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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식

전 음성군 환경위생과장·시인

가슴 한켠이 멍해진다.

주말 오후 할 일 없이 집안을 이리저리 뒹굴다가 무심코 커튼을 걷었다. 한꺼번에 시신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그 미세한 입자들이 온몸에 퍼진다. 문득 작년 겨울에 보아둔 보리밭이 생각났다. 서둘러 차박준비를 해 현관문을 나섰다. 또 역마살이 뻗친 것이다.

한 시간을 넘게 달려서 보리밭에 도착했다. 이삭이 노릇노릇 익어가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고 셔터를 마구 눌러댔다. 카메라에는 하나둘 풍경이 저장되고 그리움은 새록새록 가슴에서 현상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먼저와 있었다. 관광지는 아니지만 나름 낭만과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이겠지 그 고통의 시간이 소중한 그리움으로 변해 있는….

오늘 이 시간 단숨에 달려와 바라보는 보리밭, 보릿고개를 넘으면서 그것이 보릿고개인 줄 모르던 시절 어머니의 한숨이 유난히도 길었던, 들숨 날숨에도 늘 한숨이 섞여 있던 어머니의 늦은 저녁처럼 아직 여물지 않은 보리 이삭들이 흔들리며 내는 소리에서 그 길었던 보릿고개를 넘던 나즈막한 어머니의 발소리를 듣는 것도 내 기억에 잋혀지지 않는 가난한 날의 그리움 때문일 거다.

보리를 꺾어 피리를 만들었다. 있는 힘껏 불어 보았지만,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때 어머니의 보릿고개 만큼이나 길었던 피리 소리는 언제 멈추었을까. 불다가 불다가 지쳐 쓰러져 잠이 든 밤 꿈결에 들리던 피리 소리가 이제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희미한 기억처럼 남아있다.

살면서 문득문득 양대를 숭숭 집어넣고 넓적하게 만들어 한 끼를 때우던 보리개떡이 그리울 때 가 있었다. 한여름 샘에서 갓 길러 온 물에 말아 먹던 보리밥이 그리고 상추에 된장을 듬뿍 발라 한입 가득 쌈을 싸 먹던 그 보리밥의 맛이, 밤이 깊어가도록 온 동네를 반딧불이처럼 돌아다니던 보리피리 소리가 선잠 속에서 들릴 때가 있었다.

엄마의, 할머니의 손을 잡고 보리밭 고랑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마냥 즐겁기만 한 아이들은 엄마의 그리고 할머니의 기억 속 보리밭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때 어머니가, 아버지가 보릿고개를 넘을 때 철없이 재잘거리던 나를 보고 어떤 마음이었을까. 보리에 한 줌의 쌀을 섞어 밥을 짓고 할아버지 아버지의 도시락에 쌀밥을 골라 푸시고 아이들의 밥그릇에 보리밥만 가득 담으시던 어머님도 그 때 그 추억이 그립다고 하실까.

보리밭 가장자리에 주차하고 차에서 내려보리 한발 한발 보리밭으로 들어갔다. 이삭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어머니의 긴 한숨 소리가 들린다. 아직은 여물지 않은 이삭에서 구수한 보리밥 냄새가 난다. 어린 시절 허기를 달래던 피리 소리가 들린다.

떠들썩하던 사람들이 돌아갔다. 이랑과 이랑 사이 어스름 어둠이 내리고 서산에 붉은 노을이 보리 이삭 사이사이에 내려앉았다. 아주 잠깐 나도 50년 전의 내가 되어 그곳에 서 있었다.

차로 돌아와 커피 한잔을 타서 보리밭과 노을과 어둠을 행해 앉았다. 구수한 커피 향이 실핏줄을 타고 돈다. 이렇게 저무는 시간 그리움과 마주하며 마시는 커피 한 잔, 행복하다 이 구수한 커피 향은 아프리카 어느 밀림에서 나에게 그 먼 거리를 날아왔을까. 멀리 있는 길을 걸어온 커피 향처럼 먼 훗날 아주 먼 훗날 기억에 쌓인 먼지를 털고 가슴 깊은 곳에서 문득 오늘의 이 커피 한잔의 기억도 꺼내 볼 수 있을까.

훗날 오늘, 이 짧은 단상이 가슴에 또 다른 기억으로 남아 문득문득 목젖을 타고 올라오는 슬픈 그리움이 되기도 할까. 창밖 솔잎이 유난히도 푸르다. 노을이 아프도록 시리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추억은 그리워서 좋다. 아픔도 고통도 지나면 다 그리워지는 거다. 오늘 보릿고개를 오르는 어머님의 발소리가 보리피리 소리보다 가볍게 들리는 것도 다 그리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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