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은 '총애'(寵愛)를 '남달리 귀여워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총애 중 임금이 특별히 총애하는 것을 '은권'(恩眷)이라고 부른다. '사신이 논평하기를, "김세적이 비록 무재는 뛰어나다 하더라도 기간(器幹)이 없고 또 조행(操行)이 없었다. 그러나 은권이 매우 높아서 영광이 그 어버이에게 미쳤다" 하였다.'- 기간과 조행 역시 지금의 거의 사용하지 않는 조선시대식 표현이다. 전자는 재기와 도량을, 후자는 몸가짐 즉 품행을 일컫고 있다. 이밖에 은권과 비슷한 표현으로 '권우'(眷遇)라는 단어도 조선시대에 유통됐다. 두 단어는 큰 차이는 없지만, '권우'에는 행동의 의미가 보다 강조된다. '사신이 논평하기를, "임금이 김세적이 장재(將才)가 있다 하여 가려서 승지에 발탁시키고 배우지 못했다 하여 학문을 배우게 하였고, 이제 또 은혜가 그 부모에게 미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그 권우가 지극하였다.'- 인용문에 김세적(金世勣·?∼1490)이라는 인물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은권', '권우'라는 표현이 잇따라 등장한 것으로 봐 성종 임금이 김세적을 무척 총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관은 그런 모습에 무척 질투를 느꼈는지 '무재
성과 관련된 범죄로는 간통죄도 있다. 간통죄는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간통을 함으로써 성립되는 범죄다. 강간죄와 간통죄 모두 형법의 영역이지만 간통죄는 배우자의 고소가 있어야 한다. 이른바 친고죄인 셈이다. 조선시대 이름이 가장 많이 알려진 간통녀로는 어을우동(於乙宇同·? ~ 1480)이 있다. '어우동'으로 많이 알려진 여인으로, 성종실록에 총 27번 언급된다. 어을우동 만큼이나 자주 언급되는 섹스 스캔들 메이커가 있다. 바로 어을우동보다 조금 앞선 시기를 산 유감동(兪甘同)이다. 그녀의 생몰년 미상으로 돼 있다. 다만 세종대에 남자 40여 명과 간통했고, 이로 인해 처벌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세종실록에 관련 기사가 정확히 17번 등장한다. 유감동의 남편은 평강현감 최중기(崔仲基)였다. 그가 무안군수로 부임할 때 유감동을 현지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유감동은 어떤 이유에서 인지 서울로 올라와 방종한 생활을 하게 되고, 이에 최중기가 그녀를 버린 것으로 돼 있다. "본 남편은 지금 평강현감 최중기(崔仲基)입니다. 중기가 무안 군수가 되었을 때에 거느리고 가서 부임했는데, 이 여자가 병을 핑계하고 먼저 서울에 와서는 음란한 행실을 마구하므로 중기가 이를 버렸습니
조선시대에는 강간범을 명나라 형법인 대명률(大明律)에 의해 매우 엄하게 다스렸다. 특히 10대 여아를 강간한 경우 교수형에 처했다. 교수형과 참형은 같은 사형이지만 신체가 훼손되는 참형을 보다 무겁게 여겼다. '형조에서 계하기를. "평해(平海)에 있는 죄수 김잉읍화(金仍邑火)는 여덟 살 난 계집아이를 강간했사오니, 율(律)이 교형(絞刑)에 해당합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같은 강간범이면서 참형보다도 더 혹독하게 처벌되는 경우가 있었다. 남자종인 '노'(奴)가 상전의 아내를 강강한 경우로, 이때는 가장 잔인한 형벌인 능치처참형에 처해졌다. 아래 인용문에 등장하는 '내은이'는 양민의 딸이다. '내은이는 굳세게 항거하다가 5경(五更)에 이르러 힘이 빠지니, 이에 박질이 그의 손발을 묶고 강간(强姦)하였다. 내은이가 도망하여 한성부에 호소하였다. 한성부에서 실구지 형제와 박질을 잡아다가 국문하니 사실대로 토설(吐說)하였다. 의정부에 보고하여 계문하니, 율(律)에 의하여 능지처참하였다.'- 지금까지 거론한 인물은 남자종이거나 양민남자다. 이와 달리 양반 남자가 강간범이 되면 어떤 처벌을 받을까도 궁금한 대목이다. 답을 미리 말하면 태반이 유권무죄(有權無罪
달력(曆書)이 우리나라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6~7세기 무렵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문무왕 14년(674) 정월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던 대나마(大奈麻) 덕복(德福)이 역학(曆學)을 배워 돌아와서 새로운 역법으로 개용하게 되었다'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보다 앞서 중국 역서가 백제를 거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내용이 일본서기에 기록돼 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역박사 왕보손(王保孫)이 554년(위덕왕 1) 일본에 건너갔으며, 또 602년(무왕 1) 백제의 승려 관륵(觀勒)이 역서를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와 관련 조선시대에는 관상감(觀象監)이라는 곳에서 역서를 제작·보급했다. 당시는 어떤 과정을 거쳐 달력을 만들었고, 또 몇 부 가량 보급했을까. 충북대 기초교육원 박권수 교수의 논문 '조선시대 역서의 간행과 배포' 논문에 따르면 역서 제작은 대략 22~25명의 전문가로 팀을 구성, 보통 2년 전부터 시작했다. 이를 흐름도로 작성하면, 역계산 시작-역계산 결과 제출-인출 시작-인쇄 완료-역서배포 시작-역사 사용 등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동일집단이 12개월 모두를 계산하거나 인쇄하지 못하도록 했다. 사전에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
지난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 특별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때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 1992년 개성 왕건릉에서 출토된 고려 태조상이었다. 조각상은 발견 초기에는 단순 청동불상으로 알려졌으나 그후 고려 태조의 동상으로 확인됐다. 문헌추적 결과, 태조상은 951년 제작돼 개성 봉은사에 봉안됐고 이후 고려 전시기에 걸쳐 국가의례 때마다 주된 숭배 대상이 됐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성리학 제례법과 맞지않는다는 이유로 1429년(세종 11) 개성 왕건릉 옆에 매장됐다. 당시 서울에 왔던 태조상은 머리에는 통천관(通天冠)을 썼고 몸체는 벌거벗은 나상(裸像)이었다. 이밖에 남근(男根)이 2㎝밖에 안 될 정도로 매우 축소된 모습이었다. 따라서 일부 신문은 이를 '번데기'로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 노명호 교수는 "왕건상이 앉은키는 84.7cm로 성인 남자와 비슷한 크기인 데 반해 남근은 유아의 것처럼 표현했다"며 "이는 색욕을 멀리하는 불교사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왕건 조각상에 대한 언급은 조선시대 세종실록에도 등장한다. 이와 관련, 우리지역 청원 문의도 언급돼 있어 지역적인 관심을 크게
전회에 이문건(李文楗·1494~1567)이 대가 끊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손자 '숙길'(淑吉)을 봤고, 이후 점쟁이의 말에 따라 친모가 아닌 유모(乳母)에게 젖을 물리게 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양아록은 시간 흐름에 따라 발육과 유년기 학습 과정도 시형식을 빌려 매우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始立', 즉 '일어서기를 시작하며'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두 손으로 다른 물건 잡고 / 양다리에 의지해 쪼그리고 앉는다 / 한 달을 이와 같이 하더니 / 점점 제 스스로 오금을 펴고 일어선다 / 동지가 되어 양의 기운이 다시 생기려 하니 / 이날에 맞추어 네가 일어서는구나.'- 앞서 언급한대로 숙길이에 대한 할아버지 이문건의 기대는 일반의 상상을 크게 웃도는 것이었다. 이문건은 숙길이가 유교적 소양을 지닌 성인으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조선의 문신답게 공자를 이상형으로 삼았다. '너의 조급하고 경망한 마을을 제거하고 / 성현의 발자취를 쫓아야지 / 마음에 잘 간진해주고 상실하지 않는다면 / 이것은 孔子를 잘 배우는 것이다 / 네 자신에게 잘 머무르게 하면 어찌 조상의 복을 받을른지 알겠는가 / 亨達은 정말 운명에 달려있고 / 富貴는 얻기가 어
이문건(李文楗·1494~1567)은 묵재일기 외에 양아록(養兒錄)의 저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양아록은 글자 그대로 '아이 양육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으로, 이상주 박사가 발굴·소개하면서 일반에 알려졌다. 내용은 할아버지 이문건이 손자 '숙길'(淑吉)의 출생~16살 기간의 성장과정, 질병내용, 공부시키는 과정 등을 한시 형태로 적었다. 전체 분량은 60여쪽으로 이중 성장과정과 질병·사고와 관련된 것이 각 16건, 교육에 관한 것이 8건 등이다. 보통의 경우 육아일기는 부모가 아이를 대상으로 쓴다. 그러나 양아록은 특이하게도 할아버지가 손자를 대상으로 썼다. 가정사의 굴곡이 많았다. 이문건은 충북 괴산 태생 안동김씨 부인(돈이)과 사이에 6명의 자녀를 얻었다. 그러나 '온'이라는 아들과 '순정'이라는 딸만 성인으로 성장하고 나머지는 일찍 병으로 잃었다. 뿐만 아니라 아들 '온'도 이문건 나이 64살 때 '숙길'을 포함해 1남3녀를 남긴 채 병사했다. 이문건은 가문의 대가 끊길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고, 때문에 하나 남은 친손자 '숙길'에게 집착하게 된다. 참고로 숙길의 셋째 누이는 동래부사 순절도로 유명한 송상현의 부인이 된다. 이문건은 손자 '숙길'이 태어나
선사시대 사람들은 이른바 바닥식 노지(爐址)로 불리는 화덕으로 난방을 했다. 그러나 화덕은 일시적으로 난방을 할 수 있었으나 열을 저장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취사도 여의치 않았다. 화덕을 대신해 등장한 것인 '구운 돌' 뜻을 지닌 '구들'이다. 온돌도 거의 같은 뜻으로 '온'은 한자 '溫'에서 왔다. 고고학계에서는 구들이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발원, 한국, 만주, 중앙아시아, 일본남부 등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중·일 동양삼국의 구들문화는 기능면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구들을 부뚜막 용도로만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축열, 난방 기능의 거의 없다. 반면 한국에서는 부엌문화와 결합하면서 취사, 난방, 축열 등 다기능을 지니고 있다. 한강문화재연구원 오승환 연구기획실장의 논문 '우리나라 온돌기술의 발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구들은 시기별로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기원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나라 구들은 처음에는 벽면을 따라 한쪽에만 설치되는 '쪽구들' 형식이었다. 삼국시대에는 쪽구들 문화는 계속 유지됐다. 주요 유적지로는 청원군 낭성리가 있고, 안악 3호분에는 고분벽화가 남아 있다. 우리나라 구들문화
'일부이기기는 하지만, 대학생 MT에 엄마가 따라나서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인문학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도정일(사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이 우리나라 교육풍토가 만들어낸 속칭 '엄마주의' 현상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 상상력이 풍부한 창조적인 인간형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각분야 학문의 밑바탕이자 초입에 위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충북대 기초교육원이 지난 8일 오후 도 대학장을 초청, 학내 교수들을 상대로 '어떤 청년을 키우고자 하는가' 제목의 콜로키엄을 가졌다. 콜로키엄(colloquium)은 전문가 집단이 어떤 주제를 놓고 공동 토의를 벌이는 형식을 말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엄마주의', '디지털 원주민', '인문학적 실용성' 등의 신조어를 사용하며 지금의 교육 풍토를 비판했다. 그는 엄마주의에 대해 "모든 것을 '엄마'가 해결해주다 보니 우리 아이들 입에 '엄마 이것도 해줘'라는 말이 배여있다"며 "그 결과, 요즘 청소년들은 자기 판단력이 바탕이 된, 독립적인 개체로 성장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런 청소년들이 자기 우월성에 대한 표현으로 자신들을 '디지털 원주민'이라고 칭하고 있다"며 "그러나 미국 월가의
전회에 이문건이 유배 중임에도 불구하고 괴산에 집을 신축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괴산 새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상주목사와 경상도관찰사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문건은 전직 승정원 도승지 직함도 갖고 있었다. 때문에 관향 성주지역에서 나름의 예우를 받고 있었다. 묵재일기에는 성주 사족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는 장면이 등장한다. 다음은 1562년 9월 27일자 일기 내용이다. '내가 손자를 데리고 유향소에 가자, 참석한 사람이 30명이었다. 이유가 통문을 돌려 물품을 거두어서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은 것이다. 나를 대접하는 것을 명분삼아 모였다.'- 이문건 부의 원천은 노비와 전답이었다. 그는 많을 때는 남자종 83명, 여자종 50명 등 총 130여명의 노비를 거느렸다. 물론 이들의 상당수는 이른바 '신공노비'였고 때문에 괴산서 멀리 떨어진 충주, 보은 등에도 거주했다. '신공노비'는 주인집과 떨어져 사는 대신 매년 추수한 곡식의 절반 정도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비를 말한다. 이문건은 신공노비가 약속한 내용을 지키지 않으면 기르던 소를 끌어오기도 했다. 그렇다해도 노비 130여명은 매우 많은 규모다. 이문건도 당시 여느 양
전회에 이문건(李文楗·1494~1567)이 유배지 경상도 성주에서 노비들을 원격조종, 처가가 있는 우리고장 괴산에 집을 신축했다고 밝힌 바 있다. '1551년 7월 15일자: 서동이 괴산에서 돌아왔다. 목재를 계곡 근처로 끌어다 놓았으나 계곡의 물이 없어서 내려 보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듬해 4월 25일자: 오늘 괴산에서 기둥을 세운다고 하는데, 비가 오니 일이 좋지 않겠다.8월 12일: 집을 덮는 철장물을 가져갔다.'- 일기를 보면 26칸 기와집으로, 규모가 꽤나 큰 편이었다. 새로 지은 괴산집이 지금의 어느곳에 위치했는지는 확인이 어렵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지금의 문광면 일대에 위치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문건이 귀양을 가자 부인 안동김씨(김돈이)가 한양에서 친정집이 있는 괴산 문광면으로 내려와 이문건가의 재산을 관리하게 된다. 또 조카 이휘를 포함한 성주이씨 묘역이 문광면 유평터널 부근 야산에 존재하고 있다. 이문건은 성주 유배생활 중에 3번이나 괴산을 찾는 것으로 나타난다. 첫번째가 바로 새 집이 완공된 후였다. 그는 1552년 5월 22일부터 7일 동안 괴산에 머물다 성주로 돌아간다. 이밖에 그는 집수리를 할 때(1561)와 아들 장례를
충주 탑평리 유적 발굴을 계기로 일본 국보인 칠지도(七支刀)가 고대 충주에서 직접 만들어졌거나, 또는 충주에서 생산된 철덩어리를 재료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주장이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이같은 추정은 종래에도 종종 있어 왔으나 이번 발굴을 계기로 보다 적극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는 지난달 중순 국제조정경기장이 들어설 가금면 탑평리 발굴현장에서 설명회를 갖고 백제 대형 수혈주거지, 고구려 온돌 유구, 신라 건물지 및 석렬유구 등 모두 45기의 삼국시대 유구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소토(燒土·불에 탄 흙), 철재(slag), 철기제작을 위해 쌓아둔 철 덩어리, 가위, 망치등 제철과 관련된 고대 백제의 유물과 도구도 다량 확보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탑평리 발굴과 무관하게 지난 11월 이전에 이미 발표된 해동문화재연구원 김양훈씨의 '한성백제기 제철수공업과 관리'(2010년 10월)와 중앙문화재연구원 조용호씨의 '충주지역 피리형 가마의 특징과 축조배경'(2011년 10월) 등 두 편의 논문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김씨는 논문에서 '칠지도를 제작했다는 곡나철산(谷那鐵産)은 충주임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일본서기' 신
이문건(李文楗·1494~1567)은 조선 성종과 명종 사이를 산 인물로 호는 묵재, 본관은 경상도 성주다. 그는 그의 호를 딴 '묵재일기'를 32년간 쓴 것으로 유명하다. 학계에서는 조선전기 양반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3종류의 개인일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이문건의 묵재일기, 유희춘의 미암일기, 오희문의 쇄미록 등이 그것이다. 이들 일기의 행간을 하나하나 살피면 당시 양반들의 사유체계와 부축척 방식, 그리고 가정사의 시시콜콜한 사연을 손금보 듯 알 수 있다. 그는 73살 생애에 두 번의 유배생활을 경험한다. 그는 영남사림의 거두인 조광조 제자였다. 1519년 그 유명한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이때 다른 제자들의 외면과 달리 이문건 형제는 조광조를 문상했다. 이것이 빌미가 돼 2년 후 훈구파에 의해 형 충건은 유배당한 후 사사됐고, 이문건은 전라도 낙안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이문건에게는 조카 이휘라는 인물이 있었다. 장래가 촉명했던 그는 택현설, 즉 "어진 임금을 선택해서 세워야 한다"는 말을 했다가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문건도 택현설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고 지금의 성주로 '본향안치'를 당해야 했다. 본향안치는 유배형 중 가장 약한 형으로, 고향에서
충주 탄금호 국제조정경기장 내의 유적의 보존 방법을 둘러싸고 지자체와 학계의 의견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특히 백제 유구의 경우 전문가들이 현지 원형보존 의견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재위원들이 다른 곳으로 이전을 결정, 학자들 사이에도 갈등이 일고 있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와 중앙문화재연구원은 국제조정경기장이 들어설 가금면 탑평리 중앙탑 부근에서 발굴조사를 실시, 그 결과를 지난달 중순 발표했다. 당시 설명회에서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는 "백제의 대형 수혈주거지를 비롯하여 고구려 온돌 유구, 신라 건물지 및 석렬유구 등 모두 45기의 삼국시대 유구가 중첩되게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는 충주지역이 백제-고구려-신라로 이어지는 고대 삼국의 각축장으로서, 그 역학관계를 잘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라는 평가를 받았다. 유적의 중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전체 600m의 도랑 형태의 석렬 유구는 신라에 의해 대규모 도시건설이 있었음을 보여줬다. 특히 소토(불에 탄 흙) 및 철재, 철기 제작을 위해 쌓아둔 철 덩어리와 가위, 망치 같은 도구 등은 고대 백제의 철생산과 관련된 흔적으로 추정됐다. 따라서 이번 발굴은 일대가 주변지역의 풍부한 철과 편리한 내륙수로를 기반으로 고대
일본인이 독도 문제와 관련해 현재 일본이 내세우고 있는 샌프란스시코 평화조약 내용을 낱낱히 분석, 그 허구성을 폭로했다. 그는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문서인 이른바 '러스크 서한'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비판했다. 충북대 기초교육원(원장 박걸순 교수)은 지난 1일 귀화한 일본인 호사카 유지(세종대·정치학 박사) 교수를 초청, '역사적 사실로 본 독도' 제목의 특강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호사카 교수는 먼저 제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1945년 9월 8일 연합국 48개국과 일본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맺은 평화조약 내용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평화조약 중 독도에 관련된 내용은 △연합국 1~5차 초안: 독도=한국영토(46-49년) △일본정부, 미국무성 정치고문인 시볼드에 로비(49년 12월) △6차 초안: 독도=일본영토 등의 결론을 내린다. 이후 연합국들의 반대와 일본의 로비가 맞부딪치면서 △7차 초안: 독도=한국영토 △8~9차 초안: 독도=일본영토 △10~11차 초안: 독도=한국영토 △12차 초안: 독도=일본영토(51년 4월) △영국, 호주, 뉴질랜드 12차 초안에 강력 반대 등의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이와 관련해 일본
주민 생활권에도 이른바 물방울 이론이 작용한다. 조치원은 행정구역상 충남에 속하나 청주와 가깝기 때문에 청주를 생활권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옥천은 그 반대 경우다. 행정구역상 충북에 속하나 대전과 가깝기 때문에 대전을 생활권으로 하는 군민들이 많다. 이와 관련, 몇해전에는 대전광역시로 편입하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옥천은 행정명이나 편제에 있어서 도내 다른 어떤 시군보다 역사적으로 복잡한 변화를 겪었다. 옥천군의 신라 때 지명은 고시산군(古尸山郡), 경덕왕 때부터는 관성군(管城郡)으로 불렸다. 고려의 지방행정은 이른바 5도양계 체제였다. 5도는 행정, 양계는 국방 기능이 중요시됐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꽤나 불합리하나 당시는 북쪽(북계)와 동쪽(동계)을 군사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이런 배경하에 옥천은 고려 충선왕 때부터는 옥주(玉州)로 불렸다. 그러나 조선 건국기만 해도 옥천은 충청도에 속하지 않았다. 옥천이 지금의 모습처럼 충청도에 속하게 된 것은 조선 전기인 태종 때였다. 이때 보은, 영동, 황간, 청산 등도 함께 충청도로 편입됐다. '경상도 옥천(沃川)·보령(報令)·황간(黃澗)·영동(永同)·청산(靑山)을 충청도에 옮겨 예속시
"충청도 관찰사 권민수(權敏手)가 도내(道內)에 장문(場門)을 설치하겠다고 청하므로 호조(戶曹)에 의계(議啓)하도록 했더니, 또 각도에도 아울러 설치하자고 청했다."- 전회에 충청도관찰사 권민수(權敏手·1466∼1517)라는 인물이 건의, 우리고장에도 장시(場市·5일장)가 처음 들어서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갑자사화 때 이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직언을 하다가 영외(嶺外)로 유배됐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또 홍문관부제학이 되어서는 군정을 엄히 할 것, 간쟁(諫諍)을 받아들일 것, 기강을 바로 세울 것 등을 주청하기도 하는 등 강단있는 관료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는 사관으로부터 악평을 받은 인물로 유명했다. 심지어 당시 사관은 '술주정하다 죽었다'라고 졸기를 쓰기까지 했다. '충청도 관찰사 권민수가 졸하였다. 권민수는 심술이 심벽하고 불측하여 겉으로는 화평하나 속으로는 시기를 부려, 선류(善類)에 대해서도 속으로 시기하고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였다. 젊어서부터 글한다는 명성을 도둑질하여 명류에 끼었었고 또한 성격이 사나와 기세를 잘 부렸으며, 벼슬과 세력이 점점 높아지매 사람들이 더욱 두려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술주정하다가 죽었다.'- 사관(史官
'달아 높이 높이 돋으시어 / 어기야차 멀리멀리 비치게 하시라 / 어기야차 어강됴리 / 아으 다롱디리 / 시장에 가 계신가요 / 어기야차 진 곳을 디딜세라 / 어기야차 어강됴리 / 어느 것에다 놓고 계시는가 / 어기야차 나의 가는 곳에 저물세라 / 어기야차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악학궤범 권5에 실려 있는 작자 미상의 백제 가요인 '정읍사'(井邑詞)이다. 정읍사는 아내가 행상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높은 곳에 올라 남편을 기다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테면 망부가(望夫歌)다. 그러나 정읍사는 경제사적인 시각에서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적인 시(詩)가 된다. 남편의 직업이 '행상'(行商)이기 때문이다. 행상은 보통 봇짐장수인 보상(褓商)과 등짐장수인 부상(負商)으로 구분된다. 정읍사의 행상 남편이 보상인지, 부상인지는 내용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지금은 대형마트 등에 밀려 장시(場市)의 일종인 5일장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장시는 양민들의 유일한 교역장소이자 정보 너트워크의 공간이었다. 장시에 나가 막걸리를 곁들인 대화를 나눠야 이웃 동네를 비롯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따라서 혹자는 장시를 '조선시대 인터넷'이라
충북에서 대전으로의 인구이동은 많지만, 역으로 대전에서 충북으로의 인구이동은 상대적으로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충북도민은 서울보다 경기도로 더 많이 전출하는 등 인구 통계학적으로 봐도 속칭 'In 서울'이 쉽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충북대 이만형(도시공학과) 교수의 연구팀에 따르면 인구 이동은 목적지와 기원지 사이의 공간 효용과 매력도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이런 인구이동은 특정 지역의 역동성에 상당히 의미있는 영향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지역계획, 지역정책 등에도 상호 순환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교수팀은 이같은 인구통계학적 배경하에 지난 2001년과 2008년 충북 인구이동 특성을 비교·분석했다. 2001년 경우 전국 각지에서 충북으로 이동한 인구는 12만8천193명이었다. 이중 충북 내부에서 내부로의 이동은 7만8천917명으로, 전체 61.6%를 차지했다. 이 기간 동안 도내 인구 유입이 가장 많았던 곳은 청주 흥덕구>상당구>청원군 순으로 나타났다. 2008년 경우 전국에서 충북으로 이동한 인구는 19만4천85명으로, 2001년에 비해 51.4%(6만5천892명)가 증가했다. 이 가운데 충북 내부에서 내부로의 인구이동은 13만3천17명으로
상서(上書)는 일종의 민원서로, 백성들이 수령이나 관찰사에게 올리는 글을 말한다. 그 내용은 산송(山訟)과 효행(孝行)·탁행(卓行)의 정려(旌閭)를 위한 것이 주류를 이뤘다. 인원이 많을 경우는 연명하여 올리기도 했다. 상서를 접수한 관찰사나 수령은 이를 검토하고 그 처분 내용을 문서의 좌편 하단의 여백에 써놓았다. 이것을 '제음'(題音) 또는 '제사'(題辭)라고 불렀다. 수령은 처분한 내용을 상서를 올린 사람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관례였다. 상서는 수령에게 1차로 올리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만족한 답을 얻지 못하면 2차, 3차 계속 올렸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관찰사에게까지 올렸다. 이러한 상서는 당시의 사회사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된다. 사례는 많지 않으나 시골 지식인이 직접 임금에게 상서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상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임금의 집무공간에까지 전달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정황상 신문고 제도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임금에게 좋은 내용의 상서를 올려, "역마로 모셔오라"는 소리를 들은 인물이 있다. 바로 우리고장 옥천의 곽유(郭瑜)라는 인물이다. 그는 실록에 딱 한번 이름이 보일 뿐 사마방목(과거 합격자 명
조선시대 죄인을 심문하는 방식의 하나로 추국(推鞫)이 있다. 추(推)는 죄를 심문한다는 뜻이고, 국(鞫)은 죄인에게 물리력을 쓰면서 죄를 추궁하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고문을 동반한 심문이다. 이와 달리 물리력을 쓰지 않고 심문하는 것은 평문(平問)이라고 불렀다. 추국 중에서도 강상(綱常)을 어긴 죄인에 대해서는 이른바 '삼성' 추국을 했다. 이는 임금의 특명에 따라 의정부·사헌부·의금부 등 세 관원이 합석하여 죄인을 심문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는 삼강오륜을 어긴 사람은 강상죄인(綱常罪人)이라고 해서 중죄로 다뤘다. 조선 세조 때를 산 인물로 최청강(崔淸江·?~?)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강상윤리라는 시대의 불운을 만나 관직생활을 망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영의정 권람의 말이다. "최청강(崔淸江)은 천안군사에 제수되었는데 실상이 없습니다. 연산(連山)에 있으면서 거짓으로 노모를 따른다고 하여 서울에 살면서 사직하였고, 어미가 죽어서는 분상(奔喪)하지 않고 길복 차림으로 연산에 돌아갔으니, 천총(天聰)을 기망한 것이 매우 심합니다."- 인용문중 '분상'은 먼 곳에서 부모가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밖에 '군사'
조선은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영의정을 비롯한 삼정승이 응대했다. 반면 명나라는 환관을 조선국의 사신으로 보냈다. 이같은 현상은 양국 관계가 사대(事大)와 조공무역을 바탕으로 맺어졌 때문에 발생했다. 명나라는 사대를 약속한 조선을 국가 실체로 인정해 주는 대신 은(銀), 말(馬), 처녀 등의 조공을 요구했다. 15세기 무렵 조선에 자주 온 명나라 사신으로 황엄(黃儼·?-?)이 있다. 그는 황해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여의고 명나라 국경을 넘어가 잡일을 하면서 학식을 쌓았다. 그는 본래 평민 출신이라 예의범절을 잘 몰랐고, 따라서 조선에 오면 자주 거만하게 굴었다. '임금이 태평관에 나아가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환관(宦官) 황엄 등의 행동거지가 무례하므로, 임금이 뜻에 맞지 아니하여 잔치를 재촉해 파하였다.'- 사대를 약속한 조선은 환관출신 사신이 중국으로 돌아갈 때면 임금이 몸소 궁궐 밖까지 나가서 이들을 전송해야 했다. 말 그대로 굴욕으로, 이날은 황엄이 제주도에 있던 구리 불상을 건네받은 후 귀로에 올랐다. '황엄 등이 동불(銅佛) 3좌를 받들고 경사로 돌아가니, 임금이 반송정(盤松亭)에서 그들을 전송하였다. 우군총제 조면(趙勉)을 보내어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 강점을 위해 을사늑약 30년전에 이미 해안뿐만 아니라 내륙도 비밀 정탐, 군사지도를 제작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여기에는 충북도내도 대부분 포함돼 있어, 지역의 공분까지 불러 일으키고 있다. 성신여대 대학원 양윤정씨가 얼마전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19세기 후반 한반도 비밀군사지도'로 박사학위 논문을 받았다. 일제는 한반도를 강점하기 위해 지난 1870년대 조선 해안을 측량한 내용은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등 널리 알려져 있다. 운요호사건은 일제가 해안 측량을 핑계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를 하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일본 참모본부가 자국 장교를 비밀리 한반도에 침투시켜 제작한 내륙 비밀군사지도는 다양한 설은 있었으나 그 소장처가 확인되지 않았었다. 양박사는 미국 의회도서관이 일제가 만든 비밀군사지도를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 이를 바탕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했다. 논문에 따르면 일본 참모본부는 1878~1891년 사이에 7명의 자국 측량 장교를 한반도에 침투시켜 '外邦圖'(외방도)로 명명된 한반도 군사지도를 비밀리에 작성했다. 7명의 측량 장교는 1차(1878~1883)와 2차(1884~1891) 시기로 나뉘어져
속보= 충북대 생활과학연구소(소장 권수애 교수) 주최한 '반찬등속' 관련 학술대회가 각계 전문가 등이 참석한 가운데 18일 오후 개신문화관에서 열렸다. 본보는 올봄(5월 25일자) 반찬등속에 관한 내용을 처음으로 보도, 지역 전통음식과 사학계의 관심을 끈 바 있다. '청주의 식생활문화 조명'을 주제로 한 이날 학술대회에는 충북대 김향숙, 세명대 박경래, 영동대 지명순, 충북대 김의환 교수 외에 경북 양양군청의 박승길 담당 등이 발표자로 참석했다. 발표 주제는 '반찬등속의 음식문화적 가치', '반찬등속에 나타난 청주지역 방언', '반찬등속의 조리학적 가치', '반찬등속과 청주 상신리의 성씨와 인물', '음식디미방-340년 전 반가음식의 환생' 등은 순으로 진행됐다.(이름 언급 순) 한범덕 청주시장은 축사에서 "반찬등속은 청주의 전통음식을 복원하는데 있어 획기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을뿐 아니라 역사, 어문 등 1백년전 청주의 근대문화 공간을 살필 수 있는 정보도 풍부히 담고 있다"며 "앞으로 활용 방법을 다각도로 찾아보겠다"고 밝혔다. 이날 발표된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발표 원문을 가감없이 요약·게재한다. ◇'반찬등속의 음식문화적 가치'(충북대 김향숙 교수
어제(17일)가 제 72회 순국선열의 날인 가운데 청원출신 독립운동가 정순만(鄭淳萬·1876~1911)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충북대학교에서 열렸다. 독립기념관과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소장 김춘실 교수)는 이날 '정순만의 생애와 민족운동의 조명'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특히 금년은 정순만의 순국 1백주년이 되는 가운데, 그와 관련된 일제측 비밀문서가 사진 형태로 처음 공개돼 또 다른 관심을 끌었다. 정순만은 당시 독립운동계 사이에 이승만, 박용만 등과 함께 '삼만'으로 불렸다. 또 신채호, 이상설, 유인석 등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등에서도 활동하면서 이른바 '충북출신 연해주 4인방'으로도 불렸다. 그러나 정작 충북도내는 물론 그의 출신지인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에서 조차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적은 편이다. 이런 가운데 정순만은 각종 자료 인물란에 '안창호·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했고, 연해주는 물론 미국에서도 독립운동을 벌였다' 정도로 적혀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을사오적의 암살을 시도했다 △헤이그 밀사를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안중근 후속처리를 한 인물이 정순만이다 등 일부 새로운 내용과 함께 보다 심화된 연구들이 소개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