정철과 동인 연수 이산해는 선조 앞에서 세자 책봉 문제를 논의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선조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이산해는 그날 병을 핑계로 어전에 나가지 않았다. 정철은 이같은 음모도 모르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건의했다가 혼자 선조의 미움을 사 강계로 유배됐다. 이른바 건저의(建儲議·세자를 논하는 것) 사건으로, 이로 인해 서인이 몰락하고 동인이 집권했다. 기축옥사의 최고 국문관이었던 정철은 실각하자마자 기축옥사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기축옥사는 정여립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은 동인계열 사람 수백명이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이때 동인중 정철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은 북인, 온건론을 편 쪽은 남인으로 갈렸다. 정철의 아들중에 정종명(鄭宗溟·1565∼1626)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학문과 실력을 갖췄으나 군수직을 받기도 쉽지 않았다. 모두 아버지 정철 때문이었다. 이조가 정종명을 안성군수로 추전했으나 선조는 비망기를 내려 이를 거부했다. "정종명은 간신의 아들로 여러 해 동안 폐기한 데에는 의도한 바가 있었다. 전에도 여러 차례 수령에 의망된 적이 있어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괴이하여 추구하고
금년이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7갑(420년)인 가운데, 임란 충주전투는 일본 근대역사소설들의 주요 소재가 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들 소설들은 충주전투(탄금대전투 포함)를 임진왜란 전개의 가장 중요한 국면으로 다뤘던 것으로 나타났다. 18-19세기 근대 일본소설 중 임진왜란을 다룬 역사소설로는 '에혼타이코키'(繪本太閤記)와 '에혼조센군키'(繪本朝鮮軍記) 등이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두 소설에 '회본'이라는 표현이 공통적으로 들어간 것은 소설 문장과 함께 삽화가 곁들여진 것을 의미한다. 에혼타이코키는 오카다 교쿠잔(岡田玉山·1737~1812)이 저자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를 그렸다. 세부 내용은 도요토미의 침략 목적과 임란전쟁 과정 그리고 영웅담 등을 담고 있는 가운데, 일본내에서 근대 일본역사소설을 집대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에혼조선군기는 고니시 휘하의 장수였던 아키자토 리토(秋里竹+離島)가 저자로, 히데요시에 대한 신격화와 함께 임진왜란 진행 내용을 담고 있다. 에혼타이코키보다 1년 앞선 1880년 일본 춘양당( 春陽堂)이라는 곳에서 출판됐다. 흥미로운 것은 두 역사소설에 유성룡이 쓴 징비록(懲毖錄)을 참고했을 듯한 표
자연에 방사된 산양은 적응기간이 지나면 행동권이 뚜렷하게 좁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적응기 이후의 행동권은 가을에 가장 넓고, 겨울에 상대적으로 좁아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환경부는 지난 2006년 지리산 반달사슴곰을 시작으로 한반도 멸종위기종 동물에 대한 복원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이에따라 충북에서는 지난 2007년 산양(천연기념물 제 217호)이, 그리고 금년 10월말에는 토종여우(멸종위기 야생동물1급)가 소백산에 방사된 바 있다. 복원사업은 멸종위기 동물의 자생력 강화와 장기적인 생존,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건강한 생태계 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와 관련, 충북대 출신의 이배근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이 얼마전 '월악산 멸종위기 산양의 행동 특성에 관한 연구' 논문을 한국 생태학회지에 발표했다. 논문은 자연계열이어서 양은 많지 않으나 자연 방사된 산양에 대한 거의 처음의 논문이어서 주목을 받았다. 연구팀은 지난 2007년 산양의 행동권, 서식지 대응. 식이(먹이) 습성, 행동생태 등을 알아보기 위해 'HF-01' 관리번호를 부여한 산양에게 무선 발신기를 부착한 후 방사했다. 'HF-01'는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고 암컷이며 관리번호가 '01'번이라는
조선시대 죄인은 옥(獄)에 갖혔어도 형량에 따라 형구를 차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흔한 것이 '가'(枷)라고 불리는 나무칼이었다. 이 나무칼은 죄의 경중에 따라 무게게 달랐다. 장형을 받은 죄인은 15근, 사형이 결정된 중죄인은 25근의 나무칼을 차야 했다. 1근이 6백그램인 것을 감안하면 25근은 15kg의 무게다.사극을 보면 어떤 죄인은 발에도 무엇인가를 차고 있다. 착고(着錮·또는 차꼬)라는 형구다. 이 착고는 두 개의 토막나무에 가로구멍을 파고 그 안에 죄인의 양쪽 발목을 넣고 자물쇠로 채운 모습이다. 을사사화 때 우리고장 충주인물 이홍윤이 의금부로부터 국문을 받는 중에도 이 착고를 찼다는 내용이 실록에 등장한다.충주출신 사림파 사대부인 이약빙에게는 이홍남, 홍윤 형제가 있었다. 그러나 이복간인 둘은 재산문제로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이때 형 홍남이 귀양지 영월에서 빨리 풀려날 목적으로 동생 홍윤이 역모를 꾸몄다고 고변한다. 그 결과, 한달 사이에 충주백성 28명이 능지처참을 당하고 8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사관은 이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이 옥사에 연루되어 주륙(誅戮)당하거나 귀양간 자가 무려 40∼50인에 달하여 충주(忠州) 전체가 온통
괭이갈매기가 도내 하천인 미호천에서 발견돼 주목을 받고 있다. 29일 지역 한 뉴스 매체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바다와 접해있지 않은 충북 청주 인근의 미호천에서 괭이갈매기와 재갈매기 등 2종의 갈매기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는 일반인의 관찰력이 못미쳐서 그렇지 특이한 생태현상은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 괭이갈매기는 해안가에서 주로 서식하지만 먹이를 쫓아 내륙까지 들어오는 것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조류학자 원병호 박사는 논문에서 '우리나라에서 일년 내내 볼 수 있는 흔한 텃새로서 주로 동·서해안과 남해의 무인 도서에서 집단 번식한다. 비번식기에는 해안·해상·하천·호소·저수지 등 도처에서 흔히 눈에 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또 한국교원대 한 대학원생도 관련 논문를 '괭이갈매기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북아시아 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텃새로 해안과 항구 그리고 내륙의 하천 등지에서 흔히 관찰되고 있다'라고 썼다. 다만 이번에 미호천에 출현한 괭이갈매기는 한국교원대에서 인공 사육하던 개체가 유출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교원대 대학원생 중 일부는 논문을 쓰기 위해 몇해 전까지 10여 마리의 괭이갈매기를 인공 사육한 바 있다. 이때 인공 부화된
조선시대 형벌을 얘기할 때 태형과 장형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둘은 죄인을 체벌하는 것은 같으나 강도에 있어 큰 차이가 났다. 태형의 '태'는 한자 '매질할 태'(笞) 자로 '대죽변'이 붙어 있다. 바로 둔부를 노출시킨 후 회초리로 매질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장형할 '장'은 '지팡이 장'(杖)자로 '나무목' 변이 붙어 있다. 즉 장형은 커다란 몽둥이로 체벌을 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태형이나 장형을 가할 때는 남녀의 모습이 달랐다. 방금 둔부를 노출시킨 후 매질한다고 밝혔다.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남자는 둔부를 완전히 노출시켰으나 여자 죄인은 홑겹의 옷을 입게 했다. 그런데 홑겹의 옷을 입게 하자 여자죄수 사이에서는 몰래 여러 겹의 옷을 입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연산군일기의 기생 '내한매' 이야기가 그런 경우다. '잔치를 베풀 때에, 잘 아는 음악을 물었는데도 모른다고 대답하므로, 형조에 내려 처벌하게 하였는데, 곤장을 맞을 때에 치마 속에 모피를 몰래 감춰 둔 것이 참의에게 발각되어…'- 장형의 종류 중에는 '난장'(亂杖)이라는 것도 있다. 이는 여러 사람이 빙 둘러 돌아가면서 죄인의 신체 부위를 가리지 아니하고 마구 몽둥이로 때리는 것을
8. 후쿠자와 유키치, 아시아인을 멸시하다 1881년 4월 조선에서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변화상을 보고 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때 일본 정부가 만나게 한 인물 중 한 사람이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 다음해 1882년 김옥균과 박영효가 일본에 가서 문물 시찰을 할 때 후쿠자와 유키치는 풍부한 서양지식과 식견으로 매료시킨다. 조선의 젊은 관료는 일본의 변화상에 놀라며, 유키치의 언설에 세뇌되었다. 조선 사절단으로 간 개화파는 경험이 적었다. 연장자인 김옥균(1851년생)은 30대 초, 철종의 부마로 실권자인 박영효(1861년생)는 20대 초였고, 홍영식(1955년생) 유길준(1856년생) 서광범(1859년생)도 역시 20대였다. 이들 젊은 명문 양반가의 자제들이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난 것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 후쿠자와 유키치의 만세일계 만세일계(萬世一系)가 신앙의 대상이라면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국제관계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요소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천지개벽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천황가의 혈통이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다"라는 것이 만세일계이다. 『고사기(古事記)』 나 『신황정통기
조선시대 옥에 갖힌 죄수들은 야간에는 통 2개로 생리현상을 해결해야 했다. 나졸들이 넣어준 통 중 큰 것은 대변용, 작은 것은 소변용이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조선시대 옥의 이같은 환경을 크게 비판했다. 다산은 조선옥의 열악한 환경을 '옥중오고'(獄中五苦)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다섯 가지 고통이라는 뜻으로 △형틀의 고통 △토색질(갈취)을 당하는 고통 △질병의 고통 △춥고 배고픈 고통 △오래 갖혀 있는 고통 등을 말한다. 다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시대 옥을 '이승의 지옥'이라고까지 표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옥하면 참수형을 집행하던 망나니를 빼놓을 수 없다. 나라에서는 백정을 망나니로 삼으려 했지만 잘 안 됐다. 따라서 사형수를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키는 대신, 이들을 망나니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즉 망나니는 자신의 삶을 연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야 했던 비극적인 존재였다. 이런 망나니에게도 뇌물이 건네지는 경우가 있었다. 사극을 보면 죄인을 꿇어앉힌 후 망나니가 목을 베는 경우가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김윤보라는 인물이 그린 '형정도첩'이라는 그림을 보면 죄인을 땅을 보고 눕게 한 후 망나니가 목 위에서 칼을 내리쳤다. 이때
[충북일보] 충북 도내에서 저발전 지역이자 인구가 감소하는 동남 4군을 연결하는 새로운 산업벨트 조성이 추진된다. 충북도는 건설이 가시화되고 있는 영동~진천 고속도로 주변에 이 벨트를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2일 도에 따르면 보은과 영동, 옥천, 괴산 등 4개 군에 '동남권 신산업벨트'를 조성할 계획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이들 지역의 개발을 유도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다. 도는 영동~진천(오창)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신산업벨트를 구축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고속도로가 4개 지역을 모두 지나는 만큼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지역별로 산업단지를 1곳씩 새로 조성해 하나의 벨트로 연결하는 것이다. 먼저 보은군은 충북개발공사가 맡은 제4산업단지 조성이 진행 중이다. 사업 타당성 검토와 함께 관계기관과 협의 중이다. 옥천군은 민선 8기 공약 사업의 하나로 미래성장 산업단지를 조성한다. 현재 타당성 조사에 들어갔다. 영동군은 용산면 일원에 영동2산업단지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기본구상 및 타당성조사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괴산군의 경우 산업단지 조성을 구상 중이며 아직 명칭은 정해지지 않았다. 도는 4개 산업단지 조성이 완료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에서 저발전 지역이자 인구가 감소하는 동남 4군을 연결하는 새로운 산업벨트 조성이 추진된다. 충북도는 건설이 가시화되고 있는 영동~진천 고속도로 주변에 이 벨트를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2일 도에 따르면 보은과 영동, 옥천, 괴산 등 4개 군에 '동남권 신산업벨트'를 조성할 계획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이들 지역의 개발을 유도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다. 도는 영동~진천(오창)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신산업벨트를 구축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고속도로가 4개 지역을 모두 지나는 만큼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지역별로 산업단지를 1곳씩 새로 조성해 하나의 벨트로 연결하는 것이다. 먼저 보은군은 충북개발공사가 맡은 제4산업단지 조성이 진행 중이다. 사업 타당성 검토와 함께 관계기관과 협의 중이다. 옥천군은 민선 8기 공약 사업의 하나로 미래성장 산업단지를 조성한다. 현재 타당성 조사에 들어갔다. 영동군은 용산면 일원에 영동2산업단지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기본구상 및 타당성조사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괴산군의 경우 산업단지 조성을 구상 중이며 아직 명칭은 정해지지 않았다. 도는 4개 산업단지 조성이 완료
◇취임 2주년 소회와 주요 성과는 그동안 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지속가능한 공감·동행 교육'을 펼쳐왔다. 학교는 교육의 본질에 충실하고, 학생은 스스로의 삶과 학습을 주도할 수 있도록 탄탄한 토대를 만들고 다졌다. 취임 후 2년은 충북교육의 '새로운 도전과 성장의 시기'였다.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었던, 공약은 도민과의 약속이다. 지난해 전국교육감 공약 실천 계획 평가 최우수에 이어 올해 공약 이행평가도 최고등급을 받았다. 2023년 교육부 17개 시도교육청 평가에서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됐다. 교육발전특구 공모에 도내 5개 지구가 선정돼 3년간 최소 150억 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학생 성장 기반을 단단히 다졌다. 학생들은 몸활동을 통한 기초체력 단련과 독서교육으로 마음 근육과 기초소양을 쌓고, 이를 바탕으로 기초·기본 학력을 기른다. 올해는 기초학력 진단검사 후 모든 학습지원대상 학생 1대1 개별 맞춤형 지원계획을 수립하고 '다채움' 플랫폼을 통한 촘촘한 지원방안도 살피고 있다. 현장에서 답을 찾아 충북형 정책을 수립했다. 교직원 단체의견 수렴과 전문가 협의회를 통해 '작은학교 활성화 종합계획', '지금은 아이성장 골든타임' 정책이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