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김익수(金益壽·?~?)라는 인물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일반에 알려진 어사는 암행으로 비리를 적발하는 등 사정의 상징처럼 돼 있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 전기는 그렇지 않았다. 푸대접을 당하는 장면이 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그 주인공의 한 명이 김익수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의 일화다. '신은 말을 타고 다니느라 피곤한데다가 밥먹을 겨를도 없어서 기갈이 심했으나 전혀 음식을 공궤(供饋)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대로 밤을 새웠는데 아침에도 역시 이와 같았으므로 또 밥을 먹지 못한 채 나왔습니다. (…) 이처럼 대우할 수는 없는 것인데, 사체가 지극히 매몰스럽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형조참판에 이어 우리고장 충청도관찰사 그리고 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관상감제조에 오르는 등 관료의 길은 비교적 순탄했다. 관상감은 천문·지리·달력, 측후 등에 관한 일을 전담했던 관서를 말한다. 그러나 그는 아내 때문에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았다. 그의 아내는 질투심이 병적으로 심했다. "내가 헌부의 죄수들을 보니 김익수의 처가 그의 계집종 봉황(鳳凰)의 남편을 시켜 야간에 몰래 자식이 있는 익수의 첩이 있는 곳으로 가게 하여 간사(姦事)를 저지르게 한 것 같
조선은 농업국가였고, 그중에도 벼농사를 가장 중시했다. 그래서 '한 나라의 정치 중 농사보다 더한 것이 없고, 그 농사의 요체 중 수리(水利)보다 더한 것이 없다'라는 표현이 생겨났다. 지리지는 수리와 관련된 내용으로 제언(堤堰)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제언은 인공적으로 쌓은 저수지나 보를 말한다. 지금의 저수지는 그 규모가 무척 큰 편이다. 따라서 조선시대는 방죽도 제언으로 표현했다. 벼는 마지막 추수기를 제외하고 생육기간 내내 물을 필요로 하는 작목이다. 때문에 벼농사를 잘 지으려면 제언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사료에는 제언 축조를 게을리한 고을 수령에게 곤장을 때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태종 18년의 실록 기사에는 우리고장 충청도와 관련된 내용도 등장한다. '청주 목사 김매경·판관 윤번·충주판관 장안지·진천 현감 진운수·죽산 현감 김종서에게 각각 태(笞)50대를 때려서 환임(還任) 시키니(…) 행대(行臺) 정길흥이, 김매경 등이 제언을 수축(修築)하지 않았다고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수령'(守令)은 군수와 현령의 앞뒷말을 취한 단어로, 지금의 시장·군수와 같은 지방관을 일컫는 표현이다. 이들에게 곤장을 쳤다는 것은 당시 조정이 제언을
조선 선조 정권은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1551~1592)의 순절 사실을 2년 뒤에야 공식 확인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전쟁 중임을 감안해도 당시 정권의 무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선조를 평가하는 또 다른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내년(2012) 임진왜란 발발 7甲(60x7)을 앞두고 관련 학술대회가 지역역사 전문가와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주 청주 고인쇄박물관에서 열렸다. '중·북부지역 임진란 항쟁활동의 역사적' 제목의 이날 세미나에서 부산교대 오인택 교수는 '충렬공 송상현 敍事의 사회문화적 성격'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에 따르면 동시 동래부사 송상현의 순절 사실은 2년 뒤에야 당시 조정에서 공식 확인했다. 오 교수는 그 근거로 선조실록 25년 11월 25일자에 실려 있는 기사 내용을 들었다. 먼저 선조 임금이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日+卒·1547~1615)에게 "정발(鄭撥)과 송상현(宋象賢)은 과연 죽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김수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정발과 송상현이 혹자는 죽지 않았다고 하지만 죽은 게 틀림 없습니다. 잘못 전해진 말 가운데 심지어는 송상현이 적장이 되었다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포위를 당했을 때 홍윤관
괴강 건너편 괴산읍 능촌리에 충민사(忠愍祠)라는 사당이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를 김시민(金時敏·1554∼1592) 장군의 위패만을 모신 사당으로 알고 있다. 김시민은 임란 종전후 '육지의 이순신'으로 불릴 정도로 명장이었다. 그는 왜적 2만명을 맞아 불과 3천여명의 병력으로 7일간 진주성에서 일진일퇴 공방전을 벌였다. 비록 적의 유탄을 맞아 숨지기는 했으나 진주성을 방어해 냈다. 그러나 충민사는 단수가 아닌 복수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또 다른 주인공은 김제갑(金悌甲·1525∼1592)이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원주목사로 있었다. 그는 왜장 모리가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 원주를 침공하여오자 가족과 주민을 이끌고 경내의 요새인 영원산성으로 들어가 지구전을 벌였다. 그러나 70살이 거이 다 된, '고령의 문관'이었던 거는 산성의 허점을 틈탄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됐고, 부인, 아들 등 전가족이 몰살됐다. 사실 그가 전장에서 최후를 맞은데는 불운이 크게 작용했다. 방금 '고령의 문관'이라고 표현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고령인 관계로 '임지를 교대하라'는 명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서쪽
전회에 백두대간 운하사업을 언급한 바 있다. 당시 경세가 하륜도 다음과 같은 말로 적극적인 찬성을 했으나 실행으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역시 엄청난 규모가 발목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윤이 말하였다. "기쁨으로 백성을 부리고, 백성을 적당한 시기에 부리는 것은 예전의 도(道)입니다. 만일 의리에 합한다면, 비록 칼날에 죽더라도 또한 분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쁘게 하는 도리는 창고를 열어서 양식을 주고 밤에는 역사를 쉬게 하여 피로해서 병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역사'는 세곡선에 올라 노를 져었던 역부(役夫)를 의미한다. 이때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하고 있던 인물이 한옹(韓雍·1352∼1425)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씨(韓氏)는 '청주'를 단일 본관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 청주한씨는 한란 이후 곡산(谷山), 평산, 안변, 한양, 당진 등 한때 10여 본으로 분관했다. 그러나 지금은 곡산을 제외하고는 모두 환원됐다. 따라서 현재의 한씨는 엄밀히 말하면 청주, 곡산 등 2개의 본관이 존재하고 있다. 한옹이 바로 곡산을 관향으로 갖고 있다. 현재 곡산 한씨는 전국적으로 4천9백여명(1천5백여 가구·
조선초기 경상도 세곡(稅穀)은 마산창 등 남해안 3창에 모아져 서해를 거쳐 한양 경창으로 운송됐다. 그러나 바닷길로 운송하다 보니 사나운 바람을 만나 조운선이 침몰하는 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특히 태종 3년(1403)의 침몰 사고는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무려 34척의 배가 동시에 침몰했다. '경상도의 조운선 34척이 해중에서 침몰되어, 죽은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만호(萬戶)가 사람을 시켜 수색하니, 섬에 의지하여 살아난 한 사람이 이를 보고 도망하였다. 쫓아가서 붙잡아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이 고생스러운 일에서 떠나려고 한다" 하였다.'- 실록은 이날 침몰 사고의 재산손실과 인명희생 규모를 "쌀은 만여 석이고, 사람은 천여 명"이라고 적었다. 태종은 이때부터 경상도 세곡을 바닷길이 아닌 육로로 운반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태종은 생각이 대범했다. 그는 충청도와 경상도 사이의 백두대간에 운하를 뚫어 세곡을 운반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기 백두대간에 운하를 뚫어 남한강과 낙동강 수계를 연결하는 구상을 한 바 있다. 결국 환경론자들의 반대 등으로 인해 실행하지 못했지만, 이 아이디어의 원조는 조선
경술국치에 분개해 자결한 괴산지역 인물이 익히 알려진 홍범식 외에 안숙(安潚)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그 자결 방법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목매는 것 등이 아닌, 투강(投江)이어서 또 다른 방향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사연구회와 충북사학회가 얼마전 '대한제국기 충북 괴산의 사회경제 구조와 위당 안숙의 경세론'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충북대 박걸순(사학과) 교수는 '안숙(1863~1910)의 경세론과 자정 순국'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박교수에 따르면 안숙은 고종 31년(1894) 과거에 급제하나 뚜렷한 관료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사돈이자 외척인 독립운동가 이상설의 추천으로 성균관 직강(종5품)을 잠깐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선비로서 언젠가 나라가 자신을 부를 것에 대비, 꾸준히 경세가(經世家)적인 면모를 유지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問形'(문형), '要算'(요산), '非有子問答'(비유자문답) 등을 포함한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그는 '문형'에서 자신이 공자의 정통을 흠모하고 주자의 훈계를 아름다워한다고 했고, '요산'에서는 이른바 自新自强策(자신자강책)을 논의했다. 그리고 '있지도 않은 사람의 문답'이라는 뜻인 '非有子
고려 공양왕 때에는 말 한마리를 팔면 노비를 두세명 살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초에는 14세~40까지의 노비로는 무명 400필, 14세이하, 40이상의 노비로는 무명 300필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말(馬)의 값은 450필이었다. 노비가 말보다 더 싼 셈이었다. 이밖에 여종을 팔 때애는 뱃속의 태아까지 값을 쳐서 받았다. 16세기 인물인 미암 유희춘은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자 열살짜리 사내종에서부터 예순일곱된 늙은 계집종까지 모두 여섯명 노비를 상으로 주었다. 우리고장 보은 출신으로, 조선 전기의 홍윤성(洪允成·1425~1475)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종을 막 대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특히 종의 목숨을 하찮게 여길 뿐만 아니라 겁탈하는 모습이 실록이 자주 등장한다. 이때 생겨난 속담이 '종년 간통은 누운 소 타기' 였다. '시첩(侍妾)·노복(奴僕)이 조금이라도 어기고 거슬리면 문득 용서하지 않고, 궁검(弓劍)을 쓰기까지 하였으며, 아내 남씨에게 자식이 없어서 같은 고을의 사족 김자모(金自謀)의 딸을 강제로 취하여 장가들었다'.- 노비 목숨을 경시한 대표적인 사례로 이른바 '용석(龍石)의 사건이 있다. 그는 사랑하던 양반집 종년을 데리고 도망갔으
지리서는 말 그대로 당시의 지리 환경과 문화에 대한 인문적인 기록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수정할 내용이 반드시 생겨나게 된다. 세종 때의 관찬 지리서로 '동국여지승람'이 있다. 이를 새롭게 수정·보완한 것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제목에 '新增'(신증)이라는 표현이 붙은 것은 수정·보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행(1478∼1534)이 진전문(進箋文)과 서문(序文)을 쓰는 등 사실상 대표저자 역할을 했다. 진전문은 책의 성립 과정을 알리는 문장을 말한다. 이행은 용재집을 남길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그러나 이행은 유배와 이배를 거듭하고 또 평안도 유배지에서 최후를 맡는 등 불우한 삶을 살았다. 첫번째 시련은 1504년 갑자사화 때 홍문관 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 복위를 반대한 것에서 찾아왔다. 그는 이 사건으로 곤장 60대를 맞고 우리고장 충주로 유배됐다. '전교하기를, "승지 박열·이계맹은 금부에 가서 홍문관 원에게 형장 때리는 것을 감독하여 외방에 부처(付處)하게 하라. 박안성은 장형을 속받고 진잠에 부처하고, 응교 최숙생은 장 60을 때려 신계에 부처하고, 부
과거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가 실려 있었다.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 저자로, 목가적이면서 권농(勸農)의 의미로 해석됐다. 남구만이 이 시조를 지은 동기는 완전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1689년 그는 숙종의 뜻을 거스르고 희빈장씨의 소생인 균(均)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역린을 건드린 것으로, 그는 지금의 강원도 동해시로 유배됐다. 동해 사람들은 이때 그 유명한 '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내용의 시조가 지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남구만 사당이 남아 있는 경기도 용인시에서는 낙향했을 때 '동창이 밝았느냐'를 지었다고 주장, 역시 같은 내용의 시조비를 세웠다. 이와는 별개로 1920년대까지 창으로 불려진 내용은 요즘 교과서에 실린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동아일보 1929년 9월 29일자 시조 소개란에 실린 내용이다. '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질이 우지진다 / 소치는 아희놈은 상기아니 일엇느냐 / 뒷뫼에 사래 긴 밧흘 언제 갈려 하느니.' '노고지리'를 '노고질', '아이'를 '아희놈', '재 너머'를 '뒷뫼'로 표
조선 시대에도 노비는 소유주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눴다, 다시 주거 형태와 신역의 부담 형태에 따라 각각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뉘었다. 주인집에서 잡역에 종사하는 노예를 솔거노비, 관청이나 주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노예는 외거노비라고 불렀다. 외거노비는 약간의 자유를 누리는 대신 주인에게 곡식, 베 등 일정한 공물을 바쳐야 했다. 이를 신공(身貢)이라고 불렀다. 노비는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으로 물건처럼 취급됐다. 가축이나 토지에 비견해 '말하는 재산'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따라서 세는 단위를 '名'(명), '員'(원)이 아닌 '口'(구)라고 했다. 공노비 중에 선상노(選上奴)라는 노비가 있다. 말 그대로 지방에서 선발하여 중앙으로 올려보내는 노비를 일컫는다. 이들 선상노는 관원의 수행, 각궁의 잡역, 성상(城上), 방직(房直), 고직(庫直) 등을 담당했다. 성상, 방직, 고직 등의 표현이 다소 생소하다. 성상은 각 관서의 소장기물을 맡아 간수하던 노예, 방직은 관청의 심부름꾼으로 달리 '방지기'라고도 불렀다. 고직은 창고를 지키던 노예를 말한다. 실록에 우리고장 백성이면서 군복무하듯 서울로 올라간 선상노의 사례가 더러 등장하고 있다
해발 1,389m의 높은 산 암반에 누가, 어떤 이유로 바둑판을 새겼을까. 한 사업가가 암반 바둑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아 관심을 끌고 있다. 박주성(57) 씨가 얼마전 '전통 조경적 관점으로 본 암각 바둑판의 입지와 장소 특성'이란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특히 논문에는 충북에 존재하는 암반 바둑판도 모두 등장, 지역 애기가들의 관심도 크게 끌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암반에 새긴 암각(巖刻) 바둑판과 이동이 가능한 석국(石局) 바둑판이 총 18개 존재하고 있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충북·강원·전북 각 4개, 경남 2개, 서울·울산·전남·북한에 각 1개씩 존재하고 있다. 충북에는 사로암 돌바둑판(충주 살미면 공이리), 사인암 암각바둑판(단양 대강면 사인암리), 선국암 암각바둑판(괴산 칠성면 사은리), 소백산 신선봉 암각바둑판(단양 가곡면 어의곡리) 등이 존재하고 있다. 입지 유형별로는 산봉형이 2개, 계류형이 16개인 가운데, 전체 18개 가운데 15개 바둑판이 백두대간이나 그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암각 바둑판과 주변에 새긴 글자(각자)는 降仙(강선), 洞天(동천), 洞門(동문), 仙東(선동), 仙局(선국), 四仙
우리나라 회화사를 논할 때 조선 전기의 최고 작품으로 단연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가 꼽히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엄밀히 말하면 안평대군 이용(李瑢·1418∼1453)이 기획하고, 안견이 그린 작품이다. 안견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안평대군은 그에게 이런 종류의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몽유도원도이다. 이런 사연 때문에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의 산문과 시가 곁들여져 있다. 전회에 이현로와 정분에 대한 서술을 한 바 있다. '이현로가 벼슬이 떨어져서 충청도관찰사 안완경(安完慶)·체찰사 정분을 따라 충주(忠州)에 이르렀는데, 미처 말에서 내리기 전에 잡는 자가 끌어내리어 묶어서 담 그늘에 두었다.'- 인용문 중에 안완경(安完慶·?∼1453)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관찰사 안처선의 아들로 두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만큼 전도가 양양했다. 안평대군과 함께 거명됐다는 것이 다소 불안하다. 안완경이 어떻게 해서 안평대군과 친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때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해 안평대군은 문신, 수양대군은 무신을 포섭하고 있었다. 안평대군이 안완경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용(瑢)이 정자양(鄭自洋)을 시켜 충
"공공철학은 모든 인류가 함께 행복을 창조하는 것이다" 한국윤리교육학회(회장 김용환 충북대 교수) 2011년도 추계 학술대회가 27일 충북대 개신문화관에서 열렸다. 특히 이날 학술대회에는 공공철학자로서 세계적 석학의 반열에 오른 일본 공공철학공동연구소 김태창(전 충북대교수·사진) 소장이 기조 강연을 해 주위의 큰 관심을 끌었다. 김 소장은 '공공철학과 공공윤리' 제목의 강연에서 △공공철학의 정의 △인의예지 사상 △홍대용의 한사상 등을 집중 언급했다. 그는 전자에 대해 "개인이 생명, 생존, 생업의 기반 확보를 통해 안전, 안심, 안락한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바로 공공철학"이라고 밝혔다. 인의예지 사상에 대해서는 "우리 몸에 뿌리와 열매가 있다고 가정할 경우 마음은 뿌리, 인의예지는 열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며 "그러나 인의예지는 몸밖에서 이뤄지는 실천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후자에 대해서는 "짐슴에게 지혜가 없고 초목에게 감각이 없다고 해서 인간이 천지간에서 가장 귀하다고 말할 수 없다"며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과 물(物)은 모두 균등한 존재일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서경(書經)에 나오는 다섯 가지 수신, 즉 '얼굴은 공손하게', '말은 바르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 즉 바람을 막고 물을 끌어들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풍수에서는 바람은 기(氣)를 흩어지게 하고, 물은 재화를 불러온다고 보고 있다. 사실 농사를 짓는데 있어 물을 얻지 못하면 재화를 얻지 못한다. 풍수상 물은 홀로 움직이지 않고 산과 함께 움직인다. 때문에 풍수를 '땅의 관상학'이라는 뜻으로 상지법(相地法)이라고도 한다. 이와 관련, 풍수는 산의 흐름인 맥을 '용'(龍)으로 표현했다. 풍수상 용은 그 모습에 따라 바르게 뻗은 정룡(正龍)과 치우쳐 뻗은 방룡(傍龍) 그리고 생기가 있어 보이는 진룡(眞龍)과 그렇지 않은 가룡(假龍) 등으로 구분한다. 이상에서 보듯 풍수는 주관적인 성격을 많이 지니고 있다. 조선시대 때 천기(天氣)에 해당하는 풍수 내용을 발설해, 천지풍파를 일으킨 인물이 있다. 바로 이현로(李賢老·?∼1453)다. 수양대군 세조가 안평대군 이용에게 하는 말이다. "먼저번에 이현로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궁(宮)을 백악산(지금의 북악산 지칭) 뒤에 짓지 아니하면, 김보명의 말과 같이 정룡(正龍)이 반드시 쇠하고 방룡(傍龍)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하였는데, 내가 이현로에게 말하여 여러 정승에게 고하라고 했는데, 말
괴산군 칠성면의 산막이 옛길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괴산군에 따르면 주말이면 평균 1천500~1만대의 승용차가 산막이 옛길을 찾고 있다. 따라서 이를 사람수로 따지면 주말평균 5천~1만명이 산악이 옛길을 찾고 있는 셈이 된다. 산막이 옛길은 칠성댐 건너편인 괴산 칠성면 외사리 사오랑 마을에서 칠성호를 따라 남쪽 방향으로 시작된다. 약 3㎞ 정도의 거리로, 옛길 끝은 칠성면 사은리 '산막이' 마을이 된다. 마치 영월 청령포를 연상시키는 산막이 마을에는 과거 분청사기 가마가 위치했고, 이를 굽던 도공들은 가마 옆에 산막을 치고 기거했다. 산막이라는 마을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따라서 댐 담수로 위치가 위로 올라오기는 했지만, 지금의 산막이 마을 옛길은 과거 도공들이 왕래하던 길이었다. 그 끝에 노수신(盧守愼·1515~1590) 적소(유배지)가 위치하고 있다. ◇고행의 상징 유배용어 장배, 위리안치, 절도안치, 본향안치, 적소, 귀양살이 등 유배 용어는 그 표현이 다소 어려운 면이 있다. 장배( 杖配)는 유배를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곤장을 맞고 떠나는 것을 말한다. 죄의 경중에 따라 60~100대형이 추가됐다. 위리안치(圍籬安置)는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조선은 누에치기를 무척 중요시했다. 누에에서 생산된 견사가 비단의 원료가 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정은 매년 친잠례(親蠶禮), 선잠제향(先蠶祭享), 잠령제(蠶靈祭) 행사를 가졌다. 전자는 왕비가 궁궐에서 직접 누에를 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왕비가 직접 모범을 보임으로써 양잠을 장려하는 의미가 있다. 이중 누에고치를 직접 거두는 의식은 수견의(收繭義)라고 불렀다. 선잠제향은 매년 늦은봄 길한 뱀날(巳日)에 양잠신인 서능씨(西陵氏)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던 행사를 일컫는다. 잠령제는 매년 5월초 봄누에가 시작되기 전에 전국 잠사인들이 누에의 혼을 위로하고 풍잠을 기원하는 제를 말한다. 조선이 양잠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건국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성계가 "농상을 권하고 학교를 일으키라"는 하명을 직접 내린다. "농상(農桑)은 왕정(王政)의 근본이며, 학교는 교화하는 근원이다. 즉위한 이래로 여러 번 교서를 내려 농상을 권하고 학교를 일으키라는 뜻을 보였으나, 수령은 거행하는 데 힘쓰지 않고 감사는 더 고핵(考劾)하지 않아서 모두 실효가 없으니, 내가 심히 염려된다."- 양잠과 관련된 지명으로 서울에 '잠실'(蠶室)이 남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과거 누
고개 이름도 생물과 마찬가지로 흥망성쇠의 변화를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특정지역의 경우 특정 고개명이 유독 많이 존재하는 등 학문적 연구과제가 꽤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제 21회 한국지명학회(회장 박병철교수·사진) 전국학술대회가 지난 21~22일 서원대 미래창조관에서 열렸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백제어 연구의 국내 최고 권위자인 도수희 충남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전국 지명 전문가들이 대거 참석했다. 지면 관계상 일부를 소개하면, 박 교수의 '한국 지명의 후부요소 발달과 분포에 관하여' 논문이 대중성을 띄고 있어 비교적 접근이 쉬웠다. 그의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개 이름은 전부요소(일명 성격요소)와 후부요소(〃분류요소)로 구성돼 있다. 가령 청주 '밤고개'라는 지명을 예로 들 경우 '밤'은 전부요소, '고개'는 후부요소가 된다. 전부요소에는 명명자의 의식과 당시 문화적 세계관이 들어가 있는 반면 후부요소는 보수적 성격을 지니면서 잘 변하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박교수는 이중 삼국사기 지리지(1145년),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 여지도서(1757~1765년) 그리고 한국지명총람(남한·1970년대 전후)과 조선향토대백과(북한·〃) 등에 등장하는
세종대왕의 국가통치에 대한 열정은 실로 다방면에까지 뻗쳤다. 그중에는 세정(稅政)에 대한 개혁도 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과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 등이 이때 탄생한다. 전분육등법은 말 그대로 토지 비옥도를 여섯 등급으로 나누어 전세(田稅)를 걷는 것을 말한다. 연분구등법은 그해 농사의 풍흉을 9등급으로 나누어 전세를 거둬들이는 것을 일컫는다. 이 경우 최고 풍년을 들었을 때는 '上上年', 가장 흉년이 들었을 때는 '下下年'으로 표현됐다. 충북은 도세가 미약한 편이다. 때문에 중앙에서 어떤 행정적인 시험을 하고 싶을 경우자주 그 첫번째 대상지가 됐다. 세종이 두 전세제도를 시험한 곳 역시 충청도, 그중에서 청안현이었다. 시험 과정은 1년 동안 매우 치밀하게 진행됐다. 먼저 판관 등을 청안으로 보내 땅의 비옥도를 등급으로 메길 수 있는지를 알아보게 했다. '경차관으로 내자 판관 박회·사직 조욱생 등을 청안현에 보내어 그곳의 전지의 품등(品等)을 분류하게 하였다.'- 그 다음에는 정인지, 김종서 등 당대 거물급 인사를 파견됐다. 이는 세종이 두 전세법에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다음 내용은 눈여겨 볼 부분이 있다.
흔히 '천방지축마골피'를 희성이자 천계(賤系)를 대표하는 성씨로 알고 있는 경향이 많다. 근거가 없는 설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나타난 현상이다. 일제 강점기가 돼서야 과거 접할 수 없었던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이 외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영향으로 각 성씨들 사이에 족보를 만들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고, 이때 조선총독부 산하 일제 고등경찰이 앞서 언급한 '천방지축마골피' 설을 퍼트려 우리 민족을 이간시키려 했다는 설이 있다. 축씨와 골씨가 지금도 존재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천씨는 '하늘 천(天)'자와 '일천 천(千)'자 등 두 성씨가 사용되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천(天)씨는 2천년 기준으로 밀양 등 5개 본관에 1천여명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정조 때 천명익이라는 인물이 진사시에 합격한 것으로 봐서 천계는 아니다. 영양 천씨(潁陽 千氏)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들어온 성씨로, 중시조 천만리가 자헌대부와 화산군에 책봉됐다. 역시 천계가 아닌 것으로 봐야 한다. 방씨도 대표격인 온양방씨(溫陽方氏)의 경우 중시조로 알려진 방운이 고려 성종 때 온수군에 봉해지자 온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남양 방씨(南陽 房氏)는 고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는 혼동되는 면이 있다. 한자가 둘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 설명해 주고 있다. 누각 할 때의 '다락樓' 자는 마치 이층집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누각은 1층은 기둥만 세우고 2층에 마루를 깐 건축물로, 과거 관아에서 부속 건물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비해 정자는 규모가 누각보다 작으면서 1층으로만 지어졌다. 과거 선비 개인의 피서나 음풍농월 장소로 주로 이용됐다. 누각과 정자는 다르면서 같은 점이 있다. 바로 벽과 문이 없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조선초기 문신 손순효(孫舜孝·1427∼1497)는 물재집에 '樓虛則能納萬景 心虛則能容衆物'이라는 문장을 남겼다. '누각은 비어 있어야 주변의 많은 경치를 불러들일 수 있고, 마음도 비워 있어야 여러 사물을 포용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우리 선조들은 취경(取景) 즉, 경치를 불러들이기 위해 누정(樓亭)에 벽과 문을 설치하지 않았다. 이는 '마음을 비워야 선행을 쌓을 수 있다'는 불교 선사상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청풍과 한벽루의 역사 충숙왕 4년(1317) 우리고장 청풍현 출신의 '청공'(淸恭) 스님이 왕의 스승(王師)이 됐다. 바로 한벽루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로, 이
삼국시대에도 성(姓)은 존재했으나 지배층 일부에 국한된 것이었다. 우리나라 성씨제도는 고려태조 왕건이 지방호족 세력을 끌어안기 위해 이른바 사성(賜姓) 정책을 시행하면서 본격화됐다. 특히 고려 문종 9년(1055) '성씨가 없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이 공포되면서 성의 보편화가 어느 정도 이뤄졌다. 성씨 제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족보다. 족보는 핏줄에 대한 종적 기록이지만, 의도적인 대외 과시용 성격도 강하다. 이 때문에 상당수 족보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가 고시조이고, 고려조 △△△가 중시조이다라'는 식으로 유구하게 표현된다. 물론 사실이 아닌 경우도 많다. 고려의 의종대의 사료에 "옛날에는 족보가 없어 조상의 이름을 모두 잃었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는 고려 전기까지는 최소한 족보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후부터 가문 과시용 족보가 많이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조상을 바꾸는 것은 환부역조(換父易祖)와 남의 조상에 자신을 이어붙이는 가탁(假託) 현상이 일어났다. 조선시대는 족보에 대한 불법행위는 강상윤리로 다스렸다. '삼사에서 아뢰기를, 심상운이 환부 역조(換父易祖)한 것과 같은 것은 곧 인륜(人倫)의
1백년전 충북 괴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의 궁금증을 풀 수 있는 학술대회가 충북대에서 열렸다. 한국사연구회(회장 권태억)와 충북사학회가 지난 15일 공동으로 충북대 개신문화관에서 '대한제국기 충북 괴산의 사회경제 구조와 위당 안숙(安潚)의 경세론'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가졌다. 이날 학술대회는 1900~1905년의 대한제국기에 작성된 광무 양안(量案·일종의 토지대장)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일반에 다소 생소한 광무양안에는 토지 소유자와 경작자, 지명, 가옥 위치와 크기, 관청, 물레방아, 주막 등 당시 사회·문화상을 알 수 있는 내용들이 망라적으로 담겨져 있다. 현재 충북에는 충주, 진천, 괴산, 음성, 연풍, 청안, 회인, 문의, 영춘 등 9개 군현의 광무양안이 남아 있어, 1백년전 역사를 복원하는데 최고의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충대 중원문화연구소가 주관한 이날 세미나에서 충대 김의환 교수는 '괴산군 능촌리의 마을구조와 토지소유', 강은경 연구원은 '괴산 일대 순흥안씨의 토지소유와 주거실태' 제목의 논문을 각각 발표했다. 두 발표자의 내용을 종합한 결과, 1백년 전 괴산 사회는 △광작농이 전혀 없었고 △무전농민이 상당수를 차지했으며 △전답의 토지 비
복지개념이 국가 최고의 정책적 이슈로 등장해 있는 가운데, 이를 대주제로 다룬 대규모 학술대회가 지난 14~15일 충북대에서 열렸다. 특히 이날 학술대회에는 충청권 외에 서울, 부산, 대구, 호남권 등 20여명의 교수들이 참가, 규모는 물론 근래 보기드문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충북대 윤진(사학과) 교수의 사회로 시작된 학술대회는 1분과(한국사부), 2분과(동양사부), 3분과(서양사부) 등으로 나뉘어져 진행됐다. 1분과에서 전남대 최원종 교수는 '고려시대 사원의 구휼 기능' 제목의 발표에서 "고려시대 사찰은 지금까지 수행과 경제 교역의 공간으로만 알려져 왔으나 구휼 기능도 분명히 존재했다"고 밝혔다. 그는 그 근거로, 김부식이 지은 고문헌 '혜음사신창기'에 등장하는 '(혜음사에서) 양곡을 비축하여 놓고 그 이자를 받아 죽을 쑤어서 여행자에게 공급했다'라는 표현을 제시했다. 성균관대 손병규 교수는 조선시대 복지정책을 '절용이애인'(節用而愛人·국가재정을 절약해 백성들을 사랑하라), 즉 절약적인 복지정책으로 규정했다.(그림 참조) 그는 "조선시대 복지정책은 경상비 지출 최소화→재정비축→비상시 백성 구휼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며 "그럼에도 환곡정책이 실패한 것은
진휼((賑恤)은 굶주리거나 질병에 걸린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말한다. 농업국가인 조선도 이 진휼정책에 국가적인 관심을 쏟았다. 그 어렵던 시절에 복지정책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사간원의 상소 내용도 실려 있다. 진휼을 왕정의 기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궁한 사람을 구제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왕정(王政)에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 한(漢)나라의 상평창(常平倉)과 당(唐)나라의 의창(義倉)도 또한 이 때문에 설치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휼을 국가 제일 정책으로 내세운 이면에는 또 다른 절실한 이유가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농민은 생산과 조세의 주체였다. 이 경우 농민들이 기근 등으로 유랑을 하면 세금을 걷을 수 없고, 세금이 잘 걷히지 않으면 국가재정이 파탄에 빠지게 된다. 진휼정책은 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의도도 지녔다. 조선시대 굶주린 백성을 보살피는 책무는 기본적으로 수령과 관찰사였다. 그러나 사태가 급박할 경우 임금의 명에 의해 중앙에서 임시 사신이 지방에 파견됐다. 이들을 진휼사(賑恤使)라고 불렀다. 세종대 안순(安純·1371∼1440)이라는 인물이 우리고장 충청도 진휼사로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이 밑으로 물이 다 들어오잖아요. 이게 어떻게 물막이판이야" 지난 1일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A(60)씨는 주택 앞에 설치된 물막이판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이곳 반지하에 30년째 거주하는 A씨는 장마철이 되면 '호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난 2017년 충북 지역에 집중호우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이 온통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침수 피해로 3천만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빗물이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살림은 두고 피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지형이 주변보다 낮아 주요 침수 지역으로 꼽힌다. 또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다세대주택 등이 밀집해 있어 반지하 주택 비율도 높고 하수구도 많아 침수에 취약하다. 지난해 충북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청주시는 '재해취약주택 지원 사업'을 통해 A씨가 거주하는 주택 출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물막이판은 도로가 물에 잠겨도 건물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주로 건물 출입구와 반지하 주택의 창문에 설치한다. 하지만 A씨
[충북일보] "단양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는 김문근 군수가 지난 6월경 인구 관련 포럼 발표에서 군민들과 약속한 일성이다. 김 군수가 민선8기 38대 단양군수로 임기를 시작한 지 취임 2년을 맞았다. 김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을 만들기 위해 주마가편의 자세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단양의 관광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내륙관광 1번지 단양을 향해 한 단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루섬 권역 종합관광지 개발과 리조트 조성 등 민간 투자 사업으로 체험형 관광지로서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 공모 사업에 전국 1호 사업으로 단양역 복합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선정된 만큼 사업을 꼼꼼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군수는 "민선 8기 단양호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내 '건강한 단양 살고 싶은 단양'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 주요 군정 성과는 "적은 인구를 지녔지만 단양군은 지난 2년 동안 대도시에 견줄만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