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리지는 1751년(영조 27) 조선후기 실학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이 저술한 조선시대 지리서를 말한다. 그러나 책이름 '택리지'는 처음이 아닌 후대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저자 이중환은 30년 동안 전국을 방랑한 끝에 그의 나이 61세인 1751년 그때까지의 체험을 기록한 초고를 바탕으로 택리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중환은 이 택리지를 완성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67세였다. 이런 택리지는 저술된지 200년이 훨씬 넘었음에도 오늘날에도 공감되는 바가 적지 않다. 바로 공리공담이 아닌, 실학적인 관점에서 지리적 사상을 저술했기 때문이다, 이중환은 젊은 나이인 24살에 지금의 고시인 문과에 합격해 숙종 39년(1713)에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영조 1년(1725) 이른바 목호룡(睦虎龍·1684~1724) 사건에 연루돼 국문을 당한 끝에 유배를 두 차례나 반복했다. 1722년 목호룡이라는 인물이 "노론들이 경종(영조의 이복형)을 시해하려는 모의가 있었다"라고 고자질을 했다. 이 여파로 영의정 김창집 등 당시 4대신을 포함해 60여명이 처형당하는 살육행위가 일어났다. 이를 신임사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2년 뒤인 1724년 노론의 지지
고려말~조선 초기의 청주 토성(土姓)은 전국 다름 대읍(大邑)에 비해 그 수가 훨씬 많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당시 청주지역에 다양하면서 강력한 토성집단이 존재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그 분석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충북대 신호철(역사교육과) 교수가 최근 청주문화원이 발간한 '청주의 뿌리를 찾아서' 책머리에 논문 '청주의 성씨와 인물'을 기고했다. 논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성씨와 본관이 언제 생겨났고, 또 토성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 교수에 따르면 △성씨가 일반화된 것은 고려 중기 이후이고 △본관은 고려의 중앙정부 통제력이 전국적으로 미치기 시작한 성종 때부터 생겨났다. 이밖에 토성은 고려시대 전국 각군현에 토착해 있던 지방 호족들이 지니고 있던 성씨를 일컫고 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망성(亡姓), 내성(來姓), 속성(續姓) 등 여말선초의 여러 성씨 형식과 토성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임진왜란 전까지도 전인구의 40% 정도가 성이 없는 무성층(無姓層)이었고 △1909년 이른바 민적법이 시행되서야 모든 국민이 성을 가질 수 있었다. 이와 관련 신교수는 "세
최근 사회 문제로까지 확대된 중국 스모그가 중부권을 포함한 한반도에도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따라 감기, 천식을 장기적으로 앓는 사람은 물론 비감염자도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3일 국내외 각종 뉴스매체들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1월 하순부터 북경, 천진 등 동북아 지방으로 중심으로 강력한 스모그가 발생, 공항은 물론 고속도로가 일부 폐쇄되기까지 했다. 심지어 스모그 농도가 워낙 강하자 티베트 지역의 신선한 공기를 담은 '캔 공기'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중국 스모그는 다행히 한반도(청원 기준)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 규정은 미세먼지(PM10) 농도가 100㎍/㎥에 넘어서면 대기오염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이날 오후 현재 30㎍/㎥로 관찰됐다. 고려대기환경연구소(청원 강내 소재) 정용승 소장은 "중국 미세먼지가 한반도에 도달하는 데는 기압배치도와 함께 기류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며 "다행이 이번에는 서내지 북서기류가 유입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동북아 기압배치도와 기류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중국 스모그가 한반도까지는 날아오지 않는다'고 단
청주에서 가장 잘 알려진 누각은 중앙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는 망선루(望仙樓)다. 망선루의 고려시대 때 이름은 '경치를 모은다'는 뜻의 취경루(聚景樓)였다. 지금의 이름은 조선 세조 때의 권신인 한명회가 지었다. 이후 망선루는 건축학적으로 두세 번의 변화를 더 겪었다. 조선후기 청주목사였던 이섬(李暹·1612∼1673)과 이수득(李秀得·1697~1775)에 의해 추가 중수가 있었다. 망선루와 가까운 곳에는 청주옥이 위치했다. 이중 이섬이라는 인물은 청주옥에 얽힌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죄인 관리를 잘못해 결국 청주목사 자리에서 파직을 당한다. '집의 이유상, 장령 심유가 아뢰기를, "청주(淸州)에 수감되어 있던 살인한 죄인과 아비를 시해한 죄인이 형신을 받은 뒤 거짓으로 옥중에서 죽자 목사 이섬(李暹)이 곧바로 시친(屍親)에게 내어주었는데, 여러 달 동안이나 도망하여 살다가 이번에 발각되었습니다. (…) 목사 이섬을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소서."- 반면 숙종~영조 연간을 살았던 이수득은 같은 청주목사를 역임했으면서 이섬과 정반대의 행정을 펼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가 진휼 관리를 잘 하자 당시 암행어사 정상순이 크게 칭찬했다. '정상순이 말하기를, "비단 잘
16. 왜구 고려와 조선을 습격했던 이른바 전기왜구의 소굴은 쓰시마, 이키(壹岐), 마쓰우라(松浦)와 고토열도(五島列島)였다. 아기발도(阿只拔都)라는 소년두목도 이키 출신이라고 하지만 500척의 배로 침범한 것을 보면 섬 하나만의 세력은 아니었다. 중국 연안을 습격한 후기왜구의 출신지가 『주해도편(籌海圖編)』에 나온다. 사쓰마(薩摩), 히고(肥後), 나가토(長門), 오스미(大隅), 치쿠젠(筑前), 휴가(日向), 세츠(攝津), 하리마(播磨), 기이(紀伊), 다네가시마(種子島), 부젠(豊前), 분고(豊後), 이즈미(和泉) 등지이다. 이 옛 지명을 지도에서 보면 규슈와 혼슈 남부 일대인 가고시마, 구마모토, 나가사키, 후쿠오카, 미야자키, 오이타, 야마구치, 오사카, 효고, 와카야마, 미에, 오이타현에 해당된다. 이 책에 연안을 침범한 왜구의 행태를 기술했다. "매일 닭이 울 때 일어나 밥을 먹은 후 두목이 높은 자리에서 장부를 펴 약탈 나갈 대장과 대원을 정한다. 대원은 30명으로 각대가 서로 1 ~ 2리 거리를 두고 소라나팔로 신호한다. 저녁에 돌아오면 각기 약탈한 재물을 바치고 감히 숨기지 않는다. 매번 부녀를 잡아와서 밤에는 반드시 주색에 빠져 지낸다.
국립환경과학원이 얼마전 "호랑이 없는 남한에서 담비가 최상위 포식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담비는 같은 족제비과 동물 중에서도 나무를 잘 타고 또 땅 위에서 날쌔기로 유명하다. 이런 요소들이 담비를 최상위 포식자로 만들고 있다.담비의 중세 표현은 '담븨'로 이것이 '담뷔', '담뵈' 순으로 변했다. 경상도 지역에서 담비를 '담보' 또는 '담부'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아가 담비가죽의 순우리말은 '잘'로, 중세어 '쟈할'이 변했다. 이밖에 담비를 한자로는 '貂'(초), 또는 '山獺'(산달)이라고 쓰고 있다. 고사성어 중에 '구미속초'(狗尾續貂)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개꼬리로 담비꼬리를 잇는다'는 뜻으로 쓸모없는 사람에게 관직을 함부로 주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때 사마륜(司馬倫)이라는 인물있었다. 그는 진나라 무제 사마염(司馬炎)의 숙부로 조왕(趙王)에 봉해졌다. 사마염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사마충(司馬衷)이 혜제(惠帝)로 즉위하였으나, 사마륜이 그 자리를 찬탈했다. 그런 사마륜은 권력을 남용, 그의 친척과 친구들은 물론 노비와 시종들에까지도 관직을 주었다.그러자 진서(晉書)를 쓴 방현
충북의 향토음식도 도민들의 기질과 비슷, 전반적으로 '꾸밈이 없고 평범한 것'을 주요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충북학연구소(소장 김양식 박사)가 최근 충북학 교양총서 시리즈의 일환으로 '충북 민속문화의 길갑이'를 발간했다. 410여쪽 분량의 이 총서는 '충북민속학 총론'(이창식), '충북인의 일생의례'(최명환), '충북의 세시풍속'(안상경), '충북의 구비전승'(이상희), '충북의 향토음식문화'(김운주·이규진) 등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중 '충북의 향토음식문화'가 오랫만에 발간된 향토 음식서일 뿐 아니라 관광산업과 직결돼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방향의 관심을 끌고 있다. 김·이 두 사람의 공저는 충북 향토음식의 전반적인 특징을, 어쩌면 드러나는 특징이 아닐 수도 있는 '꾸밈이 없고 평범한 것'으로 개념화했다. 공저는 이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충북 향토음식은 짜지 않으면서 맛은 대체로 맵고 △젓갈을 사용하지 않으며 △기름지지 않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이밖에 음식의 외형에 대해서는 "모양과 색깔은 요란하지 않고 자연에 가까운 조리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공저는 충북 향토음식의 이같은 특징을 김치류와 장아찌류 그리고 단위별 음식으로도 나눠
제설제인 염화칼슘은 수질오염은 물론 도로변 가로수에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청주시 등 도내 지자체들이 많이 심은 이팝나무와 잣나무는 염화칼슘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국립산림과학원에 따르면 제설제 중 사용량이 가장 많은 염화칼슘은 이른바 조해성(潮解性), 발열성, 빙점저하 등의 화학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조해성은 공기중에 노출된 고체가 수분을 끌여들여 녹는 현상, 발열성은 불해되면서 열을 발생시키는 현상, 빙점저하는 물이 어는 온도는 떨어뜨리는 현상 등을 일컫고 있다. 화학적으로 염화칼슘은 물과 접촉할 경우 물분자의 결합을 방해한다. 따라서 염화칼슘이 녹아있는 물은 그 빙점이 0도가 아닌, 무려 영하 55도로 떨어지게 된다. 염화칼슘은 이런 특성 때문에 제설제로 가장 각광을 받아왔다. 그러나 염화칼슘의 이같은 화학적 특성은 도로변 각종 가로수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있다. 그 경로는 직접적인 피해와 간접적인 것으로 나뉘고 있다. 과학원은 직접적인 피해에 대해 "제설작업 중 또는 염화칼슘이 녹은 물이 바람에 날려 잎이나 가지에 직접 접촉됨으로써 나타난다"며 "겨울 동안에는 눈에 띄지 않으나 일평균최저기온이 영상이
뗏목은 원시적인 배라 사고도 빈발했다. 여기에는 우리고장도 포함돼 있다. 성종 때 제천 사람들이 뗏목을 타고 한양으로 내려가다 익사한 사고가 실록에 자세히 적혀 있다. 당시 한강도승(漢江渡丞) 심지(沈智)라는 사람이 이런 보고를 한다. "충청도 제천의 정병 김중선 등 6인이 본현에서 뗏목을 타고 양근군 지경에 이르렀다가 큰 물을 만나서 뗏목이 풀리어 3인은 익사하고 김중선 등 3인은 부서진 뗏목을 같이 타고, 한강에 표류하여 이르렀으므로 신이 이를 구원해 내었습니다."인용문에 등장하는 도승은 조선시대 한강수계 7곳의 진(津)과 도(渡)를 관리하던 책임자를 말한다. 종9품이다. '진'과 '도'는 그 구별이 쉽지 않다. 다만 도하(渡河), 진강(津江)의 표현으로 미뤄, '도'가 좀더 규모가 큰 나루터가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사실 뗏목은 조선의 창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나설 때도 대형 뗏목사고가 발생했다. 익히 알다시피 이성계는 위화도까지 진출했다가 그곳에서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바로 그 직전의 상황에서 뗏목사고가 일어났다. 함께 출정했던 당시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1390)의 상소 내용
18년만에 충북출신 프로기사가 탄생했다. 주인공은 청주출신 김진휘(17·사진) 군. 김군은 14~20일 서울 한국기원에서 열린 제 132회 일반입단대회 본선 64강에서 7위를 차지, 입단에 성공했다. 이번 입단자 대회에는 전국에서 총 172명의 아마추어들이 참가, 이중 상위 성적자 7명에게만 입단의 영예가 주어졌다. 특히 이번에 입단 티켓을 거줘진 7명 중 6명은 서울·경기 등 모두 수도권 출신이어서 김군의 입단이 더욱 돋보였다. 나머지 입단자는 유병용(서울), 이호승(인천), 박대영(서울), 백찬희(광명), 신윤호(서울), 한승주(남양주) 등이다. 이로서 충북출신 프로기사는 노영하(청원) 9단, 김강근(청주) 7단, 권오민(충주) 5단 등 4명으로 늘어났다. 충북은 지난 1995년 김·오 두 프로기사를 배출한 후 18년 동안 등단자를 배출하지 못해왔다. 장수영 바둑도장에서 박병규 8단의 지도를 받은 김군은 본인 스스로 "이세돌 9단을 가장 존경한다"고 밝히고 있듯이 전투형 기풍을 지니고 있다. 그는 프로와 아마츄어가 함께 참가할 수 있는 제 3회 비씨카드배 국제바둑대회(2011)에서 중국 신예강자 구링이(古靈益·현 9단)를 꺾어 일찌기 전투력을 인정받은 바
남한강 상류의 산간 내륙에서 벌목돼 뗏목 형태로 운반된 소나무는 역시 궁궐을 짓는데 가장 많이 사용됐다. 광해군일기에서 영건도감이 이런 말을 한다. "작년 가을과 겨울부터, 여기 저기서 긁어모아 마련하여, 금년 경덕궁(慶德宮) 공사를 끝내는데 쓰려고 한 것이, 재목과 서까래 감을 합쳐 모두 1만8천여개였습니다. (…) 그런데 뜻하지 않게 경덕궁 안에 또 더 건축할 곳이 생겼고, 장롱과 궤짝, 제상과 향탁 등의 집기에 응당 들어갈 수효도 또한 2백, 3백개에 이릅니다."- 그러나 뗏목은 궁궐 뿐만 아니라 한양 사대부들이 자기집을 짓는데까지 사용되면서 갖가지 부작용을 낳았다. 중종실록에 이런 표현이 보인다."사대부의 집에서도 다투어 본받아 또한 장려하게 꾸미기를 힘써 화려한 서까래와 높은 용마루가 방곡에 즐비했는데, 선왕 때 재상의 집은 여기에 비교해 보면 마치 변소와 같았다. 수령들도 매번 집짓는 재목을 벌채해 뗏목과 배로 운반하여 권귀(權貴)에게 아첨하느라 동강과 서강을 메웠다."- 인용문 중 '권귀'는 사대부를 의미한다. 강원도 영월의 동강과 서강이 메워질 정도로 소나무를 벌채했다면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재목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영건도감이라는
전통시대 청주 별호(別號)의 하나인 '상당'(上黨)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성명(전 청주박물관장)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이 최근 '충북학' 최근호(제 14집)에 '청주 지명 상당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지역 전문가들 사이에 지명 논쟁이 일고 있다. 김 학예관에 따르면 '상당'이라는 지명이 역사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전기에 쓰여진 고려사 지리지부터 이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청주목은 본래 백제 상당현이다. 신라 신문왕 5년에 처음으로 서원소경을 설치하고…'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와 관련, 김 학예관은 중국 산서성에 위치하는 '上黨'(현 장치시)이라는 지명이 어떤 이유로 충북 청주에 그대로 전래된 것으로 봤다. 그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로 조선시대 상당산성의 승장 영휴(靈休)가 1744년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남긴 내용을 제시했다. 상당산성의 명칭, 축성내력, 성내 유물·유적 등을 적은 이 사적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돼 있다. '산의 이름이 어찌하여 상당이라 했습니까라고 묻자, 주인이 대답하기를 "'일찍이 육국지(六國地)를 보건대 중국 한(漢) 나라가 상당(上黨)이라 부른 내력에 해설하기를 하늘과 이어진 마을이라 상당이라 했
담비(멸종위기 Ⅱ급)는 최근 공개된 동영상과 달리 먹이섭취의 50% 가량을 이른바 '식물성'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노루 새끼를 공격하는 모습만 집중적으로 홍보한 것은 자칫 담비에 대한 이미지나 정보를 왜곡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국립환경연구원은 최근 담비(貂·marten)가 호랑이 없는 남한에서 최상위 포식자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원은 이에 대한 근거로 담비 2~3마리가 무리를 지어 노루 새끼를 공격하는 채록영상을 공개했다.동영상에는 △노루 새끼가 지나가자 담비가 나무 위에서 쏜살같이 내려오고 △그러자 노루가 공포 속에 방어 행동에 나서며 △이런 노루를 담비 무리가 공격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연구원은 이를 보충하는 자료로 "배설물을 조사한 결과 담비 1무리(3마리 정도)가 연간 고라니(성체) 또는 멧돼지(새끼) 9마리를 사냥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단일 종으로는 청설모가 먹이의 5.7%로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담비는 대형동물을 연중 사냥하는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이자 넓은 행동권을 지닌 우산종(Umbrella species)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우산종은 행동권이 넓은 동물의 서식지 보전이
남한강 뗏목은 얼음이 풀리는 우수·경칩이 지난다고 바로 운반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로 강물이 어느정도 불어나야 가능했다. 뗏사공들은 봄비로 물이 어느정도 불어나면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뗏목을 엮는 방법은 △칡넝쿨이나 쇠줄로 붙들어 매기 △나무에 구멍을 뚫어 연결하기 △쇠고리를 이음새로 박고 밧줄로 잡아매기 등이 사용됐다. 이렇게 완성된 뗏목배 하나를 '한동가리'라고 불렀고, 여기에는 보통 25~35개 정도의 굵고 곧은 소나무가 사용됐다.이렇게 영월이나 우리고장 단양 등 남한강 상류에서 만들어진 뗏목은 자본가인 목상(木商)이 자비를 들여 '강치성'이라는 제사를 올린 후에야 한양을 최종 목적지로 운반이 시작됐다. 이때 여자의 접근은 엄격히 금지됐고, 뗏목이 출발할 때는 작별인사를 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강치성을 드린 뗏목은 한번에 보통 5~7 동가리가 운반됐고, 이때 2-3명의 뗏사공이 동가리떼에 올라탔다. 그러나 뗏목도 배는 배여서 조타수 역할을 하는 사공이 필요했다. 뗏사공 중 제일 앞에 서는 사공을 '앞구잽이', 맨 뒤에 서는 사공을 '뒷구잽이'라고 불렀다. 이중 앞구잽이가 조타수 역할을 했다. 앞구잽이는 각 지점의 여울, 수심,
뗏목은 '목재 따위를 엮어 물에 띄워 내리는 나무'로 정의된다. 조선시대 우리고장 남한강으로 뗏목이 운반됐다. 이 뗏목은 일반 배와 많이 달았다. 또 그 자체가 나중에 상품으로 팔렸기 때문에 재화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종사자들에게는 생계수단이 됐던 셈이다. 그러면서 뗏목은 뗏사공을 운송했다는 점에서 운송수단의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뗏목은 단순해 보이지만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에 제작이 쉽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뗏목은 크게 벌목, 목재운반, 엮기 등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먼저 벌목은 낙엽이 진 이후인 음력 10월부터 2월 사이의 겨울철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여름에 나무를 베면 청태가 끼거나 뒤틀림 현상이 심해 목재로서 가치가 떨어졌다. 또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은 영농철이라 인력동원이 쉽지 않은 면도 있었다. 벌목을 했으면 일단 산 밑으로 운반해야 했으나 그 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다. 지금은 임도가 거미줄처럼 뚫여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러질 못했다. 조선시대에는 '통길'과 '목도'라는 방법으로 산속의 소나무를 산 밑으로 운반했다. 통길은 잡목을 제거한 후 경사면 아래로 미끄럼 길을 내, 통나무를 운반한 것을 일컫는다. 목도는 두 사람이 줄과
충북도내 역사·문화단체들이 2013년 1월을 전후해 다양한 장르의 학술서를 잇따라 출간했다. 특히 이번 학술서는 주제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분량도 많은 편이어서, 여느해보다 '학술 풍작'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최근 학술서를 펴낸 곳은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소장 박걸순 교수), 청주문화원(원장 류귀현), 충북도문화재연구원(원장 장호수), 충북학연구소(소장 김양식), 호서사학회(회장 최병수 충북대교수) 등 5곳이다. 이들 단체는 앞서 서술한 순으로 '중원문화연구', '청주의 뿌리를 찾아서', '충북문화재연구', '충북학', '역사와 담론' 등의 학술서를 각각 출간했다. 제 18·19집을 합쇄한 '중원문화연구'는 '삼국의 증평지역 진출과 이성산성'(양기석), '백제의 중원지역 진출'(오옥진), '중원지역 철생산 유적에 대한 성격'(조록주), '조선시대 황간의 사족동향'(고수연), '조선말기 회인현의 신분·직역과 남정책'(강민식)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밖에 '광무양안을 통해 본 1890~1900년대의 영춘군'(정경임), '대한제국기 영춘군 유암리 농민층의 토지소유와 경영형태'(김의환), '1930~40년대 홍기문의 역사연구'(정민영), '한국 여래상의 착의
충북도내 3개 국립공원 중 지난해 월악산 국립공원의 탐방객수가 가장 많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속리산, 소백산 등 2개 국립공원은 지난 2010년을 정점으로 하향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환경부 산하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최근 2012년 전국 20개 국립공원의 탐방객수를 집계한 자료를 발표했다. 그 결과, 제천시 한수·덕산면과 충주호를 끼고 있는 월악산 국립공원의 탐방객수가 2011년 73만명에서 104만7천명으로 전년도에 비해 43%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각각 2,3위의 탐방객수 증가율을 기록한 태안해안 34%, 다도해해상 22%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다. 특히 월악산국립공원은 지난해 104만여명의 탐방객수를 기록, 드디어 '탐방객 100만 시대'를 맞게 됐다. 이처럼 월악산국립공원의 탐방객이 급증한 것으로 △여름~가을철 일기상황 △오토캠핑장 대중화 △탐방로 신설 △저지대 탐방객이 많은 점 등 다양한 요인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월악산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2011년은 여름~가을철에 걸쳐 주말마다 비가 왔기 때문에 탐방객이 적었다"며 "그러나 지난해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급증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와
전회에 우리고장 문의(청원)가 관향인 고려말 대신 박의중(朴宜中·1337~1403)이 억정사 대지국사탑비(보물 제 16호·충주 엄정면 괴정리 )의 글을 지었다고 밝힌 바 있다. 현존하는 사료를 보면 대지국사(大智國師)는 고려후기 우리고장 충주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는 속명이 한찬영(韓粲英)으로, 본관은 청주(淸州)다, 그리고 아버지는 사복직장에 재직했던 한적이고 어머니는 청주곽씨이다. 부모 모두 청주를 관향으로 가졌다는 점이 우리고장과의 밀착도를 더 높이고 있다. 그는 1341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태고화상 보우를 은사로 삭발하고 계를 받았다. 이후 승과에 응시한 23세 전까지 보우에게 5년, 정혜국사에게 3년, 수자화상에게 1년간 공부를 했다. 보우에게서 법을 받았고, 정혜국사로부터는 수행을 배웠으며, 수자화상을 통해서 참선의 진정한 의미와 방법을 배웠다. 그는 1353년 승과에 장원 급제, 대흥사의 주지가 되면서 사판승(事判僧)의 길로 접어든다. 그 결과, 왕명에 의해 석남사, 월남사, 신광사, 운문사 등 중요한 절의 주지를 맡아 선법을 설하고, 1372년 공민왕으로부터 '정지원명무애국일대선사(淨智圓明無石+疑國一大禪師)'라는 호와 함께 금란가사, 바리때, 묘
13. 조선인 차별과 탄압의 화신 '데라우치 마사타케'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세이난전쟁에서 오른손 부상을 입어 경례도 왼손으로 했다. 보직도 전투지휘관보다 행정과 교육부문을 맡았다. 그는 프랑스에 유학한 후 1887년 중좌 계급으로 일본육사 교장이 된다. 그는 특이한 교장이었다. 퇴근 뒤에도 망원경으로 생도들을 감시할 만큼 꼼꼼했다고 한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히로시마 대본영의 병참과 통신책임자로 상석참모와 병참총감을 겸한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1848~1899)의 지휘를 받았다. 가와카미는 사쓰마 즉 가고시마파의 두목급이었으나 1899년 참모총장 현직에서 병사를 했다. 가와카미 인맥은 그 후 힘을 쓰지 못했다. 야마구치파인 데라우치의 견제 때문이었다. 데라우치는 대본영 근무 중 처음 조선과 악연을 맺었다. 일본군의 병참·통신망은 조선땅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정부의 허락 없이 군용전신선을 설치하거나 부산과 서울, 서울과 평양을 잇는 병참기지는 그가 추진한 일이었다. 병참망 일대의 동학농민군을 대거 학살한 사건의 배후에는 실무책임자인 데라우치가 숨어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 1사단 참모장과 참모본부 1국장을 지내고 1898년 초대
고려 공민왕은 1361년 홍건적이 수도 개경까지 쳐들어오자 복주(福州·지금의 안동)로 몽진했다. 몽진은 임금이 외침을 당해 급하게 피난길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안동에는 2개월 정도 머물렀다. 안동시는 이를 기념, 매년 '공민왕 헌다례' 축제를 열고 있다. 그러나 안동보다 더 오래 머문 곳이 있다. 바로 우리고장 청주로, 1362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5개월 가량 청주읍성에 체류했다. 고려사는 공민왕이 청주에 들어오는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임진에 어가가 청주(淸州)에 이르렀다. 처음 상주에 행차하였을 때 호종한 신료들에게 인가에 우거를 허락하고 그 주인으로 하여금 피하지 말게 하였더니…'- 공민왕은 체류가 길어지자 청주에서 과거 시험를 실시했고, 이때 취경루(지금의 망선루) 방목(榜目)에 장원으로 이름을 올린 인물이 박의중(朴宜中·1337∼1403)이다. 합격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朴實(박의중의 초명), 金濤, 金祗,(이상 을과), 鄭履, 李崇仁, 金仲權, 朴希道, 康好文, 趙德謙, 許時(이상 병과)'. 李猷 등 나머지 23인은 진사 합격자였다. 박의중은 조금은 낯설은 인물이나 매우 유능하고 강직한 성품의 관인학자였다. 그리고 우리 고장과도 적
가장 단순한 농기구의 하나인 '호미'도 지역에 따라 모양이 크게 차이가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현대화된 농기구에 밀려 많이 사라졌지만, 그 와중에도 진화의 길은 걷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문화재연구원(원장 장호수)이 '충북민속의 해' 기념사업의 일환인 '길에서 길을 만나다' 특별전을 국립청주박물관에서 갖고 있다. 도문화재연구원은 이와 관련해 '민속문화의 교차로, 충북'을 부제로 한 특별전의 도록을 발간했다. 호미는 논·밭의 풀을 제거하거나 흙을 북돋아주는데 사용되는 농기구로, 날은 대체로 '역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도록 자료에 따르면 일반적인 호미에 지역적인 특성이 가미되면서 그 외형은 보다 세분화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보습형 호미'는 쟁기의 모습처럼 날끝이 다소 뾰족하고 위는 넓적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날끝을 흙에 박아 젖히면 흙이 쉽게 뒤집어져 논을 매는데 적당하다. 충북을 비롯한 경기와 전북 일부 지역에서 볼 수 있다. '낫형 호미'는 날이 날처럼 너비에 비하여 길며 그 끝이 매우 날카로워 자갈이 많은 땅에서 주로 사용된다. 경상도 등 산간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세모형 호미'는 양변에 비하며 바닥의 길이가
충북도내 고라니(학명 Hydropotes inermis)의 기생충 감염률이 80%대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따라서 고라니와의 접촉이 잦을 경우 인간의 감염도 자연스레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사슴과의 고라니는 국내에서 보신용으로의 식용 뿐만 아니라 약재로도 애용하면서 줄곧 불법 수렵의 대상이 돼 왔다. 그러나 자연 적응력이 뛰어나고 여기에 다산(2~6마리)하는 특성으로 인해 개체수가 꾸준히 증가, 지난 2005년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됐다. 고라니는 조밀한 숲과 초지를 선호하면서 산간 저지대를 주된 서식공간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근래들어서는 개체수 증가로 인해 평야지 강가는 물론 농가 근처의 경작지에도 자주 출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충북대 의과대학과 수의과대학이 공동으로 '충북지역 야생 한국고라니의 내부 기생충 감염률 조사'를 실시했다. 충대 조사팀은 지난해까지 충대 수의과대학 동물병원에 내원한 고라니 20마리의 분변을 기생충학적인 방법으로 검사했다. 검사 대상이 된 고라니는 청주·청원에서 포획과 구조 그리고 길죽음(로드킬)을 당한 개체로 모두 성체였다. 그 결과, 20마리의 고라니 중 85%에 해당하는 17마리에서 1종류 이상의 기생충
'대풍(大風)을 앓는 집에서 마침 오사가 술동이 안에 빠진 것을 모르고 그 술을 마셔 마침내 병이 낫기도 했다.' 실학자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그의 저서 '산림경제'에서 '오사'(烏蛇·먹구렁이)의 약효를 적은 글이다. 2013년은 흑사띠인 '오사'의 해이기도 하다. 그는 인천부사, 상주목사 외에 우리고장 연원(충주) 찰방과 단양군수 등을 역임했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산림경제'를 저술했다. 산림경제는 농업 저술이면서 주택·건강·의료·취미 등 농촌생활적인 내용까지 아우르고 있다. 따라서 종래의 농서들에서 볼 수 없는 종합적인 농가 경제서이자, 일부 과학성도 겸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방대한 저술량에 비해 그의 문집, 연보, 행상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조현령이 지은 묘갈 문장과 실록, 송자대전, 범옹집(泛翁集) 등에 단편적인 이야기가 전하고 있어 긔의 유일한 전기 자료가 되고 있다. 범옹은 그의 부친 주국(柱國)을 말한다. 홍만선의 할아버지는 대사헌 이상(履祥)이고, 아버지는 예조참판 영(霙)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이정구(李廷龜)의 딸이다. 말 그대로 명문가 집안이다. 사료를 보면 그의 아버지 주국은 1674년(숙종 즉위년) 제
광복-50년대'한번 뭉쳐 민국수립, 다시 뭉쳐 실지회복'(정부수립)'못살겠다 갈아보자'에 '갈아봤자 더 못산다'(선거)60년대'엄마는 신고하고 아빠는 잡아내자'(반공) 전국민 11시 55분만 되면 모두 재건체조(보건) 70년대'절미하는 우리엄마, 밝아오는 새마을'(물자절약)'찬장과 밥상덮개 만들어 파리를 막자'(생활개선) 80년대 이후'아빠가 담배를 끊었어요 하얀연기 검은생명' (건강)'낳을수록 희망가득 기를수록 행복가득'(출산장려) 역대 정권의 국정운영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다. 이중 당시 정부가 내건 각종 정책구호도 중요한 열쇠말이 될 수 있다. 곧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차기 정부의 정책 구호가 어디에 방점이 찍힐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물론 지난 시절과 정치와 사회의 다양화 면에서 커다란 차이가 나면서 비교 자체가 무리일 수는 있다. 자료는 국가기록원(원장 박경국·전 충북도 행정부지사)의 도움을 받았다. ■광복-1950년대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됐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이때 '한번 뭉쳐 민국수립, 다시 뭉쳐 실지회복','대한민국 주권하에 남북을 통일하자'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6.25 한국동란의 전장
2013년은 뱀띠해, 그것도 60년만에 돌아오는 흑사(黑蛇·검은 뱀)의 해라고 한다. 인터넷 상에는 젊은 주부들 사이에 "2세를 낳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다"의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2013년을 흑사띠로 보는 것은 십간·십이지의 주역적인 해석에서 연유하고 있다. 먼저 금년이 뱀띠해가 되는 것은 '계사년'(癸巳年)의 '뱀 巳'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십이지(十二支)이다. 나아가 뱀 중에도 흑사띠인 것은 십간(十干)과 관련이 있다. 십간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다. 주역상 이 십간은 둘씩 쌍을 만들어 갑을, 병정, 무기, 경신, 임계 등의 오행(五行)으로 묶을 수 있다. 오행 중 갑을에는 청색, 병정은 붉은색, 무기는 황색, 경신은 흰색, 임계는 검은색이 일대일로 대응한다. 따라서 계사년에 해당하는 계(癸)는 검은색(黑)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2013년은 '흑사띠'다. 흑사하면 생각나는 것이 '먹구렁이'이다. 구렁이의 어원은 순우리말 '굵'(굵다)에 호칭어 '엉이'가 붙은 맡이다. 굵엉이가 굴겅이-궁렁이-구렁이 순으로 변했다. 이중 먹구렁이는 표피가 검은색을 띠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렁이의 또 다른 종류인 능구렁이는 이와 다소 다르
[충북일보] 충북 도내에서 저발전 지역이자 인구가 감소하는 동남 4군을 연결하는 새로운 산업벨트 조성이 추진된다. 충북도는 건설이 가시화되고 있는 영동~진천 고속도로 주변에 이 벨트를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2일 도에 따르면 보은과 영동, 옥천, 괴산 등 4개 군에 '동남권 신산업벨트'를 조성할 계획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이들 지역의 개발을 유도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다. 도는 영동~진천(오창)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신산업벨트를 구축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고속도로가 4개 지역을 모두 지나는 만큼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지역별로 산업단지를 1곳씩 새로 조성해 하나의 벨트로 연결하는 것이다. 먼저 보은군은 충북개발공사가 맡은 제4산업단지 조성이 진행 중이다. 사업 타당성 검토와 함께 관계기관과 협의 중이다. 옥천군은 민선 8기 공약 사업의 하나로 미래성장 산업단지를 조성한다. 현재 타당성 조사에 들어갔다. 영동군은 용산면 일원에 영동2산업단지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기본구상 및 타당성조사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괴산군의 경우 산업단지 조성을 구상 중이며 아직 명칭은 정해지지 않았다. 도는 4개 산업단지 조성이 완료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 도내에서 저발전 지역이자 인구가 감소하는 동남 4군을 연결하는 새로운 산업벨트 조성이 추진된다. 충북도는 건설이 가시화되고 있는 영동~진천 고속도로 주변에 이 벨트를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2일 도에 따르면 보은과 영동, 옥천, 괴산 등 4개 군에 '동남권 신산업벨트'를 조성할 계획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이들 지역의 개발을 유도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다. 도는 영동~진천(오창)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신산업벨트를 구축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고속도로가 4개 지역을 모두 지나는 만큼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지역별로 산업단지를 1곳씩 새로 조성해 하나의 벨트로 연결하는 것이다. 먼저 보은군은 충북개발공사가 맡은 제4산업단지 조성이 진행 중이다. 사업 타당성 검토와 함께 관계기관과 협의 중이다. 옥천군은 민선 8기 공약 사업의 하나로 미래성장 산업단지를 조성한다. 현재 타당성 조사에 들어갔다. 영동군은 용산면 일원에 영동2산업단지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기본구상 및 타당성조사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괴산군의 경우 산업단지 조성을 구상 중이며 아직 명칭은 정해지지 않았다. 도는 4개 산업단지 조성이 완료
◇취임 2주년 소회와 주요 성과는 그동안 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지속가능한 공감·동행 교육'을 펼쳐왔다. 학교는 교육의 본질에 충실하고, 학생은 스스로의 삶과 학습을 주도할 수 있도록 탄탄한 토대를 만들고 다졌다. 취임 후 2년은 충북교육의 '새로운 도전과 성장의 시기'였다.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었던, 공약은 도민과의 약속이다. 지난해 전국교육감 공약 실천 계획 평가 최우수에 이어 올해 공약 이행평가도 최고등급을 받았다. 2023년 교육부 17개 시도교육청 평가에서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됐다. 교육발전특구 공모에 도내 5개 지구가 선정돼 3년간 최소 150억 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학생 성장 기반을 단단히 다졌다. 학생들은 몸활동을 통한 기초체력 단련과 독서교육으로 마음 근육과 기초소양을 쌓고, 이를 바탕으로 기초·기본 학력을 기른다. 올해는 기초학력 진단검사 후 모든 학습지원대상 학생 1대1 개별 맞춤형 지원계획을 수립하고 '다채움' 플랫폼을 통한 촘촘한 지원방안도 살피고 있다. 현장에서 답을 찾아 충북형 정책을 수립했다. 교직원 단체의견 수렴과 전문가 협의회를 통해 '작은학교 활성화 종합계획', '지금은 아이성장 골든타임' 정책이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