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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걸쳐 독립운동…'잊혀져가는' 연병호 선생

하루 평균 기념관 관람객 10명 내외 불과
접근성 열악·공간 협소해… 관람객 발길 '뚝'
한국과 중국 오가며 독립활동 이어가
3대에 걸쳐 독립운동 펼친 사례 매우 드물지만 인지도 점점 떨어져

  • 웹출고시간2024.08.13 18:05:50
  • 최종수정2024.08.13 18:05:50

독립운동가인 연병호 선생을 기리는 항일역사공원이 증평군 도안면에 조성돼 있지만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썰렁하기만 하다. 지난 2016년 건립된 이 역사공원에는 연병호 선생의 상징조형물과 항일기념관, 생가 등이 복원돼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고 있다.

ⓒ 김용수기자
[충북일보]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지난 11일 찾은 증평의 연병호 항일역사공원.

주말인데도 이곳은 찾는 이 없이 적막했다. 공원 가운데 설치된 선생의 동상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

공원 바로 옆 도로엔 주말을 맞아 어디론가 떠나는 차량 행렬이 줄을 이어 한적한 역사공원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선생의 생가와 공원을 연결하는 '무궁화 길'에도 뜨거운 날씨 탓인지 시민들의 발걸음은 없었다.

생가 주변으론 잡초가 무성했고, 선생을 모시는 사당의 문고리는 검붉게 녹슬어 있어 원래 색깔을 추정하기도 어려웠다.
ⓒ 김용수기자
항일역사공원 관계자에 따르면 기념관을 방문하는 일반 방문객은 하루 평균 10~20명 안팎에 불과했다.

이곳에서 만난 이성인 문화해설사는 "윤병호 선생의 가족처럼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펼친 사례는 매우 드물다"며 "국내·외를 오가며 독립활동을 이어간 이들의 행적이 점점 잊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1894년 11월 22일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독립운동가인 형 연병환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이 남달랐다.

선생은 고향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4월에 형이 있는 중국 룽징으로 건너가 근대적 사상과 이념을 체득했다.

이 시기에 선생의 형 연병환은 중국 해관과 세관에서 근무하며 수익 대부분을 독립운동에 지원했고 학교도 세워 교육 활동에도 힘쓰고 있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선생은 자연스럽게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게 됐고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느꼈다.
ⓒ 김용수기자
선생이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시기는 3·1 운동 직후부터다.

상하이에서 귀국한 그는 같은해 6월 청년외교단을 결성한 뒤 외교원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 관계자들과 교류·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의 이름이 널리 알리진 계기는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독립운동의 신념과 각오를 밝히는 '독립 기념일의 말'(1920년 3월 30일자)을 게재하면서다.

1920년대에는 대한독립광복단에서 '연병학' 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무장투쟁에도 앞장섰고 임시의정원에서 충청도의원으로도 선출됐다.

이외에도 한국혁명당과 신한혁명당의 조직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 세력들에게 인정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937년 상하이에서 일제 밀정인 상해거류조선인회장 이갑녕이 저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연루자로 일제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됐고,'적색운동의 최고 간부'로 몰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6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44년 10월에 출옥한 선생은 제헌국회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63년 1월 26일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 김용수기자
사후 그가 남긴 유품은 두루마기 한 벌과 고무신이 전부였다.

선생의 정신은 조카(연미당)·조카사위(엄항섭)·조카손녀(엄기선)로 이어지며 더욱 빛을 발했다.

이 중 연미당은 1930년 한인여자청년동맹 창립에 참여하고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결성해 선전과 홍보활동에 주력했다.

연미당의 맏딸 엄기선도 부모의 영향을 받아 어린 나이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가하는 등 독립 활동의 명맥을 이었다.

한국과 중국, 만주를 오가며 괄목할 만한 독립운동의 자취를 남겼음에도 연씨 일가의 업적은 오랜 기간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들은 대부분 독립 활동을 국내가 아닌 중국이나 만주 등 해외에서 전개했기 때문이다.

선생 일가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후손과 고 박걸순 충북대 명예교수 등 역사 연구가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관련 자료가 부족하다 보니 선생의 활동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등 오류도 많았다.

연병환의 경우 잘못된 묘비명으로 중국에 방치돼 있다가 80여년 만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 공간이 너무 협소하단 지적도 나온다.

기념관에는 선생의 출생과 업적을 다룬 자료들이 전시돼 있는데 공간이 한정돼 있다 보니 대중에 공개되지 않은 자료들도 많다.

이에 유족과 관계자들은 전시실 확장을 추진했으나 증평군은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잠정 중단한 상태다.

선생의 손자 연규은(80)씨는 "할아버님을 모시는 추모제는 매년 진행되고 있지만 홍보가 잘되지 않아 시간이 갈수록 증조부의 존재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도민들께서 국경일인 3·1절과 광복절에라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 암성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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